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등학교를 졸업 할 때만 해도 친구들 중에 작은 키가 아니었다. 하지만 중학교에 들어가고 고등학교에 올라 가면서 키는 더 이상 자라지 않고 멈춰 선채 늘 키순서 대로 일렬 종대를 하면 앞에서 열 번 째를 못 넘는 것이었다. 그러니 늘 키 큰 친구들이 부러웠다.

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키가 작은 것이 그리 크게 신경 쓰이는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속박에서 해방 된 것 같은 자유로움을 느끼며 사회로 나온 후였다. 그 때 주위의 친구들이 하나 둘씩 남자들의 눈에 꽁깍지를 씌워 사랑을 하네 안하네 염문을 뿌리며 화려한 데뷔를 하기 시작을 하면서 나는 나의 키를 돌아 보게 되었다.

내 친한 친구 중에 한명은 키도 크고 외국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머리도 약간 곱슬머리에 투명한 우유빛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분위기는 정말 사운드 오브 뮤직의 줄리 앤드류스를 참 많이 닮은 분위기였다. 그애는 특히 남자 애들에게는 아주 상냥스럽게 소근소근 속삭이듯 대화를 하고 걸음걸이도 살폿이 가볍게 옷 자태를 안으로 여미며 걷는 모습이었다. 그러한 그녀의 자태는 서양의 모습과 동양의 자태를 합쳐 놓은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으니 당연히 주위의 남자들의 죽자 사자 덤벼드는 목표가 되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애는 성당을 열심히 다니고 있었는데 고등학교 시절부터 벌써 그 애에게 푹 빠져 쪽지에 시를 적어 전해주며 짝사랑하는 남학생들을 몸살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그애와 친하게 옆에 있었던 나는 그 친구를 짝사랑 하며 애간장을 녹이던 학생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늘 그렇게 남학생들에게 열병을 안겨 주었던 그애는 결국 대학 졸업과 동시에 같은 성당에서 만난 명문대 출신의 우리 고등학교와 담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남자 고등학교의 선배를 만나 시집을 갔다.

그 친구는 내가 20대 초반의 얼띠기였을 때 그 남자 선배와의 사랑을 이야기 하면서 첫키쓰를 고백했는데 그들은 서로 결혼을 약속하면서 첫 키스도 아무도 없는 성당안에서 했노라 수줍은 고백을 했었다. 그녀는 자기들의 성당 안에서의 첫키스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성스러운 의미와 뜻이 깊은 것이었다는 것을 애써 강조했다.

그녀가 한창 대학입시 준비에 바쁘던 고교 시절 까까머리 남학생들에게 이상적인 여인상의 모습이 되어 짝사랑의 표본으로 떠오르고 있던 그 때, 고등학교 졸업반의 겨울 방학이 거의 끝나갈 무렵 따사한 햇빛이 얼음을 살살 녹이기 시작하던 어느날 오후에 나는 그애를 만나기 위해 그 친구가 다니는 성당의 도서관을 찾아갔다.

성당의 사제관 옆 건물에 붙어 있는 2층 건물의 윗층에 위치한 도서관은 넓지 않은 공간을 이용해서 그런대로 열 뎃명 남짓 모일 수 있게 중앙에는 난로가 놓여 있고 책상들이 들어 서 있었다.

그날 내가 도서관 안으로 친구를 찾기 위해 들어 섰을 때는 몇명의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들이 교복차림으로 난로 주변에 옹기 종기 모여 서서 난로 불을 쬐며 꾀재재한 모습으로 두런 두런 거리는 산만한 분위기였다. 내가 도서관 안으로 들어 섰음에도 그들은 내가 밀고 들어서는 문소리에도 관심도 갖지 않은 채 눈의 촛점은 모두 그 친구에게 맞춰져 있었다. 그날 그 남학생들의 분위기는 같은 공간에 있던 내 친구의 관심을 끌고 싶어서 실없이 어정대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날 이후에 세월은 흘러 흘러 내가 미국으로 이민오면서 수십년이 지나가고 그 친구와의 연락이 끊어진지 오래 되었다. 세월이 물 흐르듯 지나간 어느날 나는 남편과 안식년을 위해 보스톤에 머물면서 그 근교에 살고 있다는 남편의 고교 시절 동창을 만나기 위해 한시간 정도 걸리는 보스톤 외곽에 위치한 그 친구의 세탁업 사업장을 찾아 갔다.

우리 부부가 그의 세탁소로 들어서며 그를 만나는 순간 그와는 초면인 나의 눈에 들어 오는 남편의 친구의 모습은 나의 먼 옛날의 한 순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아주 오래전 내 친구가 다니던 그 성당 도서관에서 내 친구에게 쭈빗 쭈빗 관심을 보이던 그 꾀재재한 남학생 중 한명이었던 것이었다. 나는 그의 앞에서 하마터면 폭소를 터트릴 뻔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 영문도 모르는 그와 초면인양 정중한 인사를 나눈 후에 조신하게 남편의 옆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날 이후에 우리는 보스톤과 그곳을 서로 왔다 갔다 만나면서 어느 정도 편하게 대화를 나눌 사이로 발전을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는 그에게 그 당시 그 도서관 이야기를 꺼낼 수가 있었다. 그 당시의 상황을 말하는 내 앞에서 그는 무척 멋적어 하면서도 한번도 표현해 보지 못했던 가슴 한편에 묻고 지낸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의 순간을 떠 올리며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당시 그는 내 친구를 자기도 좋아했지만 자기보다도 자기의 절친했던 친구가 내 친구를 더욱 애절하게 짝사랑 하면서 애태웠던 가슴 아릿했던 추억의 사건들을 부담없이 들려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표현은 못해 보았지만 내 친구를 짝사랑 하는 마음에 애를 태웠었노라 고백을 하는 그의 말 속에는 아직도 내 친구는 그의 마음 속에 영원한 이상형으로 남아 있음이 역력히 느껴져 왔다.

그들은 내 친구와 결혼한 자기들의 선배를 무척 부러워했다는 것이었다. 그날 나는 남자들의 가슴 속에 품고 사는 첫사랑의 순정이 그리도 깊고 지워지지 않는 한편의 감동받은 드라마처럼 생생한 장면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남편에게 물어보았다. ~~여보 당신은 키도 작고 보잘 것 없는 나와 어찌 결혼까지 했어요?~~ 부담없이 덤덤하게 물어보는 나의 질문에 남편은 ~~글쎄 나는 이상하게 큰 여자보다는 조그만 여자가 좋았어. 무엇을 살 때도 항상 큰 것보다는 작고 아담한 것을 골랐지! 그러니 세상에는 다 짝이 있는거야. 큰 남자는 작은 여자를 좋아하고 또 키가 작은 남자들은 키가 큰 여자들을 선호하고, 그러니 세상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겠지.~~ 그의 답변에 나는 소리 내어 웃으며 ~~그러니 나같은 마누라를 얻었겠지~~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날 나는 젊은 시절의 일이 머리 속을 스쳐갔다. 나는 남편과 20대 초반에 가끔씩 만나 친구 정도로 지내던 시절 어느날 그가 자기 학교 축제에 데리고 갈 파트너가 없다고 해서 내가 땜빵 파트너로 따라 갔던 적이 있었다. 그날 나는 남편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의 친구들과 분위기를 맞추려고 노력을 하고 있었다. 디스코도 잘 추지는 못했지만 많은 학생들 틈에서 일일 파트너로 참석을 했으니 되도록 흥을 깨지 않으려고 열심히 추는 척이라도 했다.

그런 와중에 남편과 초등학교부터 친구라는 등치가 큰 학생이 내 옆에 있던 남편을 잠시 불러서 어데론가 데리고 갔다 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별로 게의치 않았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나고 우리가 부부가 된 후에 남편은 그날 밤 축제에서 자기 친구가 자기를 불러 냈던 일을 나에게 이야기 해주었다.

그 친구는 조용한 구석으로 남편을 데리고 가서는 이리 물어 봤다는 것이었다. ~~야! 너 어디서 저런 조그만 닳아 빠진 망치 자루 같은 애를 데려왔냐?~~ 그 이야기를 뒤늦게 해 주는 남편이나 나는 크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후에 우리의 결혼식에 축하객으로 와서 결혼 사진의 중앙에 서서 의리의 친구 역활을 단단히 해주었다.

그래도 우리가 미국에 처음 이민을 와서 내 키가 작은 덕분에 직장을 얻은 적이 있었다. 남편이 낯선 땅에 짐을 푼 순간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직장을 찾는 일이었다. 그는 눈만 뜨면 신문에 난 구직면을 샅샅이 뒤지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찾아 간 곳이 세탁 공장이었다. 그날 우리가 찾아간 곳은 도시 외곽에 위치한 넓은 대지 위에 세워져 있는 큰 규모의 공장이었다. 나는 남편의 뒤에 앉아서 그의 면접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사무실 뒷편에 있는 공장쪽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며 어느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힐끗 우리 부부를 흝어 보더니 둘 중에 누가 일을 할 것인가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편은 자신이 일을 할 것이라고 대답을 했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우리들에게 ~~너희 둘을 다 쓸 수는 없고 너의 부인이라면 쓸 수 있겠는데~~ 하는 것이었다.

그의 생각지 못했던 제안에 우리는 좀 당황이 되었다. 하지만 둘 중 한명이라도 쓰겠다고 하니 둘 중에 누구라도 일을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우리 부부는 잠시 의논을 한 후에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는 오늘 공장 견학을 시켜 줄 것이니 남편에게 잠시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공장의 넓은 내부로 들어서니 그곳은 규모가 엄청난 세탁 공장이었다. 여기 저기에서는 알 수 없는 기계들이 시끄럽게 돌아가고 천장 위로는 레일을 타고 작업복들이 머리 위에서 움직이며 왔다 갔다 정신을 차릴 수도 없게 오르고 내리는 것이었다. 나는 이구석 저구석을 두리번 거리며 그의 뒤를 따라 갔다. 그가 나를 데리고 가서 멈춘 곳은 거대한 구루마에 작업복이 산같이 쌓인 작업 현장이었다.

그는 뒤에 어색하게 서있는 나에게 손짓을 하며 앞으로 와서 이곳에 서 보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그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 가서 섰다. 내가 그 지점에 가서 보니 천정의 레일이 돌아 가다가 빈 옷걸이가 내 눈 앞에 딱 멈추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가 구루마에 엉켜서 쌓여 있던 젖은 작업복을 집어서 물기를 한번 탁탁 털더니 눈앞의 옷걸이에 걸고 발밑에 있는 페달을 철컥 밟으니 옷걸이에 건 옷이 자동적으로 옆으로 돌아가며 또 다시 다른 빈 옷걸이가 눈 앞에 와 멈춰 서는 것이었다.

내가 할 일은 바로 그 단순 동작을 쉴새 없이 하는 것이었다. 기계 옆 윗쪽에는 내가 하는 작업량이 찰칵 찰칵 찍히고 있었다. 내가 서서 일을 하는 작업대의 높이는 딱 내 키여야만 가능했다. 만일 키가 큰 나의 남편이 이 일을 한다면 몸을 낮춰야 하니 능률이 오르기 어려워 보였다. 그 이유로 나의 작은 키를 보고 그가 쓰겠다고 한 것임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나는 그 주위를 한번 둘러 보았다. 나의 작업대 옆에는 어느 백인 아줌마가 똑같은 구조의 기계 틀에다가 바지만 거는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녀가 바지를 뒤집어서 털 때마다 가끔씩 그녀의 발 밑에 놓여진 깡통에서는 땡그랑 소리가 들리며 금속성의 물질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 소리가 무엇인지 몰라 궁굼한 마음에 그녀의 옆으로 닥아가 보았다. 그녀 옆에 가까이 서서 발 밑의 깡통을 들여다 보니 그 속에는 여러 모양의 동전들이 수북히 쌓여 있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온지 얼마 안된 나의 눈에는 모든 것들이 신기하게만 보였다. 그리고 그날 돌아오는 길에 하나님이 주신 나의 만족하지 못한 작은 키도 때로는 쓸모가 있을 때도 있다는 사실을 남편과 이야기 하면서 처음으로 작은 키를 의기 양양해 하며 큰 목소리로 떠들어 댔다.

그 공장 일을 하루 하루 열심히 출근을 해서 일을 하면서 그리도 웃읍게 생각 했던 단순 노동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나는 하루 종일 내 머리 위에서 작업량의 갯수를 세고 있는 짹각 소리 때문에 쉬지 않고 빨래를 걸고 누르고를 반복 해야만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 와서는 뚱뚱 부어 오른 다리의 통증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주 정도를 열심히 일하러 다니던 어느 날 막내 딸이 엄마와 처음으로 떨어져 불안을 느꼈던지 밤새 열이 펄펄 나며 아픈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직장에 전화를 하고 몇일을 일을 빠졌다. 나의 어렵사리 잡은 직장에 몇일 일을 못 나간 결과는 결국 직장에서 전화가 와서 이제 일을 그만 나오라는 답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나의 최초로 잡았던 이민사의 첫 직장은 불발의 미완성으로 끝나 버린 것이었다. 나의 작은 키가 쓰임 받을 직장은 또 어디에 있을지? 막막했다. 하지만 먼 훗날 뒤를 돌아보는 나에게 하나님이 나의 손을 잡고 이끌고 가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에는 작은 키와 불발로 끝난 인생의 미완성도 모두 쓸모가 있는 필요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