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남편은 목사가 된 후에 가정에서 나와 대화 중에 아이들과 경제적으로 어려운 벽에 부딪힐 때면 가끔씩 혼자 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이 있다. ~~하나님 일을 제대로 하려면 신부가 되어야 진짜 헌신을 할수 있을꺼야~~ 라고 한숨 속에 속내를 보이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목사의 내조자로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교회안의 분란이나 교인들의 몰상식한 행동으로 속을 썩는 일도 한 부분이지만 그 중에서도 어린 자식들의 뒷 바라지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직면한 현실이 목회의 제일 큰 걸림돌이었다.

아이들이 고등학교까지는 미국의 의무교육이 잘 지켜지고 있으니 그런대로 대강 대강 키울 수가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실력 대로 택하는 대학부터는 아이의 실력과 부모의 경제적인 뒷받침이 없어서는 안되는 현실이었다.

교회측에서 목회자의 모든 생활을 책임을 져 줄 수 있는 사정이라면 걱정 할 일이 없겠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그들은 목사인 남편만의 급료를 책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 딸려 오는 부인인 사모에게도 직장도 갖을 수 없고 두사람 모두 교회에 헌신해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철칙같은 그물을 쳐 놓는 것이었다.

나는 목회 경험도 없던 그때 당시에 그들의 말대로 남편 뒤에서 문제가 안되기 위해 숨 죽이며 가정은 뒤로 한채 열심히 목회에 동참을 했다. 아침에 교회일을 위해 집을 나설 때에는 늘 아이들이 언제든 와서 먹을수 있도록 큰 냄비에 국을 한솥 끓여 놓고 밥솥을 채워놓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부모가 없는 텅빈 집에서 밥과 국을 찾아 제대로 챙겨 먹을리 없었다. 가끔씩 우리가 없는 집에 교인들이 전화를 하면 아이들에게 늘 ~~밥은 먹었냐?~~ 하고 묻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우리아이들의 답은 ~~너구리 먹었어요.~~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쩌다 내가 모처럼 집에 머물며 특별한 음식을 준비하는 날에는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나에게 아이들은 조용히 나의 뒤로 다가와 묻는 것이었다. ~~엄마 오늘 집에 교인들 오지?~~ 라고. 그 당시에는 나의 머리속에는 온통 교회일 뿐이라서 내 등뒤에서 묻고 서 있는 아이의 마음속에 받을 상처는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훗날 아이들과 우리 가정사의 옛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을 때 아이들의 맘속에 그 당시의 엄마의 무관심이 작은 상처가 되어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는 아이들에게 부족한 엄마로서의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우리 부부의 대충대충 키우는 무관심 속에서도 우리 쌍둥이 딸들은 학교에서 뛰어난 학생으로 생활을 했다. 두 딸은 전교에서 꼭 일등과 이등으로 둘이 서로 경쟁을 하는 것이었다. 졸업도 둘째가 일등을 하는 바람에 첫째가 발레딕토리안을 못했다. 그리고 대학도 둘이 모두 하버드 대학에 입학원서를 냈는데 둘째가 들어가고 첫째는 듀크 대학에 입학이 되었다. 만일 둘이 쌍둥이가 아니었다면 첫째의 진로가 좀 더 그 애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교회일에 묻혀서 대강 기른 결과 치고는 하나님께 눈물로 감사 드릴만큼 놀라운 열매였다.

그 당시 시골 동네에서 쌍둥이 자매가 모두 명문을 들어갔으니 신문이나 TV 에서는 신문의 첫째 페이지를 우리 식구 사진으로 장식을 하고 텔레비젼에서는 저녁 뉴스에 나오고 해서 우리 가족은 갑자기 동네의 유명 인사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런 기쁨도 잠시 스쳐 지나가고 우리 앞에는 두 딸의 뒷 바라지가 큰 근심이 되어 묵직한 돌덩어리를 가슴에 얹어 놓은 답답함으로 닥아왔다. 다행히도 두 아이가 모두 가정이 어려운 관계로 장학금을 받았다. 학비는 한학기에 몇 천불만 부모가 감당하면 기숙사비까지 해결이 되었다. 그래도 아이들의 한달 쓸 용돈과 집에오는 비행기 값 등 소소하게 드는 비용이 우리의 몫이라 우리의 가난한 살림으로는 벅찬 뒷 바라지였다.

우선 학기 초에 필요한 컴프터 2대와 기숙사에 필요한 살림들은 크레딧 카드를 긁어가며 준비를 해 주었다. 그러나 학기중에 급히 아이들이 원하는 시기에 돈을 붙여 주려면 어디에서도 구해볼 방도가 없었다. 정말 피가 바짝바짝 마를 일이었다. 어려운 일을 의논할 상대는 하나님 한분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믿고 태연해 있을 큰 믿음도 아니니 이 궁리 저 궁리 아이들의 필요한 돈을 만들 궁리를 열심히 해 보는 것이었다. 내가 갖고 있던 패물중에 값이 나가는 순금 팔찌는 같은 이웃인 우리 교회와 상관없는 이웃 아줌마에게 창피한 마음에 몇날 몇일을 고민하다가 제 값도 못 받고 넘겼다.

그리고 내가 끼고 있던 작은 알의 다이아 반지를 들고 주인이 유태인인 보석상을 찾아간 적도 있었다. 그 보석상 앞에 가서 몇일을 들어갈 용기를 못내고 서성이다가 드디어 어느날 크게 숨을 들이 쉬고는 문을 조용히 밀고 들어 섰다. 번쩍번쩍 화려한 유리 진열장 안쪽에서 화려한 색조의 화장을 한 금발의 생 머리를 길게 내린 점원 아가씨가 아주 상냥하게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내게 무엇을 찾고 있느냐고 말을 건네 왔다.

나는 두근두근 쿵쾅 쿵쾅 뛰는 가슴을 이기지 못하고 죄를 지은 사람인양 애를 써서 표정을 자연스럽게 보이려 신경을 곤두 세웠지만 실제로는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몰꼴이었을지 스스로 상상이 되었다. 그래도 힘들게 들어 섰으니 끝을 봐야 하지 않겠냐고 속으로 창피한 맘을 달래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 가서 손에 꼭 쥐고 왔던 초라한 반지를 내 보였다. 그녀는 나의 의도를 벌써 알고 있는지 내가 내민 반지는 집어 보지도 않고 ~~ 미안해요, 우리는 큰 알만 취급을 하지 조그만 알은 취급하지 않아요!~~ 라고 단호히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알았어요.~~ 라는 말을 남기고는 급히 그곳을 빠져 나왔다.

당장 보스톤의 둘째 딸에게 200불을 붙여 주어야 그애가 비행기 표를 사서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 올 수가 있었다. 정말 앞이 캄캄해 왔다.

우리 둘째는 하바드 대학에 들어가서도 스스로 돈을 벌어 우리의 부담을 줄여 주겠다고 안해 본 일이 없는 아이였다. 그 애가 살고 있는 기숙사 건물의 청소를 우리 애가 맡아 청소를 했는데 한 공간에는 방 네개와 리빙룸이 따로 있어서 네명씩 기숙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공간마다 샤워장은 공동으로 쓰고 있었는데 학생들이 바쁜 학기중에 엉망으로 어지르며 쓰고 나간 후에는 머리 카락이 한 주먹씩 나온다고 했다. 그런 일을 하려면 비위가 상하련만 그애는 열심히 일하며 공부했다.

나중에는 하바드 대학의 건물 청소 매니저 할아버지의 마음에 쏙 들어 하버드 대학에서 40년을 넘게 일해온 그 할아버지는 자신의 친 손녀같이 우리 딸을 졸업하는 순간까지 사랑하며 돌봐주었다.

후에 우리 부부가 방학 중에 그곳을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그 할아버지는 우리를 특별히 대우해 주셔서 그 기숙사에 머물수 있게 해주셨다. (어느 학생의 부모도 기숙사에서는 잘 수가 없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타고간 차를 파킹할 특별 공간까지도 할아버지가 마련을 해 주었다. 하바드 대학 교정내에 장기간 파킹을 한다는 일은 허가 없이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정 관련자의 허가를 얻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둘째 딸은 학교가 방학을 해서 아이들이 모두 떠나고 나면 우리 딸에게는 남이 생각하지 못하는 보너스의 기회가 온다고 했다.

하바드 대학의 학생들 부류는 두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 엄청난 부자이거나 아니면 아주 가난하거나였다. 중간층이라면 장학금 혜택 같은 것은 꿈도 꿀 수가 없고 학비가 비싸니 결국은 다른 학교를 선택하게 되고, 또한 대학에 기부금을 많이 내놓는 사람이나 동문의 자녀에 대해 입학의 우선권을 주니 가난한 아이들은 더욱 가난해 보일 수 밖에 없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아이들이 장학금으로 들어 갔다고 해도 학기마다 상위권에 드는 학점을 유지 해야만 학비의 보조가 지속이 되었다. 그러니 우리 둘째의 하바드 학창 시절은 처절한 자신과의 투쟁이었을 것이다.

우리 애는 아이들이 모두 방학이라 집으로 돌아간 빈 기숙사에서 학생들이 기숙사 방문 앞마다 내놓고 간 지난 학기의 서적들과 쓸만한 물건들을 청소를 하며 모두 거둬 들였다. 그애는 그 물건들을 세를 낸 창고에 쌓아 두었다가 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 갔을 때 인터넷을 통해 학생들에게 되 팔았다. 생활이 풍족한 아이들이 쓰레기로 버리고 간 물건들은 우리 애에게는 정말 필요한 도움이 되어 돌아왔다.

아이가 너무 안스럽고 처절하게 살아가는 현실에서 집에 돌아오는 비행기 값을 해주는 것은 작고 보잘 것 없는 엄마의 자존심의 표현이었다.

그 당시 우리 교회에서는 부흥회가 한창 뜨겁게 열리고 있었다. 한국의 대형교회에서 부흥회를 위해 강사님이 오셨는데 집회가 하루 남기고 막바지에 있었다. 가끔씩 부흥회를 치루고 난 후에는 교회에서 강사 목사님에게 사례비를 드릴 때 담임 목사에게도 수고했다며 200불을 주었었다. 남편과 나는 가끔씩 그래왔으니 이번에도 수고했다고 200불을 받으면 둘째에게 비행기 값을 보내 주리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집회를 하루 남긴 토요일 오전 동네의 샤핑몰이 문을 여는 시간인 아침 10시 쯤 교회 여선교회 회장인 집사와 나, 그리고 남편과 부흥회 강사님이 같이 교회 여성회에서 강사님에게 드리는 선물을 고르기 위해 샤핑센터로 갔다. 우리 모두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몇대 안되는 차가 세워져 있는 파킹랏에 차를 세우고 맨 앞에 강사님이 걸어 가시고 그 뒤로 집사님과 내가 따라 가고 맨 뒤에 남편이 뒤따라 왔다.

그런데 맨 뒤에서 우리들 뒤를 따라 오고 있던 남편이 나에게 다가와 빳빳한 백불짜리 두장을 눈앞에 보이는 것이었다. 사람이 만진 흔적이 전혀 없는 새 돈 두장이 한장 같이 딱 붙어 있었다. 남편은 그 돈을 나에게 보이며 자기 발밑에서 주웠다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남편은 1전짜리 동전 하나 줏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 말을 듣고 눌라움에 주위를 둘러보니 파킹랏에는 한적하니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보이지를 않았다.

그래서 일단은 넓은 매장안으로 들어가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 가게 안에는 우리들이 첫 손님인듯 서성이는 사람들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윗층의 고객 서비스로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그곳의 직원에게 파킹랏에서 잃어버린 것이 있는 사람은 연락 바란다고 방송을 해 달라고 했다. 그동안 우리들은 샤핑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모든 일을 마치고 이층으로 올라가니 직원이 우리에게 신고가 들어 오면 연락을 해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집으로 돌아 왔다.

그 다음날 저녁에 집회가 끝나면서 부흥사에게 사례비와 선물을 전달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담임목사에게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맙소사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오직 남편의 눈에만 띄게 사람이 만진 자국도 없는 미스테리의 200불을 땅바닥에 납작 붙여 놓으셨던 것이란 말인가?

그날 쇼핑몰 파킹랏에서 앞서 가는 우리들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를 않았음이 신기했다. 평소에 2백불을 줏었다면 그것은 이리 크게 놀라는 사건은 아니었을 것이다. 부흥회 기간 동안 나의 머리 속은 온통 200불의 근심으로 도배를 하고 있었다. 도대체 그 이백불이 어디서 날라와 떨어 졌길래 누가 만진 흔적도 없이 바람에 날라가지도 않고 오직 남편의 눈에만 띄었는지 아무리 생각을 해도 해답이 나오지를 않았다.

그날 뒷자석에 앉아 있던 나의 눈에서는 그 누구도 의미를 모르는 눈물이 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아 나의 아버지, 주님은 우리 부부의 대화 속에 함께 계셨군요!~~ 그날 내 심령 속에는 은혜의 강이 봇물처럼 터져 흘러 내렸다. 그리고 그 후에도 그 돈을 찾는 전화는 없었다.

그날 저녁 보스톤에서 둘째가 집으로 전화를 했다. 그 애는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오늘 학교에서 학기말 시험이 끝났는데 생각 만큼 시험을 못 보고 주머니에 돈도 없고 마음이 너무 쓸쓸해서 울면서 켐퍼스를 걸어 나오는데 길 바닥에서 20불 짜리를 주웠어. 그래서 너무 신기해서 슬픈 것도 잊어 버리고 친한 기숙사 친구와 둘이 나가서 그 돈으로 저녁을 사서 먹었어. 우리 둘은 주운 20불로 너무 행복한 시간을 가졌어.~~ 라며 그 당시 상황을 떠 올리며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둘째 딸에게 우리도 200불을 주워서 너에게 보낼거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우리 모녀의 대화 속에 하나님이 빙그레 웃으시며 내려다 보시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어느 누구도 이해 할 수 없는 하나님과 우리 가족의 비밀스런 교제는 늘 계속 되고 있었다. 둘째 딸은 공부와 생존과 싸우면서도 아주 밝고 꿋꿋하게 이겨나 갔다.

하바드의 학생들간의 경쟁은 얼마나 살벌한지 그 애들은 시험 기간에는 시간을 벌기위해 모두 샤워들도 안하고 머리는 떡이 진 채로 책과 씨름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교수가 교재를 도서관에 갖다 놓고 학생들에게 가져다 보라고 하면 재 빠르게 먼저 뛰어 가서 집어 오지 않으면 순식간에 누군가가 치워 버려서 구할 수도 없다고 했다. 시험 기간에 받는 중압감에 못이겨 일년에 한 두 건씩은 기숙사 방에서 뛰어 내리거나 미치거나 하는 가슴 아픈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시험이 끝나는 날에는 많은 수의 학생들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나체가 된채 교정에서 미친 사람들 처럼 날뛰다 들어 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위험 수위의 도발적인 행동들이 겁나서 늘 아이에게 말을 했다. 만일 공부를 따라 가기 힘들거나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는 언제든지 엄마에게 얘기 해달라고 말을 해야만 했다. 그런 각박한 생활고 중에도 둘째 딸은 4년을 마치고 졸업하는 날 마그나 쿰라우덴이라는 최우수 상장을 받고 자랑스런 기쁨을 우리 부부에게 안겨 주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렸다.

나의 하나님과의 동행하는 삶속에 200불과 20불의 작은 사건은 평생 잊을 수 없는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작은 위로의 간증으로 영원히 남겨져 기억이 될 것이다. 지난 세월을 뒤 돌아 볼 때 우리 식구가 궁핍함 중에 받은 불편함과 좌절보다는 하나님의 오묘한 은총의 손길이 그 중간 중간 아름답고 시원한 생수가 되어 내 목마름을 채워 주고 계셨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