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 2004.12.08, 15:49      
  
남편은 3일간 기도원에서 방언 은사도 받고 천국도 체험하는 놀라운 일을 겪었다.
주님을 감격적으로 만난 남편은 여기에다 치유 은사까지 받아 내게 죽음의 공포를 안겨주었던
과민성 장출혈 증상이 씻은 듯 사라지게 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나 나로 하여금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느냐란 말들을 하지만 그것은 바로 남편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며칠간 잠도 안 자고 성경을 읽기도 했고 그 많던 혈기와 고집도 사라졌다.
인근 교회들에서 전도지를 얻어 전도에 나서는가 하면 누가 기도를 부탁하면 3일간 금식기도를 해주기도 했다.

나는 남편을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사업을 벌여놓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남편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의 종이 되기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가셨다.
당시 3억원의 부도를 낸 우리는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았을 때 백기를 들었다.
결국 남편은 신학대학원에 입학했고 나는 최선을 다해 남편의 몫을 채워나가야 했다.

낮에는 남편 대신 일을 했고 저녁에는 선교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하루에 5명을 선정해 주님의 의지하고 사는 기쁨과 평안과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풀어보냈다.
그런데 그 편지를 읽은 분들이 큰 용기를 얻고 위로를 받았다는 답장들이 왔다.
어떤 이는 편지를 복사해 나눠주기도 했다.
나는 주위의 따뜻한 이야기를 담은 글들을 계속 쓰기 시작했고 이것이 문서선교지가 되어 매월 3만부나 발행되었다.
제작비는 책을 받아보는 시장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았고 미국에도 100여부가 보내졌다.
이 문서선교 사역은 남편이 신학대학원을 졸업하는 3년 동안 이어졌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 열정이 어디서 솟아났는지 모르겠다.

남편은 신학공부를 시작하면서 “인격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부족한 것이 많으니 정상적으로 목회를 하는 교회보다는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궂은 일에 써주실 것”을 서원했고 나도 함께 기도했다.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자 사역지 2곳이 한꺼번에 나타났다.
하나는 충현교회였고 다른 한 곳은 경기도 광주 거여동에 있는 장애인교회였다.
남편은 한국 교회를 대표하고 또 대형교회인 충현교회에 합격한 것을 자랑스러워 했다.

그날 저녁 가정예배를 드리며 나는 “충현교회에 뽑히게 해주신 것에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과 나는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멍해졌다.
충현교회는 우리가 기도한,궂은 교회가 아니라 남들이 모두 가고 싶어하는 교회였기 때문이다.

그날 밤 우리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충현교회를 포기하고 거여동 장애인교회를 임지로
결정했다. 그곳은 한명의 지원자도 없었기 때문에 경쟁도 필요치 않았다.

대부분 중증 장애인들이 거주하는 거여동교회는 비닐하우스를 개조해 교회와 거처를 만들어
합숙하는 곳이었다.
그들은 이런 곳을 자원한 목회자니 볼 게 있겠느냐며 며칠이나 견디는지 두고 보자고 빈정거렸다.

우리는 우선 그들이 바른 신앙인이 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해 하나씩 그들의 깊은 상처를
치유해나갔다.
신체보다 영혼의 상처가 더 심했던 그들은 작은 위로 한 마디에 몇 시간을 엉엉 울어대곤 했다.
그곳에서 열심히 사역한 만큼 열매도 풍성하게 맺혔다.
장애청년이 예쁜 아가씨를 만나 결혼을 하고 목사도 되었다.
외부 후원이 늘어나 더 이상 우리가 일하지 않아도 되었을 때 우리는 그곳을 떠나기로 했다.
이곳보다 더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o)(:ac)

정리=김무정기자 mooje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