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강해설교>>>  ?여덟째날   -목회자 조수길

?갈 4:8--20 율법과 은혜의 관계


이렇게 훌륭한 유업을 받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진보적인 믿음으로 자라가는 것이 아니라 퇴보해가는 이 갈라디아 사람들을 보고

사도바울은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이 경고의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참으로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참으로 그리스도를 만나고,?

                참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볼 떄까지는 

아무도 나는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할 수 없읍니다.


8절: "그러나 너희가 그 떄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여기서 '그 때에는' 우리는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을 했다고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대조를 이루는 말씀을 하십니다.

9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악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이제는'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이 우리를 아신 바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씀은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알아 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며 이것이 믿음의 본질인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하나님을 안다고 찿아도 하나님이 나를 몰라 주신다면 모두는 헛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통함이 없이 목놓아 하나님을 불러보아도 나는 하나님을 아는지는 아는지는 몰라도

하나님은 나를 도무지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4장 6절의 말씀입니다-?"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꼐로 올 자가 없느니라" 

??절대로 예수님을 알지 못한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없음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하십시오.


당신은 정말로 하나님을 아십니까?

그 보다도 더 하나님은 당신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있다면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절대 알지 못 합니다. 

산상수훈 마태복음 7:21-23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떄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바로 이렇게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서는 날 주님께서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 하노라"

이 얼마나 허무한 노릇입니까?

내가 아무리 하나님을 잘 안다해도 그것이 성경이 가르쳐 주는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 소용이 없읍닏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9절에서 말씀하시길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이 아신바 되었는데

?왜 다시 악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려 하는냐 하고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초등학문이란 율법을 일컬어 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초등학문인 율법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자체는 참 좋은 것이고 하나님의 속성중에 하나인 거룩성이 바로 율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이행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삼을 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성은 이 하나님의 거룩성을 지킨다는 것은 역부족이기 떄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영, 즉 성령을 받아들이고 그 능력에 사는 사람은  

이 율법을 자연스럽게 성취할수 밖에 없읍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 있는 성령님은 자기의 속성인 거룩한 일만 하시기 떄문입니다.

성령님의 도움 없이 율법을 이룬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불가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율법 아래 오셔서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전연 모르는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주신 것이라고 했읍니다.

마치 유치원 아이들에게 학문의 기초를 가르치듯이 

이 율법은 하나님에 대한 기초지식을 가르치는 학문이었읍니다.

그래서 초등학문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성숙한 은혜의 학문 속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은 유치원생을 위한 학문이라면 은혜는 대학생을 위한 학문인 것입니다.

학문이라면 어패가 있지만 그러한 수준의 비교급으로 예를 들어 보았읍니다.


말하자면 요즘 교회들이 십일조를 마치 구원의 척도처럼 가르치지요.

그러나 헌금은 이 은혜의 학문 속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사귐을 갖다보니 

그 기쁨에 넘쳐흐르는 마음이 너무 감사해서 바치는 것이 십일조요 헌금입니다.

헌금 많이 한다고 그것이 절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복음 속에 살다보면 감사함에 기쁨으로 헌금을 하게 되지요.


복음이나 은혜란 예수님 자신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 들인 사람만이 영생을 얻읍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잠간 전진하는 믿음과 퇴보하는 믿음을 점검해 볼수 있읍니다.


전진하는 믿음엔,,,

1,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읍니다.

2, 그래서 감격 속에서 살며 모든 사물을 긍정적으로 봅니다.

3, 이 사람은 모든 면에 자원하는 마음이 솟아 납니다.

이런 사람에겐 헌금도 봉사도 은혜속에서 행합니다.

이것들에 대한 어떤 대가나 기대도 없이 그저 감사하고 좋고 뜻깊은 행함에 더 기쁨을 얻으면서 합니다.

무엇이든지 자원하려는 마음이 생겨 하나님과 더 많은 사귐을 갖고 축복을 받읍니다.


퇴보하는 믿음엔,,,

1, 기쁨이나 감사는 간곳 없고 무거운 짐만이 나에게 남아 있읍니다.

2, 그래서 저주와 실망 속에서 모든 사물을 부정적으로 봅니다.

3, 이런 사람들은 모든 면을 억지로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