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눈에 띄던 노숙자가 보이지 않을 때
두 가지의 마음이 교차한다.
하나는 무언지 잘 되어서 노숙자의 삶을 청산하고
그리운 가정으로 돌아갔을 것이라는 좋은 생각과  
다른 하나는 몸이 아프거나 상황이 더욱 나빠져서 노숙자 생활조차 하지 못하는
어려운 처지가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5월말 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유난히 키가 작았던 그는 민첩한 움직임이 마치 원숭이 같았다.
차에 가득 싣고 간 물건들은 그의 손이 닿기만하면  눈 깜짝 할 사이에 없어졌다.

그가 휙휙 지나다닐 때마다
휴지통이 비워지고 이리저리 뒹굴던 박스들이 없어지고
이런저런 일들이 다 해결되어졌다.

그는 잘한다고 칭찬을 해 주면 밥도 먹지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을 했다.
그에게는 궂은 일,힘든 일이 따로 없었다.
그가 일하고 나서 얻는 것은 컵라면 그릇에 미리 담아 놓은 한 그릇의 밥 뿐이었다.
그러나 밥을 감추어 놓고 일하다가  그 밥을 빼앗기는 일이 대다수 이었는데
그것은 빼앗꼈다기보다 늦게 와서 밥을 미처 타지 못한 사람들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다보면 자기 먹을 밥까지 다 없어진 것이다.

그 날 청소를 부지런히 마친 그가 나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사모님! 나 눈이 아파서 안과에 가요
보라매 병원인데 영등포에 있어요..”
그가 눈이 아프다하여 무심코 보았던 그의 눈을 자세히 보았는데
눈에 노랗게 고름이 들어 있었다.
그는 아픈  눈을 부비던 손으로 나의 손을 잡고는 자꾸 자기의 얼굴로 가져가려고 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그에게서 뒤걸음질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손이 닿지 않도록 몸을 잔뜩 움추리고 건성적인 대답만 하고 있었다.
그는 세 번을 연거푸 그렇게 호소하였으나
나는 그 때마다 그에게서 더 멀리 떨어지려했다.
조금 있으려니까 목사님이 물건을 차에 싣기 위해 지하도로에서 올라오셨다.
그러자 그는 목사님에게 가더니 나에게 한 행동 그대로
목사님의 손을 잡아 끌었고
눈이 아프다고 호소를 했다.
그런데 목사님은 조금의 꺼리낌이나 주저도 없이
그의 환부에 손을 엊고 간절히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주님이 치료해 주시지 않으면
이 영혼은 도움을 요청할 아무런 곳이 없습니다"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그 자리에서 주저 앉을 만큼 힘이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아! 바로 저것이 노숙자들을 움직이는 위대한 힘이었구나
저들을 긍휼히 여기는 주님의 심정을 목사님이 갖고 계셨구나
그것이  나와는 다른 면 이었구나.”

뒷걸음치며 그에게서 멀어져 가던  나의 발걸음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그 사람을 도저히 쳐다 볼 수 없었다.
나는 그동안 노숙자들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여서,
다루기가 힘든 사람이고
그들은 험악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여자인 나는
당연히 통솔할 수 없다고 단정했었다.
그래서 너무 칼같이 배식 시간이나 법을 지키며
그들을 통솔해 가는 목사님의 처사가
때로는 정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배식 시간이 끝난 다음에 오는 노숙자들을
데리고 들어온 자식처럼 목사님 몰래 밥을 주면서
목사님은 정의는 있지만 사랑이 없다고  생각해 왔다.
어쩌다 변명이 궁해지면
"사랑이 최고의 법!" 이라고 번번히 목사님의 처사에 대꾸를 해 왔는데
오늘 나는 나의 사랑과 목사님의 사랑이 얼마나 다른 것을 보게 되었다.
이젠 목사님의 어떠한 행동도
그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임을 의심치 않는다.

나는 오늘도 그 키작은 노숙자를 많은 무리 중에서 두리번 거리며 찾았다.
그의 건강해진 눈을 보고 싶어서이고
그 날 나의 모습을 용서 받기 위해서이다.
나도 이제는 고름이 나고 있는 그들의 환부에
주저없이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를 만나면 그가 내 손을 잡아 당기기 전에
내가  먼저 기도해 주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다.

그런데 그는 왜
오늘도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