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박이섭 목사님이 “풍경구경보다는 인물구경이 더좋다” 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다.
이번에 정감독님을 만나 뵙고 그 이야기가 생각난 것은
그 어떤 절경을 본 듯 참으로 감동을 받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24일, 한인 연합감리교 시카고 연합회가 주최한 감독취임 축하예배를 많은 기대를 가지고 가서 참석했었다.
얼마나 굉장한 분이기에 한인 일세로서 50도 안되는 연세에 북일리노이 연회 감독으로 선출되셨을까?
420교회 12만 성도를 돌보는 그런 중요한 일에 쟁쟁한 본토 목사님들을 제치고 첫째로 선출이 되시다니…  
중앙 감리교회의 좁은 교회당이 입추의 여지없이 가득차서 감독님을 소개 하는 필름도 보고 친히 하시는 말씀도 처음으로 들었다. 여러사람들의 축사 말씀도 목사님들의 성가 합창도 들으며 큰 잔치 시간을 가졌다.  

마침 우리 교회가  찬양을 하는 차례여서 50여명이 찬양대 석에 앉게 되었기에
그 분의 얼굴을 더 가까이 뵐 수 있던 것은 행운이었다.
첫 인상은 선이 굵은 대장부의 기개가 넘치면서도 인자한 미소가 가득찬, 위엄있는 좋은 얼굴을 하고 계셨다.
음성도 좋고 말씀도 좋았다.

그 자리에 서시기까지의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신 이야기도 은혜가 되었지만
요한복음 21장 말씀으로 설교하실 때 얼마나 영력있는 말씀인지 우리 모두 아멘 아멘하며  화답하며 받았다.
100년 이민 역사를 돌이켜 보며 주님께서 우리에게두신 뜻을 일깨우실 뿐아니라
앞으로의 비전을 희망차게 비추어주는 귀한 말씀이요,
기적을 베푸시는 주님의 사랑과 풍성함을 우리들 가슴에 다시 새기시는 뜨거운 말씀이었다.
돌아오는 교회 밴 차에서 우리 모두 얼마나 기뻐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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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님의 바쁘신 일정 가운데 특별히 그 다음날인 월요일 저녁식사를 우리교회 장로님들과 함께 나누시게 된 것은
큰 영광이요 복된 기회이었다.
그 자리에서 더 가까이 사귐을 나누고 식사도 하며,
우리교회 자랑도 하고 부탁의 말씀도 드릴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듯하고 겸손하신 인품에 모두가 자석에게 끌리듯 하였다.
무엇보다도 요한복음 11장의 말씀과 감독님의 간증은 얼마나 우리를 감격하게했는지!
얼마나  충만한 은혜의 시간을 가졌는지!
얼마나 우렁찬 찬양을하며 기쁨으로 충만했는지!
마치 그 옛날 제자들이 예수님 둘레에 앉아 말씀 듣는 기분이 이럴 것 같았다.
그 날 밤의 이야기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어 감독님의 말씀을 간추려 보았다.


“꿈 같은 하와이에서  목회를 시작하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본인은 고국에 가서 활동하고 싶었고
사모는 미국에서 살고 싶은 마음의 절충지역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인 교포가 많은 하와이는 두 아들을 키우기에 환상적인 장소였읍니다.
마침 쟁쟁한 두 후보를 제치고 초청은 받았으나
사모는 따로 목회를 하지 말고 사모님 일에만 헌신할 조건을 달았더랬습니다.
그것은 받아들일수 없는 조건이어서  거절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한시간의 토의를 다시 거쳐 사모님도 목회자로 함께 받아 들인다는 만족할 조건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에 걸려 기도원으로 가서 주님의 응답을 간구했습니다.
기도원에서 이때 주신 주님의 말씀이 “나사로가 죽었느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죽었기때문에 부활의 기적을 맛본 나사로…. 죽지 않고 내 의지와 지혜로 살때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맛볼수 없게 만든다는 그러한  깨달음을 주님께서 주심으로
하와이로 갈 길을 위스칸신으로 돌리게 되었는데 그러한 삶의 구비 구비마다 주님의 특별하신 인도하심을 맛보며 살아왔습니다.

내 나이 16 세에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원래 우리 조부께서는  양명학으로 유명하신 학자이셨고 강화에서 상당한 유지이셨습니다.
어릴때는 한자교육을 많이 받았지요.
그런데 외아들이셨던 아버지께서  어린 나이에 거북바위 위에서 놀다가 낙상을 하여 크게 다치는 바람에
다리도 절게되고 발작도 하는 등 정상적인 생활을 할수 없으셨습니다.
귀한 아들을 고쳐보려고 그 많던 재산을 다 허비했지만 아무소용이 없었고
아무도 그런 집에 시집 올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전라도에서 밤에 보쌈으로 업어 오셨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고향을 나중에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지요.

어머니는 8 남매를 낳으셨는데 나는 세째 아들이었습니다.
어릴때 아버지가 싫어서 그분이 동을 향하면 나는 서로, 그분이 북을 향하면 나는 남으로 향하며 마주치지 않고 살려고 했지요.
첫째 아들인 형도 지진아로 태어나서 우리 가정의 비참함은 누나가 식모 살이를 해아하는 정도였고,
나도 중학교를 보낼 수 없다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엿듣고는
가출하여 2년이나 학업도 쉬고 철공소에서 돈을 벌어야하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다른 이웃 마을들에는 시골이라도 교회당이 들어섰었는데
우리 동네는 한 학자인 우리 할아버지 기세 때문에 들어 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노인 장로님 한 분이 근처에 사셨는데
자주 오셔서 교회가 세워지도록 허락해달라고 조르셨습니다.
나중에는 할아버님이 마지못해 허락하셨고 그 교회당은 바로 우리 집 뒤뜰 돌짝 밭에 세워지게된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우리 집은 교회 사택이 되었지요.
그때 교회당을 지으시는 장로님이 노구에 홀로 애쓰시는것을 보고 돌도 날라 드리고
어여삐 여기는 마음으로 도와드리는 와중에 복음을 듣게된 것이 내가 거듭나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새벽마다 4시가되면 찬물에 목욕을 하게하고는 안수해주시며
“너는 장차 주님의 종이 되라”고 축복을 해주셨습니다.
어린 나이에 새벽에 일어나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었는데도
“희수야” 이름을 부르는소리에 벌떡 일어나도록
하나님이 깨워주시는 경험도 여러번 했었지요.

아버지와도 그즈음 화해를 했습니다.
둘이 나무를 해서 리어카를 끌고 장에 나가 던 중
그늘에서 쉴 때, 아버지가 “희수야 아버지가 무능해서 미안하다.” 고 하시며
손을 어깨에 얹어 주셨던 그 날 후로 아버지의 아픔과 눈물을 이해 하게 되었습니다.
가정 형편도 어렵고 해서 신학교를 가게 되었고  누나가 식모살이로 용돈을 대주시는것으로 근근히 다녔습니다.  
그 당시 우리 가정에는 아무도 예수를 믿지않았고
나는 아버지의 상여 앞에서 두 세시간을 버티며 절대로 절을 하지 않음으로
예수장이임을 타협없이 과시했지만,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기독교와 전통 종교의 다리를 놓을수 있을까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국대학교에서 불교 철학을 연구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문제 일 뿐 아니라 당면한 내 가족의 문제였고 나의 숙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국에 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는데 그것은 오직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감독시험에서도 미국에 온 동기를 물어서 “오직 사랑 떄문” 이라고 했습니다만
내 아내를 만난 것은 예비해 두신 하나님의 소중한 선물이었지요.
아주 가난하게, 정말 아무것도 없이 달라스에서 살림을 시작하고 성도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청소년 목회를 할때는 영어가 짧아서 어린 학생들이 수정을 해주면 고쳐가며 설교를했고요.
어떤땐 “You did good job today!”하며 등짝을 치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위스칸신주에서 사역을 하다가 한국의 신학교으로 부름을 받아 나가 있었을 때는 기러기 아빠 노릇도 했었지요.
그 와중에 내게는 어머니같기도하고 누나와도 같은 샤론 감독님께서
돌아와 감리사의 일을 하라고 하시는것이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떨어져사는 것도 안타까와서였겠지만 나는 교수 일을 아주 좋아했어요.
그래서 조금 퉁겼습니다.
백인 일색 뿐인 그곳에 유색 인종이 나 혼자라면 안가겠다고요.
그랬더니 몇주 지난 후 이제 흑인 감리사도 선출했으니 오라고 또 불러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감리사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6년 후 이번에 세명의 감독 중 제일 큰 지지를 얻어 첫번째로 선출되었습니다.  
그 후로 샤론 감독님은 “인종을 초월한 캐비넷의 시작은 희수가 했다”고 가끔 이야기 하십니다………….”



위의 이야기는 지면상 간추려서 감독님의 친히 하신 말씀의 그 깊이와
문학적, 철학적 표현등 제대로 전달 할 수 없음이 안타깝다.
너무나 재미롭고 허심탄회 진솔한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받은 감동을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겠다.  
그 자리에 있던 우리 모두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었다.
더구나 우리교회를 아끼시고 지난 상처를 어루만지며 최선을 다해 5대 목사님을 찾아 주신다고 약속해 주셔서
참으로 감사한 마음 뿐이다.
밤 늦도록 영어목회, 영적인 성장, 인종을 초월한 선교 등 열정적으로 많은 말씀을 나누었는데 지면 관계로 이만 줄인다.
겸손히 기도 부탁을 하시는 친근한 감독님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와 찬송, 영광을 돌려드리며
감독님께 기도와 후원을 아끼지 않으리라  다짐해본다. ….(10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