저의 할머니가 살아 계시면 올 해 100세가 되십니다

할머니는 철종의 부마이시며 태극기를 만드신 박영효의 조카이시고 그 당시 양반들만 다니던 경기고녀[7회,그당시는 여고를 고녀라 하였음]를 나오셔서 보성전문학교와 와세다 대학을 나와서 조선일보 초대 동경특파원을 지내신 할아버지와 결혼을 하신 후에는 정신여학교 가사 선생님을 하시며 독립운동을 하신 할아버지의 뒷바라지를 극진히 하셨습니다.

경기고녀 재학 중에는 ‘조선여인의 귀감’이라며 할머니의 사진과 밀납인형을 만들어 일본 국내성까지 가져간 미인이시며 평생 유교를 신봉하시다가 할아버지의 장례를 통하여[장로이신 이한빈총리가 장례위원장을 맡은 것을 계기로] 교회에 다니시고 노후에는 오직 아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보내셨습니다

저의 이름 평숙[평화롭고 맑게하라]은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인데 어릴 때 유독 외할아버지는 저를 많이 데리고 다니셨고 늘 제게 “평숙아, 너 이름값 할거다, 많은 사람을 거느릴거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할머니는 언제나 단정하셨고 특히 조카들이나 저희 손주들에게도 대학을 간 이후에는‘학사’에 대한 예라시며 말도 준존대를 하셔습니다

결혼하여서 할머니가 노후에 계시던 제주도 농장으로 신혼여행 겸 인사를 갔을 때에 “큰 일 할 사람은 집에서부터 잘 대접해야 된다”며 남편을 공경하라고 당부하시고 손주 사위라도 목사님 앞엔 늘 꿇어 앉으셨고 예수님을 믿기 전에도 “이거 드시게. 저거 잡숴 보시게”하시며 최대한 존대를 하셨습니다

할머니께선 교회에 다니시기 전에도 저의 집에 오시면 “평숙아 나는 예수 선생님을 믿지 않지만 너는 주님이라며 왜 예수선생이 그려진 달력을 침대 발치에 거니? 머리맡에 걸어야 합당한 도리가 아니겠니?”하시며 저의 짧은 생각을 깨우쳐 주셨고 언제나 쪽진 머리를 단정히 하시고 할아버지가 만주로 독립 운동하러 가셔서 데리고 온 첩할머니와 그 자녀들을 극진히 위하셨습니다

친 딸보다 작은 할머니의 딸들에게 더 좋은 옷과 음식을 주시고 불평하는 자녀에겐 “그렇게 하는 것이 너희에게 복이 되는 것이란다”하시며 그 딸들을 다 훌륭하게 기르시고 효도를 받으셨습니다

평생 남편은 물론 우리에게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으시며 남편이 친구를 만나러 나갈 땐 머리를 팔아서라도 꼭 용돈을 후하게 챙겨주고 남 앞에서 존대를 해야 후일을 기약할 수 있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과연 할아버지는 해방 후에 경주 군수를 비롯한 요직을 담당하시며 할머니에게 50년간의 고생을 보상하시고 아드님도 서울대학교를 수석졸업하고 서울대학교 1호 경제학박사와 교수가 되셨습니다

언니와 제가 의견충돌을 일으켜서 말다툼을 할 때 어머니가 꾸중을 하려고 하면 할머니는 아이들이 논리적으로 다투는 것은 좋은 일이니 많이 토론하게 하라고 하시고 저희에겐 화를 내지 말고 생각하는 바를 조리있게 이야기하라고 하셨습니다 늘 “효자는 부모가 만드는 거다. 딸들 데리고 며느리 험담하거나 어디 가서 아들 흉보는 여자가 가장 천한 사람이다”며 “자식은 품안의 자식이니 자기 잘 살면 그게 효자”라시며 오빠 때문에 속상해 하시는 어머니를 달래셨습니다

제가 부목 시절에 아들을 낳았을 때 80세의 연세에 우리 집까지 오셔서 아이를 안고 “큰 사람 되시게, 나라를 위해 일하시게”라는 덕담을 하셨던 기품 있으신 할머니, 평생 아들을 깍듯한 예절로 대하시고 할아버지가 옥살이 하실 동안 동생인 할머니 가정을 극진히 챙겨주셨던 보성 중 고등학교의 설립자며 교장님이셨던 오빠 맹주천선생의 아내[경기고녀 1회이시며 할머니에겐 올케]와 평생 편지를 주고 받으시며 아름다운 우애가 쌓으셨던 할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면 유교의 여인도 그리 아름다운데 가장 아름다운 예수님의 여제자로서 할머니만한 품위를 본받지 못한 부끄러움에 주님께 죄송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13회 이평숙 (옥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