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에 관음죽 화분을 놓아두고 키워온지 어느새 십 년이 되었다.
지금은 촉이 많이 불고 가지가 퍼져 제법 볼품 있는 모습으로 잘 자라고 있지만
십년 전 처음 우리집에 올 때는 너무나 형편 없는 모습이었다.
거의 죽어가고 있었고 다 말라빠진 잎사귀 두어 개와 대꼬챙이처럼 누렇게 뜬 줄기 딱 두 개가
바싹 마른 흙속에 처박혀 있었다.
실은 어느집 대문 바깥에 다른 쓰레기들과 함께 버려져 있던 화분을 주워 온 것이다.
외출했다가 귀가 하던 중 그 관음죽 화분이 눈에 띄었고,
식물 키우는 것을 좋아하는 남편은 아직 죽지는 않은 것 같다며 쓰레기나 다름없는 그것을 주워들었다.

창가에 놓아두고 이따금 물을 주며 보살폈지만 다 죽어가는 그것이 살아날 가망성은 거의 희박해 보였다.
나는 남편에게 속으로 적잖이 핀잔을 주곤했다. 도무지 살아날 것 같지도 않았고 보기도 좋지 않았다.
실은 그 비참한 모습을 보는 것이 당시 나이 오십이 되어 별로 이루어 놓은 것도 없이 인생의 내리막길로 치닫는 볼품없는 내 꼬락서니와 비슷하게 여겨져 자꾸 우울해지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대꼬챙이처럼 바싹 마른 줄기에 작고 푸른 점 같은 것이 조그맣게 달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 죽은 줄 알았던 줄기에서 새순이 나오고 있는 터였다.
어느새 나도 몰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고 나는 남편을 불러 관음죽에 새순이 돋아 나오고 있음을 기쁜 마음으로 알렸다.
그렇게하여 죽어버리고 말 것이라고 여겨졌던 그 관음죽과 나와의 특별한 인연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앞서 말한 바 있지만 그 무렵 나는 약간의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우울증의 이유는 스스로 내 삶이 남보다 별로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를 내리게 된데서 기인했다.
나이 오십이라니! 솔직히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처절한 심정으로 그동안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는 동안 남보다 무엇이든 잘 해서 앞서 보려고 무지 애를 쓰며 노력하는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했지만 실은 남보다 잘난 것도 없고 내어 보일 그 어떤 일도 이루어낸 것이 없었다.
교회에 다니며 신앙생활도 남보다 잘해보려고 열심도 내어보곤 했지만 그조차도  진정한 의미에서 결코 만족스럽지가 않다.

아무리 따져보아도 내 인생은 만족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딸 많은 집 셋째 딸로 태어난 것부터가 실패였다는 생각에서, 부유한 가정에 태어나지 못해 하고 싶은 공부를 맘껏 다 하지 못한 것도 불만이었고, 그래서 어려서부터 이루고 싶어했던 꿈을 이루는 일도 좌절된 것이고, 늘 목이 아파 그나마 적성에 맞는 선생 노릇도 일찍 끝내게 되었으니 내 뜻과는 상관없이 ‘나의 인생’이 제 멋대로 수레바퀴를 돌려서 내가 원하지 않는 지금의 지점에 와 있게 된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자꾸만 빠져 들었다.
아무리 돌아보고 또 돌아봐도 내 인생은  애초 내가 바라고 원했던 것과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있었다.  


그러한 우울함 속에서 나는 이제라도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서 보다 업그레이드된 ‘나’로 탈바꿈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 돌파구가 ‘견문을 넓히는 것’이었다.
나는 여름이 되자 어렵게 남편의 허락을 얻어 해외여행을 떠났다.
딸아이가 고 3으로 대입 준비 중에 있었지만 눈 딱 감고 16일간 중국을 여행했다. 그리고는 다음해에는 미국을,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신약 성서에 지명이 많이 나오는 나라 터키, 그리고.....

그러나 매해 여름마다 해외여행을 하고 와도 내 마음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뭔가 채워져 공허감이 사라져버렸을 줄 알았던 내면은 여전히 흔들거렸고 불안스러웠고 불충분하였다.
결국 아무 연고자도 없는 캐나다를 한 달간 홀로 떠돌아 다녀보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이게 아니다. 참된 안목이 없이 허황된 눈으로 아무리 밖에서 무얼 얻으려 해도 얻을 것은 없다.”  2000년이었던가? 그 해 여름, 나는 이러한 결론을 내리며 외부로의 긴 방황을 끝냈다.

  집에 돌아와보니 그동안 제법 무성해졌던 관음죽이 내가 한 달간 집을 비운 사이에 누렇게 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측은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정성껏 마른 잎사귀들을 가위로 잘라 주었다.
듬뿍 물을 주고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말을 했다. 물론 관음죽이 알아들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지만 마음만이라도 전해주고 싶은 뜻은 있었다.

그리고 다시 여름이 왔을 때 나는 모 신문사 문화센터를 인터넷으로 검색하던 중 ‘나를 찾아가는 3박 4일간의 명상캠프’라는 제목의 안내문을 보게 되었다. 그때 나는 내가 찾는 것이 바로 이거다 하는 확신이 섰다.

  해외로 떠도는 여행에 종지부를 찍고 계룡산에 있는 수련장에 와서 내면 여행에 몰입하게 된 나는 처음에는 혹시나 사이비 종교단체의 미혹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여 적이 경계하는 마음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지도하시는 분들의 말씀을 듣던 중 그런 경계가 아무 소용없음을 깨닫고 마음을 열고 편히 수련에 임하게 되었다.

  3박 4일은 짧았지만 나는 명상 도중 어느 순간에 그리도 부질없던 내 마음을 다 내어 놓고 하느님께 맡길 수 있었다.
내 평생 그렇게 잘 믿고 의지하고 싶었던 그분이었지만 단 한 번도 진정으로 믿고 의지하지 못했던 하느님, 바로 그 분께 그 순간에 이르러서는 내 마음을 모두 맡길 수 있었다.

  그러자 나의 내면은 너무나 행복하고 편안하고 고요해졌다.
그때의 심경을 말로 다 표현키 어렵지만 아무튼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었고 더 채워야 할 부족함도 없었고 불안해할 그 무엇도 없는 상태였다.
그 후 산으로 오르는 산책길에서 나는 마치 몸이 없어진 것 같은 묘한 느낌으로,
그러나 분명히 몸을 가지고 산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는 나를 느꼈다.
만나는 풀과 나무들이 예전의 풀과 나무들 같지 않았고 마치 사람과 똑같은 인격을 가진 존재로 보여졌다.
나는 마음으로 풀과 나무들에게 인사를 하며 마치 공기가 된 듯이 한없이 자유로워진 상태로 숲길을 헤엄쳐 다녔다.

명상수련에 참여하여 그렇게 행복한 체험을 하고 돌아와서는 홀로 있을 때면 곧잘 명상에 들곤 했다.
수련할 때 강사님께서 들려주셨던 자연음악의 음반을 구입하여 명상을 시작할 때 틀어놓곤 했다.

  그렇게 명상에 잠겨 있던 어느날이었다. 나는 흙처럼 누워서 그날도 나 자신을 하늘에 맡기고 있었다. 나는 속이 텅 빈 토관처럼 누워서 그저 하늘의 숨결에 나를 맡기고 있었다.

  그때였다. 문득 누군가가 내게 말을 하고 있었다.

  “노래를 불러보세요.”

  나는 누가 말을 하는지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노래를 따라서 불러보세요.”

  눈을 감은 상태였지만 나는 그 말을 하는 주체가 창가에 놓여있는 관음죽이라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미미하게 전류가 흘러오는 듯한 그런 감각이었는데 분명하게도 관음죽이 있는 방향으로 느껴졌다.

  “내가 저 노래를 어떻게 따라 부를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관음죽의 요청에 이렇게 자문을 하고 있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어려서부터 상습적으로 목이 잘 쉬고 아파서 노래를 부르는 일이 힘들었다.
아니, 부끄러운 말이지만 내가 노래를 부르면 듣는 사람들이 괴로워해서 부를 수가 없었다.
부르는 나도 목이 너무나 아파서 노래 부르는 것이 고역이었다.
그러니 노래와 나는 사이가 좋지않은 친구였다. 학창 시절에는 가창 시험 보는 날이 가장 치욕스럽고 지옥 같았던 나였다.
그런 나에게 엉뚱하게도 노래를 부르라는 것이었다.

  “속이 빈 흙피리처럼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그냥 불러보세요.”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라는 말에 나는 움찔하였다.

  “그렇지만 아오키유코처럼 저렇게 맑고 고운 고음을 내가 어떻게 낸단 말이냐?”

  나는 관음죽의 요청에 대한 대답이라기보다는 나 스스로에게 자문을 하고 있었다.  

  “걱정말아요. 우리가 도와주겠어요.”

  이번에는 관음죽뿐만이 아니라 관음죽 옆에 있던 다른 화분의 식물들이 합세를 하고 나를 부추기고 있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식물들의 응원을 힘입어 일어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속이 빈 흙피리가 되어, 우주에 붕 떠 있는 하나의 속 빈 피리가 되어 온전히 나를  우주에 맡기고 의지했다.
소리가 내 온몸을 진동하며 울려나오기 시작했다.
평소에 듣던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와 관음죽은 어떤 전류와도 같은 파동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듯했다.
그런 상태로 나는 그렇게 한동안 머물렀다.
거기에는 나는 없고 ‘소리’만 있었다.  

식물과 인간이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동화에나 나오는 일로 알고 살아왔던 나였다.
그러나 이러한 체험을 하고 난 후 식물이나 동물이나 또는 사물을 보는 내 의식은 인간의 역사를 BC 와 AD로 구분하는 것 만큼이나 확연한 구분을 짓게 되었다.

관음죽의 도움으로 그 후 나는 이제 노래를 부르는 데 큰 걸림돌이 없어졌다.
발성을 하는데 옛날처럼 목이 쓰리고 아프지 않으며 소리를 내는데 심리적인 부담감도 없어졌다는 이야기이다.

가제오 메그르라는 일본 소녀가 자연계에서 듣고 전곡했다는 자연음악. 그 음악을 부른 아오키 유코의 노래를 곧잘 따라 부를 수 있게까지 되었으니 예전의 내 꼬락서니를 알고 있는 우리 가족들이 최근의 나를 보고 놀라워하는 게 무리가 아니다.

재작년 여름에는 뜻밖에도 관음죽이 꽃을 피웠다.
관음죽과 인연을 맺은지 수년이 지났지만 관음죽이 꽃을 피울 거란 생각은 해보지 못했던 터였다
. 아직 어느곳에서도 관음죽의 꽃을 본 적이 없었기에 은연 중에 관음죽은 그저 잎만 보는 식물로만 여겼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어느날 보니 관음죽 잎새 사이에 무슨 누런 닭발 같은 것이 걸려 있는 것이었다.
저게 뭘까?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보니 바로 그게 꽃이었다.
나는 좀 우스웠다.
이름이 관음죽이니 만큼 이왕이면 꽃도 뭐좀 그럴싸한 꽃을 피울 것이지 닭발처럼 못생긴 꽃을 피우다니....
웃으면서 관음죽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관음죽은 아주 당당했다.

  '뭐가 잘 생긴 것인가? 잘 생기고 못 생긴 너의 기준이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가? 그리고 잘 생겼다고 우쭐할 것은 무엇이며 못생겼다고  부끄러워할 것은 무엇인가?'

  나는 고요히 관음죽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인간의 편견에 대한 관음죽의 냉철한 가르침에 나는 숙연해졌다.
그리고 모든 사물이 내 스승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관음죽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나는 실패한 인생이라고 자책하며 습관처럼 늘 남과 나를 비교하며 살아온 내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알게 되었다.
도대체 실패한 인생이란 무엇이며 성공한 인생이란 무엇인가?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생각은 무엇이며 남에게 뭔가를 내 보여야할 필요는  또 무엇인가?  

나의 내부에 암반처럼 자리했던 어떤 기준들이 서서히 녹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