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나의 남편은 목사가 된 후에 가정에서 나와 대화 중에 아이들과 경제적으로 어려운 벽에 부딪힐 때면 가끔씩 혼자 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이 있다. ~~하나님 일을 제대로 하려면 신부가 되어야 진짜 헌신을 할수 있을꺼야~~ 라고 한숨 속에 속내를 보이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목사의 내조자로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교회안의 분란이나 교인들의 몰상식한 행동으로 속을 썩는 일도 한 부분이지만 그 중에서도 어린 자식들의 뒷 바라지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직면한 현실이 목회의 제일 큰 걸림돌이었다.
아이들이 고등학교까지는 미국의 의무교육이 잘 지켜지고 있으니 그런대로 대강 대강 키울 수가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실력 대로 택하는 대학부터는 아이의 실력과 부모의 경제적인 뒷받침이 없어서는 안되는 현실이었다.
교회측에서 목회자의 모든 생활을 책임을 져 줄 수 있는 사정이라면 걱정 할 일이 없겠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그들은 목사인 남편만의 급료를 책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 딸려 오는 부인인 사모에게도 직장도 갖을 수 없고 두사람 모두 교회에 헌신해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철칙같은 그물을 쳐 놓는 것이었다.
나는 목회 경험도 없던 그때 당시에 그들의 말대로 남편 뒤에서 문제가 안되기 위해 숨 죽이며 가정은 뒤로 한채 열심히 목회에 동참을 했다. 아침에 교회일을 위해 집을 나설 때에는 늘 아이들이 언제든 와서 먹을수 있도록 큰 냄비에 국을 한솥 끓여 놓고 밥솥을 채워놓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부모가 없는 텅빈 집에서 밥과 국을 찾아 제대로 챙겨 먹을리 없었다. 가끔씩 우리가 없는 집에 교인들이 전화를 하면 아이들에게 늘 ~~밥은 먹었냐?~~ 하고 묻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우리아이들의 답은 ~~너구리 먹었어요.~~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쩌다 내가 모처럼 집에 머물며 특별한 음식을 준비하는 날에는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나에게 아이들은 조용히 나의 뒤로 다가와 묻는 것이었다. ~~엄마 오늘 집에 교인들 오지?~~ 라고. 그 당시에는 나의 머리속에는 온통 교회일 뿐이라서 내 등뒤에서 묻고 서 있는 아이의 마음속에 받을 상처는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훗날 아이들과 우리 가정사의 옛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을 때 아이들의 맘속에 그 당시의 엄마의 무관심이 작은 상처가 되어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는 아이들에게 부족한 엄마로서의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우리 부부의 대충대충 키우는 무관심 속에서도 우리 쌍둥이 딸들은 학교에서 뛰어난 학생으로 생활을 했다. 두 딸은 전교에서 꼭 일등과 이등으로 둘이 서로 경쟁을 하는 것이었다. 졸업도 둘째가 일등을 하는 바람에 첫째가 발레딕토리안을 못했다. 그리고 대학도 둘이 모두 하버드 대학에 입학원서를 냈는데 둘째가 들어가고 첫째는 듀크 대학에 입학이 되었다. 만일 둘이 쌍둥이가 아니었다면 첫째의 진로가 좀 더 그 애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교회일에 묻혀서 대강 기른 결과 치고는 하나님께 눈물로 감사 드릴만큼 놀라운 열매였다.
그 당시 시골 동네에서 쌍둥이 자매가 모두 명문을 들어갔으니 신문이나 TV 에서는 신문의 첫째 페이지를 우리 식구 사진으로 장식을 하고 텔레비젼에서는 저녁 뉴스에 나오고 해서 우리 가족은 갑자기 동네의 유명 인사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런 기쁨도 잠시 스쳐 지나가고 우리 앞에는 두 딸의 뒷 바라지가 큰 근심이 되어 묵직한 돌덩어리를 가슴에 얹어 놓은 답답함으로 닥아왔다. 다행히도 두 아이가 모두 가정이 어려운 관계로 장학금을 받았다. 학비는 한학기에 몇 천불만 부모가 감당하면 기숙사비까지 해결이 되었다. 그래도 아이들의 한달 쓸 용돈과 집에오는 비행기 값 등 소소하게 드는 비용이 우리의 몫이라 우리의 가난한 살림으로는 벅찬 뒷 바라지였다.
우선 학기 초에 필요한 컴프터 2대와 기숙사에 필요한 살림들은 크레딧 카드를 긁어가며 준비를 해 주었다. 그러나 학기중에 급히 아이들이 원하는 시기에 돈을 붙여 주려면 어디에서도 구해볼 방도가 없었다. 정말 피가 바짝바짝 마를 일이었다. 어려운 일을 의논할 상대는 하나님 한분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믿고 태연해 있을 큰 믿음도 아니니 이 궁리 저 궁리 아이들의 필요한 돈을 만들 궁리를 열심히 해 보는 것이었다. 내가 갖고 있던 패물중에 값이 나가는 순금 팔찌는 같은 이웃인 우리 교회와 상관없는 이웃 아줌마에게 창피한 마음에 몇날 몇일을 고민하다가 제 값도 못 받고 넘겼다.
그리고 내가 끼고 있던 작은 알의 다이아 반지를 들고 주인이 유태인인 보석상을 찾아간 적도 있었다. 그 보석상 앞에 가서 몇일을 들어갈 용기를 못내고 서성이다가 드디어 어느날 크게 숨을 들이 쉬고는 문을 조용히 밀고 들어 섰다. 번쩍번쩍 화려한 유리 진열장 안쪽에서 화려한 색조의 화장을 한 금발의 생 머리를 길게 내린 점원 아가씨가 아주 상냥하게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내게 무엇을 찾고 있느냐고 말을 건네 왔다.
나는 두근두근 쿵쾅 쿵쾅 뛰는 가슴을 이기지 못하고 죄를 지은 사람인양 애를 써서 표정을 자연스럽게 보이려 신경을 곤두 세웠지만 실제로는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몰꼴이었을지 스스로 상상이 되었다. 그래도 힘들게 들어 섰으니 끝을 봐야 하지 않겠냐고 속으로 창피한 맘을 달래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 가서 손에 꼭 쥐고 왔던 초라한 반지를 내 보였다. 그녀는 나의 의도를 벌써 알고 있는지 내가 내민 반지는 집어 보지도 않고 ~~ 미안해요, 우리는 큰 알만 취급을 하지 조그만 알은 취급하지 않아요!~~ 라고 단호히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알았어요.~~ 라는 말을 남기고는 급히 그곳을 빠져 나왔다.
당장 보스톤의 둘째 딸에게 200불을 붙여 주어야 그애가 비행기 표를 사서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 올 수가 있었다. 정말 앞이 캄캄해 왔다.
우리 둘째는 하바드 대학에 들어가서도 스스로 돈을 벌어 우리의 부담을 줄여 주겠다고 안해 본 일이 없는 아이였다. 그 애가 살고 있는 기숙사 건물의 청소를 우리 애가 맡아 청소를 했는데 한 공간에는 방 네개와 리빙룸이 따로 있어서 네명씩 기숙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공간마다 샤워장은 공동으로 쓰고 있었는데 학생들이 바쁜 학기중에 엉망으로 어지르며 쓰고 나간 후에는 머리 카락이 한 주먹씩 나온다고 했다. 그런 일을 하려면 비위가 상하련만 그애는 열심히 일하며 공부했다.
나중에는 하바드 대학의 건물 청소 매니저 할아버지의 마음에 쏙 들어 하버드 대학에서 40년을 넘게 일해온 그 할아버지는 자신의 친 손녀같이 우리 딸을 졸업하는 순간까지 사랑하며 돌봐주었다.
후에 우리 부부가 방학 중에 그곳을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그 할아버지는 우리를 특별히 대우해 주셔서 그 기숙사에 머물수 있게 해주셨다. (어느 학생의 부모도 기숙사에서는 잘 수가 없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타고간 차를 파킹할 특별 공간까지도 할아버지가 마련을 해 주었다. 하바드 대학 교정내에 장기간 파킹을 한다는 일은 허가 없이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정 관련자의 허가를 얻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둘째 딸은 학교가 방학을 해서 아이들이 모두 떠나고 나면 우리 딸에게는 남이 생각하지 못하는 보너스의 기회가 온다고 했다.
하바드 대학의 학생들 부류는 두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 엄청난 부자이거나 아니면 아주 가난하거나였다. 중간층이라면 장학금 혜택 같은 것은 꿈도 꿀 수가 없고 학비가 비싸니 결국은 다른 학교를 선택하게 되고, 또한 대학에 기부금을 많이 내놓는 사람이나 동문의 자녀에 대해 입학의 우선권을 주니 가난한 아이들은 더욱 가난해 보일 수 밖에 없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아이들이 장학금으로 들어 갔다고 해도 학기마다 상위권에 드는 학점을 유지 해야만 학비의 보조가 지속이 되었다. 그러니 우리 둘째의 하바드 학창 시절은 처절한 자신과의 투쟁이었을 것이다.
우리 애는 아이들이 모두 방학이라 집으로 돌아간 빈 기숙사에서 학생들이 기숙사 방문 앞마다 내놓고 간 지난 학기의 서적들과 쓸만한 물건들을 청소를 하며 모두 거둬 들였다. 그애는 그 물건들을 세를 낸 창고에 쌓아 두었다가 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 갔을 때 인터넷을 통해 학생들에게 되 팔았다. 생활이 풍족한 아이들이 쓰레기로 버리고 간 물건들은 우리 애에게는 정말 필요한 도움이 되어 돌아왔다.
아이가 너무 안스럽고 처절하게 살아가는 현실에서 집에 돌아오는 비행기 값을 해주는 것은 작고 보잘 것 없는 엄마의 자존심의 표현이었다.
그 당시 우리 교회에서는 부흥회가 한창 뜨겁게 열리고 있었다. 한국의 대형교회에서 부흥회를 위해 강사님이 오셨는데 집회가 하루 남기고 막바지에 있었다. 가끔씩 부흥회를 치루고 난 후에는 교회에서 강사 목사님에게 사례비를 드릴 때 담임 목사에게도 수고했다며 200불을 주었었다. 남편과 나는 가끔씩 그래왔으니 이번에도 수고했다고 200불을 받으면 둘째에게 비행기 값을 보내 주리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집회를 하루 남긴 토요일 오전 동네의 샤핑몰이 문을 여는 시간인 아침 10시 쯤 교회 여선교회 회장인 집사와 나, 그리고 남편과 부흥회 강사님이 같이 교회 여성회에서 강사님에게 드리는 선물을 고르기 위해 샤핑센터로 갔다. 우리 모두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몇대 안되는 차가 세워져 있는 파킹랏에 차를 세우고 맨 앞에 강사님이 걸어 가시고 그 뒤로 집사님과 내가 따라 가고 맨 뒤에 남편이 뒤따라 왔다.
그런데 맨 뒤에서 우리들 뒤를 따라 오고 있던 남편이 나에게 다가와 빳빳한 백불짜리 두장을 눈앞에 보이는 것이었다. 사람이 만진 흔적이 전혀 없는 새 돈 두장이 한장 같이 딱 붙어 있었다. 남편은 그 돈을 나에게 보이며 자기 발밑에서 주웠다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남편은 1전짜리 동전 하나 줏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 말을 듣고 눌라움에 주위를 둘러보니 파킹랏에는 한적하니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보이지를 않았다.
그래서 일단은 넓은 매장안으로 들어가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 가게 안에는 우리들이 첫 손님인듯 서성이는 사람들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윗층의 고객 서비스로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그곳의 직원에게 파킹랏에서 잃어버린 것이 있는 사람은 연락 바란다고 방송을 해 달라고 했다. 그동안 우리들은 샤핑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모든 일을 마치고 이층으로 올라가니 직원이 우리에게 신고가 들어 오면 연락을 해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집으로 돌아 왔다.
그 다음날 저녁에 집회가 끝나면서 부흥사에게 사례비와 선물을 전달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담임목사에게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맙소사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오직 남편의 눈에만 띄게 사람이 만진 자국도 없는 미스테리의 200불을 땅바닥에 납작 붙여 놓으셨던 것이란 말인가?
그날 쇼핑몰 파킹랏에서 앞서 가는 우리들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를 않았음이 신기했다. 평소에 2백불을 줏었다면 그것은 이리 크게 놀라는 사건은 아니었을 것이다. 부흥회 기간 동안 나의 머리 속은 온통 200불의 근심으로 도배를 하고 있었다. 도대체 그 이백불이 어디서 날라와 떨어 졌길래 누가 만진 흔적도 없이 바람에 날라가지도 않고 오직 남편의 눈에만 띄었는지 아무리 생각을 해도 해답이 나오지를 않았다.
그날 뒷자석에 앉아 있던 나의 눈에서는 그 누구도 의미를 모르는 눈물이 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아 나의 아버지, 주님은 우리 부부의 대화 속에 함께 계셨군요!~~ 그날 내 심령 속에는 은혜의 강이 봇물처럼 터져 흘러 내렸다. 그리고 그 후에도 그 돈을 찾는 전화는 없었다.
그날 저녁 보스톤에서 둘째가 집으로 전화를 했다. 그 애는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오늘 학교에서 학기말 시험이 끝났는데 생각 만큼 시험을 못 보고 주머니에 돈도 없고 마음이 너무 쓸쓸해서 울면서 켐퍼스를 걸어 나오는데 길 바닥에서 20불 짜리를 주웠어. 그래서 너무 신기해서 슬픈 것도 잊어 버리고 친한 기숙사 친구와 둘이 나가서 그 돈으로 저녁을 사서 먹었어. 우리 둘은 주운 20불로 너무 행복한 시간을 가졌어.~~ 라며 그 당시 상황을 떠 올리며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둘째 딸에게 우리도 200불을 주워서 너에게 보낼거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우리 모녀의 대화 속에 하나님이 빙그레 웃으시며 내려다 보시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어느 누구도 이해 할 수 없는 하나님과 우리 가족의 비밀스런 교제는 늘 계속 되고 있었다. 둘째 딸은 공부와 생존과 싸우면서도 아주 밝고 꿋꿋하게 이겨나 갔다.
하바드의 학생들간의 경쟁은 얼마나 살벌한지 그 애들은 시험 기간에는 시간을 벌기위해 모두 샤워들도 안하고 머리는 떡이 진 채로 책과 씨름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교수가 교재를 도서관에 갖다 놓고 학생들에게 가져다 보라고 하면 재 빠르게 먼저 뛰어 가서 집어 오지 않으면 순식간에 누군가가 치워 버려서 구할 수도 없다고 했다. 시험 기간에 받는 중압감에 못이겨 일년에 한 두 건씩은 기숙사 방에서 뛰어 내리거나 미치거나 하는 가슴 아픈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시험이 끝나는 날에는 많은 수의 학생들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나체가 된채 교정에서 미친 사람들 처럼 날뛰다 들어 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위험 수위의 도발적인 행동들이 겁나서 늘 아이에게 말을 했다. 만일 공부를 따라 가기 힘들거나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는 언제든지 엄마에게 얘기 해달라고 말을 해야만 했다. 그런 각박한 생활고 중에도 둘째 딸은 4년을 마치고 졸업하는 날 마그나 쿰라우덴이라는 최우수 상장을 받고 자랑스런 기쁨을 우리 부부에게 안겨 주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렸다.
나의 하나님과의 동행하는 삶속에 200불과 20불의 작은 사건은 평생 잊을 수 없는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작은 위로의 간증으로 영원히 남겨져 기억이 될 것이다. 지난 세월을 뒤 돌아 볼 때 우리 식구가 궁핍함 중에 받은 불편함과 좌절보다는 하나님의 오묘한 은총의 손길이 그 중간 중간 아름답고 시원한 생수가 되어 내 목마름을 채워 주고 계셨다. 할렐루야! 아멘!
옥인이가 외진곳에 있는 종교란까지 방문을 해주고~~~
요즘 9기 모두가 옥인이 땜에 살 맛이 난단다.
서로 멀리 살아가고 있지만 이곳에서 만나는 너는
늘 곁에 있는 느낌이 든다~~~
뒤에서 너의 비엔나 소식을 기다리는 우리들을 위해
사랑을 부어줄거지?
옥인이가 나를 대신해 ~~하나님께 감사드리요~~라는 말이
가슴에 찡하게 전해져 오는구나. 고맙다 칭구야
어제 오후에 우리 동기 전성숙이 이글을 읽고 휴스톤에서
전화를 해주어서 졸업후 첨으로 오랜 이야기를 나누었단다.
은열아~
나 그동안 너의 글들 모두 읽으면서 너의 꾸밈없는 표현에 얼마나 박수를 쳤는지 모르지?
친정 식구중에 목회자 가족이 많어서 너의 형편 이해해...
그리고 너의 진솔한 글을 대하면 너의 용기가 부럽단다.
나는 너처럼 공개되는 글에는 시원하게 쓰기가 어렵거든 ㅠㅠ
전성숙이가 나에게도 전화했었어.
성숙이의 기억력에 감명받었었어
같은 미국에 사니까 성숙이와 종종 연락해봐,,, 너보다 나중에 미국에 갔으니까 너 도움이 필요할지도,,,
오랫만에 전화로 만났는데도 성숙이의 청순함이 찐하게 전해왔단다.
전화 통화한날, 하루종일 옛날일 회상하면서
한동안 성숙이의 기억속에 아직까지 생생한 우리 친정식구 돌아가신 분들이 떠올랐단다.
살다보니 이렇게 여러친구들과 연락도 되고 감개무량이다라는 말이 정말로 실감이 난다.
은열아 건강하고 앞으로도 생생한 너의 체험담 기대할께
부군되시는 목사님과 너의 가족 평강을 기원한다
어머나~~옥인아
지금 너와 내가 같은 시간에 컴 앞에 있는거니? ㅎㅎㅎ
지금 이곳은 오후 5시 43분이란다.
내가 글을 쓰게된 동기는~~ 이민 ~~목회하는 많은 목회자들이
표현은 못해도 나의 모습에서 공감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해서
나의 있는 그대로 써보는것이란다.
이미 하나님앞에서 발가 벗기어 회개하고 거듭난 인생인데~~
감추고 가릴것이 뭐가 있겠나 생각했단다.
그냥 매일 매일 회개를 거듭하고 있는 내 자신이거늘~~
옥인아~~~사랑한다~~
차은열 선배님의 어려움 중에도 밝은 글,
댓글을 달고 싶은 마음을 일게 하시네요.
말씀대로, 감출 것이 뭐 있겠냐 하시지만
그런 것이 저는 아주 힘들답니다.
아직도 기도가 많이 모자랍니다.
선배님 글을 읽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올립니다.
안광희후배님~~ 반갑습니다.
저의 부족한 글이 실례가 되는것은 아니었는지?
사실 교인들 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를 올리려니
좀 망설이기는 햇지요~~~~
하지만 나에게는 귀한 간증들이기에 좀 내놓기 힘든 부분도
용기 내어 썼답니다.
귀한 댓글 너무 기쁨니다~~~
은열사모의 글은 언제나 깊은 감동으로 다가오지요.
하나님 일을 제대로 하려면 신부가 되어야 진짜 헌신 할 수 있다는 말씀에,
글쎄요, 신부님은 이러지 않으실까요?
하느님 사업을 하려면 헌신적인 차은열 사모같은 내조자가 옆에 있으면 얼마나 힘이 될까? ㅎㅎ
훌륭하게 사시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글이 길면 저는 보통 대각선으로 휘익 보곤합니다.
오늘은 시간을 내 한줄 한줄 읽어내려가면서
제 부족한 글로는 표한 할 수없는 뜨거운 그 무엇이 있군요.
종교게시판을 따로 독립하여 만들길 정말 잘했다 생각합니다.
국회방송에서
워싱튼DC의 세탁소 이민자를 방영한 것을 보았지요.
바지 문제로 고소를 당해 억울한 경우를 취재한거였는데
부부가 참으로 선하고 순박하게 생겼더군요.
3개나 되던 세탁소가 그 사건 후 변호사 비용대느라 수입이 줄어들어
1개밖에 남지 않았던 어려운 시기를 지나
지금은 법원에서 승소했다하네요
선배님이 더 잘알고 계실거예요.
자식을 위해 이민을 떠나 어려운 이민생활의 한 예이겠지요.
자식에게 뭔가 제 때 해주지 못할 때 부모의 심정을 어찌 말로 표현하겠어요.
선배님의 자식사랑에 대한 구구절절한 심정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2남 1녀 키우며 저도 사연이 참 많았거든요.
손녀 사진 올리셨던거 기억나요, 잘 크죠?
전영희후배님에겐 특별히 감사를 해야 할것 같애요.
종교란을 별도로 만드는데 큰 힘이 되어 주셨으리라 생각이 되네요.
내 조국에 깊게 물 줄기를 찾아 내리고 있던 뿌리를 파내어
삭막한 토질에 욺겨 심긴 이민자들이 겪는 서럽고 아픈 일들이
어디 몇 사람의 이야기 겠어요?
하지만 이곳에 살고있는 일세대 한사람 한사람을 보면 참 대단하죠.
그리고 기회가 되면 전 싸부님의 자식키우던 이야기 듣고 싶어요.
우리 4번쨰 손녀딸 (하바드 시계탑) 유치원 잘 다니고 있지요.
고마와요~~~~~
차은열선배님, 종교란을 만들게 된 사연은 댓글로 쓰기엔 복잡한 사연이 있어요.
당시에 몹시 머리가 아팠으나 지금은 이렇게 자리를 잡아
동문들에게 마음의 위로가 되는 좋은 글들이 자리하게 되어 기쁘기 그지 없답니다.
동창회 홈피 중에 종교란이 있는 곳을 아직까지 보지 못했어요.
선배님께서 제 아이들 키울 때 이야기들 말씀하셨는데요 ㅎ
제가 초반에는 엄청 글을 썼더랬어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많이 썼었지만
요즘은 머릿 속에 다른 생각들도 꽉차있어서인지
댓글 한 줄 쓰려해도 잘 생각이 안날때가 많아요.
다른 선배님들 손주 사진 올라오면
한없이 부러워하기만 하죠
차 선배님!
어쩌면 읽기에 좀 길다..싶은 글을 올리시지만
읽어내려가면서 내 마음 속에 잔잔한 감흥을 일게하시는
간증은 요즘 말로 '짱'이에요.
좋은 글 또 기다릴께요.
비엔나옥인선배님의 사진을 처음 뵈었을때 기쁨이 넘치는 표정을
읽었었는데.. 역시 목회자를 많이 배출한 가정이셨군요.
옥인선배님~ 사랑해요.
유옥순선배님~~전영희싸부님~~권칠화권사님~
장문의 글을 읽어내느라~~ 목은 안 아프신가요?
죄송하옵니다~~ 꾸~벅
유옥순 선배님 덕에 제가 남편에게 큰 소리좀 쳐도 될까요?
모두들 너무 너무 힘이 됩니다. 알라봉
그 당시의 신문 기사를 올려봅니다.
저의 남편은 그 당시 이곳 주의 검찰총장으로부터
장한 아버지 상을 받고 하원의원의 축하편지까지 받았지요.
몇년 후에는 막내딸이 MIT를 빌게이츠 장학금으로 4년 학비 면제받아
전공을 엔지니어링과 바이올로지 두개를 하고 졸업을 해서
또 한번 유명세를 타고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했답니다.
은열 !!!!
열심히 살아가는 사모의 글이 항상 나를 감동시켜 눈물 나게 한단다..
주님 이외에 아무도 모르는 그 사건... 그 은혜.. 그 은총.... 커다란 보석이구나.
유명세를 타고도 남는 네 가족의 행복한 신문도 보여주어 고마워. 참 대견하고 예쁘다.
혹시나 네 글이 있으려나 들어왔더니 ...
정말로 귀한 선물을 받았단다.
항상, 건강하게 잘~~ 지내기를 바라고, 언제 쯤엔 만나면 꼭~~~ 안아줄께. 보고싶단다.
맞아요~~난간에 앉은 왼쪽이 둘째고 오른쪽이 첮째랍니다.
저에게 헌신적인 사모라는 표현이 좀 창피해 지네요~~
아직도 장난꾸러기 막내 기질이 사모의 분위기와는 ~~여엉~~
난준이가 바쁜중에 나를 만나러 오다니? 너무 반갑다.
나의 좀 쑥스러운 이야기들을 사랑해주니 땡큐!
난준이의 학업에대한 열정은 하버드의 학생들 못지 않았지?
나의 기억속의 너는 정말 무섭게 공부하는 친구였다.
그때 왜? 나는 너를 본 받지 않았었는지? 창피할 뿐이란다.
지금의 난준이가 자랑스런 교수로 네가 수고하고 땀흘린 열매로
교단에 존경받으며 우뚝 서 있으니 너무 자랑스럽단다.
우리도 언젠가 만나 군산엘 가 볼일이 있으려나?
늘 건강하고 평안하길 기도할께~~~~
아이구... 은열 사모님. 오히려 내가 부꾸럽사와요.
" 사모" 역할이 얼마나 어려울 터인데..... 슬기로운 여성이여~~
정말 네 말대로 주님이 미리 알아서 사모의 주변을 돌보아 주시는가 보다.
주님의 " 빽 " 이 어지간하게 큰것 같아서 부럽단다.
은열, 우리도 60 회갑 때 아마 미국에 가겠지?
그러니, 니도 언제 쯤 ~ 한국에 와 봐야지 ?
거기에 " 군산"도 넣어두면 미리 프로그램 짤께. 알았지?
항상 건강하도록 노력하구. 여기서 라도 자주 만나자. 알라봉? ! ㅎㅎㅎ
수노언니~~ 감사합니다.
늘 조용히 살포시 찾아와 기쁨을 주시네요.
은범이의 일기는 실감나게 잘 읽고 있지요.
수노언니가 할머니인 은범이는 복이 많다는 생각을 했지요.
언니의 여행기와 은범이 이야기등 제가 왕 팬이랍니다.
예수님과 그냥 매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종교'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게 생경해서 이곳에 거의 안 들렀는데, 어쩌다 읽기 시작한 선배님의 구수한 간증에 요새는 푹~ 빠져있는 후배입니다. 남태평양 피지에서 선교의 한 끝자락을 거들며 행복하게 살아온 세월이 벌써 이십년 됐구요. 이 촌구석에서 고3을 마친 딸아이가 이대를 거쳐 내년 5월이면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하는데, 선배님 글을 읽어보니 아이한테 좀 미안하더군요. 대학 들어갈 때 입학금 한 번 내준 이후로 지금까지 도와준 게 아무 것도 없는데 애가 노상 여유를 부리길래 그 아이의 고생을 내가 너무 몰라주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또! 제가 7년 전에 입양을 해서 지금 만10살짜리 아들 쌍둥이가 있거든요. 저도 쌍둥이 엄마랍니다. ^^ 암튼, 하나님께서도 웃으시고 우리도 함께 웃는 감동의 간증, 속편을 기대합니다!
류정옥 후배님~~안녕하세요?
12기에 유정옥 사모님과는 동명2인 이신가요? 아님 같은 분?
남 태평양 피지섬에서 이십년을 목회를 하셨다면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복을 듬뿍 받으실 자리라는 생각이 드네요.
따님 이야기만 들어도 은혜가 되는군요. 하나님이 주의종 가정에 주시는
자녀들의 풍성한 은혜는 늘 목회로 애쓰고 수고하는 부모의 헌신과
충성뒤에 내려지는 은혜의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지요~~~
미국에서는 학부의 과정이 대학원 과정 보다는 좀 힘든것 같애요.
우리 애들도 대학원 과정은 공부는 힘들어도 경제적인 문제는
그리 힘들이지 않고 지나갔지요.
정말 자랑스럽고 대견한 따님을 두신것을 축하드립니다.
나도 오늘 보스톤 하바드 교정을 지나 다니다 왔는데~~
쌍동이 입양아까지 두셨다니~~대단하시네요.
종교란에~~선교지의 은혜의 간증들을 들려 주실수는 없는지요?
류 사모님의 방문 너무 반갑답니다.
유정옥 사모님과는 성만 약간 비껴간 동명이인이구요~ 사실인즉 저는 1986년에 고국을 떠난 후 인터넷 없는 세상에서 살다가 최근에 유사모님의 이름이 알려지는 바람에 우연히 인일 홈피를 알게 되었어요. 그동안 좋은 글 읽기만 해서 사랑의 빚을 많이 졌으니까 기회가 되면 저도 하나님께서 해주셨던 일들을 글로 올려야겠지요? 암튼 반갑고 감사합니다.
은열 선배님!
인터넷 사정이 어려워 글을 잘 읽지도 못하고 올리지도 잘 못했는데,
오늘은 마음먹고 이 글을 읽었어요.
살아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하심과 간섭하심이
우리네 삶 깊숙히 중심을 잡고 흐르는 것을 날마다 찬양하며 갑니다.
함 뵙고 싶어요 ^^
류정옥 선배님!
제가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 뉴질랜드에 10년 살았는데
피지는 한번도 가본적이 없어요.
한번 가보고 싶어요 ^^
이미경선교사님~~안녕하세요?
선교지에서 애쓰고 수고하시는 글 읽었지요.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저야 그냥 소소한 가정과 목회의 뒷이야기를 나누지만
선교사로서 몸으로 뛰시는 헌신은 상급이 크겠지요.
할렐루야! 따뜻한 차를 한잔~~~
은열!!
방가방가~~~~~
그동안 왜 이 글을 못봤지?
이제서야 보고 또 한번 찌~~~ㄴ한 감동!!!!
"그래 맞아, 은열 사모가 간증집을 내면 정말 좋은 책이 될꼬야!!"
생각했다우..
그런 우리의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요즘 이런저런 핑계로 나태한 나의 믿음생활에 반성을 했다우...
요즘 큰딸이 한국 나와서 같이 지내느라 행복하다오...
결혼은 했지만 이번에는 친정 엄마, 아빠랑 많은 시간을 보내겠다고 시어른들께 허락을 받아 우리집서 지내고 있는데 어제 시댁 다니러 간다고 집을 나서는데 왜그리 섭섭하던지...
이제 딸이 들어가고 나면 게을렀던 새벽기도도 다시 시작하고 내 생활을 정비해야지...
은열사모의 무궁한 간증보따리 자주자주 풀어주세요~~~
그런데 '알라봉' 너무 잘쓰고 계시오...ㅎㅎ
승숙이 언니~~허리는 말을 잘 듣는거죠?
요즘 심천사혈로 바쁘신 왕래를 잘 보고 있어요.
따님의 친정 나들이 얼마나 마음이 들떠 있으시겠어요?
그것도 바다 건너 왔으니~~ 좋은 시간 알차게 보내시길 바래요.
저도 오늘 노스케롤라이나 딸네 갔다 지금 돌아 왔어요.
헤어질때면 애기들이 목 놓아 울어서 몰래 나오곤 하죠.
자식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늘 부모 맘에는~ 짠 ~한 존재에요.
승숙언니의 신앙생활을 반성해야 한다면 저는 어쩌라구요. ㅎㄱㅎㄱ
제 자신이 나이롱 사모라는 생각이 들때가 있어요.
언니는 옆에서 보는 우리들에게 늘 편안하고 포근한 사랑을 느끼게 해요.
하나님도 같이 느끼고 계시겠죠? 그래서 오늘도 알라뵹~~
유순애 선배님께서 불꺼진 창에 환한 빛을 부어주시니
너무 감사하고 반갑습니다.
유선배님 시키시는대로 절하고 다니느라 너무 바쁩니다.
~~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늘 감사하며 빚진자의 맘으로 산답니다.~~
유 순애언니!!!
언니는 기억이 잘 안나실지 모르지만 제가 키 큰 이 현숙과 그 외 약4친구들이 언니께
과외 공부 했었지요, 언니네 집에서,,,,,ㅎㅎ 영수 과목이요.
현숙이도 미국에 있어요.숙경이도요.
언니를 여기서 뵈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가 여기서 뵙고 옛날이야기 했어요..ㅎㅎ
두 분 대화하시는데 방해 되지는 않으셨어요?
은열 어니!!!
윗 글 읽고 많이 공감했어요.
저는 딸 하나인데 이제23살이예요.
지금 돌어 보면 제가 한 건아무 것도 없어요,
하나님이 키워 주셨어요.
딸이 결혼하는 날 저는 아마도 많이 울 것 같아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어 미안해서요.
자녀 분들 훌륭하게 키우신 은열 사모님, 대단하세요.
최영희후배~~그리고 우리들의 미주 회장님!
맘씨도 너무 곱고 넉넉하고 선~후배 모두 챙겨주는 이해심~
자랑할것이 너무 많아 모두 나열하기 힘들군요.
물론 복 많이 받을 만큼 믿음의 그릇도 지름이 크구요~
빨리~~ 보구자파라~
이민사의 어려움이 어찌 나 만의 이야기겟어요?
언제 기회가 되면 우리 회장님 이민사도 한번 듣고 싶군요.
이곳에서 과외선생님까지 만나시다니? ㅎㅎㅎ
유순애 선배님께 배우셨다니 빈틈없는 가르침에 성적은
확실히 향상 되었으리라 상상해 봅니다.
최회장님의 딸과의 미래가 영원히 행복하길 빌어요.
목사의 내조자로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교회안의 분란이나 교인들의 몰상식한 행동으로 속을 썩는 일도 한 부분이지만 그 중에서도 어린 자식들의 뒷 바라지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직면한 현실이 목회의 제일 큰 걸림돌이었다.
이대목이 내 맘을 아프게 하였었지만
지금 모두 잘 성장한 얘기를 끝까지 읽은 후,
하나님께서 선택한 주의 종 가족에
합당한 축복을 주심에 감사드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