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길목사님이 요약하신

<왜? 성경이 복음으로 읽혀져야만 구원을 받는지의 간절한 이유>

우리는 쉽게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하지요.

그러나 진실한 의미를 알고 실행하는지!!!!

은혜의 시대에 산다는 말은 우리는 연약하여 의롭게 할 수 없는 일을

예수그리스도꼐서 우리 속에 임하셔 모든 일을 이루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실자)는  원래 은혜아래 오신것이 아니라

율법아래 오셔서 율법아래서 꽁꽁묶여 노예생활하는 우리에게

우리가 할수 없는 일을 대신 해 주시면서 자유를 주신 것이지요.

 

그러면 언제부터 우리에게 은혜의 시대를 주시는가? 

그 시기는 사도행전2장 오순절날 120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하면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이 시점에서 이전 즉 율법속에서 12제자를 선택하셨고

이후에 한 제자 바울을 은혜속에서 선택하셨읍니다.

 

이외에도 열두제자 명단에 들어가는 한 사람이 더 있는데 이는 맛디아라고 

바로 은혜의 시대가 시작되기전 사행1장 마지막에서 찿아볼 수 있읍니다.

그러나 이는 불행이도 예수님이 선택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들의 생각대로 선택한 사람이기에 

예수님께서 이 제자를 쓰신적이 없읍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연구하려는 것은 율법속에서 선택된 제자들이 쓴 성경과

은혜속에서 선택된 바울이 쓴 성경이 어떻게 다르며

우리가 알고 지켜야 할 점들을 지적하며 진행하려 합니다.

이를 통해서 진실로 예수님의 축복속에 은혜를 만깍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이 은혜의 시대에는 주님이 우리에게 우리가 필요로 하는 세상적인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제를 믿음에 따라 이기고 넘어갈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성경의 힘이란 999번을 읽어도 항상 그 깨달음이

나의 자라옴- 그 위에 더해지는 것이기에 

그 꺠달음이 매번 새롭다는 것입니다,

항상 원 시작으로 돌아가시어 다시 새마음으로 읽어보실때

새로운 감격이 더해질것으로 믿읍니다. ---------

 

 

<<<갈라디아서 강해설교>>> ? ?셋쨰날

 

갈 2:1-10  에루살렘 교회에서의 교제

 

오늘 바울의 역사를 그리는 두 번쨰 장을 계속합니다.

먼저 말씀드렸듯이 1장과 2장은 바울 자신의 역사에 대해서 말씀하는 단원이라고 했읍니다,

처음에 자기가 전하는 메시지가 진실한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자기가 누구인가를 밀했고

다음은 그래서 자기가 전하는 메시지는 주님이 자기에게 계시로 주신 참 복음이라는 것릉 재천명함니다.

 

그리고 오늘의 이야기는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세가지 증거 대는 장면입니다.

 

(1) 그리스도인들의 교제를 훼방하는 적에 관하여

 

3절과 4절을 읽어보면 "그러나 나와 함꼐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형제인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지금도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면서 가장 주의해야할 사람들은 이 가짜 형제입니다.

 

교회 나온다고 다 형제 자매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주님안에 거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들은 지금 말하는 거짓형제요 자매임을 명심하십시오,

그들은 대부분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는 것처럼 가장하고 모임에 나오지만 그들 안에 예수님

즉 복음이 전연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모든 면에 형식적이여서 남을 정죄를 잘 합니다.

복음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들이지 정죄하는 사람들이 아님을 아십시오,

그런데 이 서신에서 거짓형제란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바울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면서 바울을 괴롭혔읍니다,

 

이 배경을 자세히 공부하기 위해서는 사도행전 15장을 보셔야 합니다.

행15:1에서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하고

구원의 조건으로 할례 즉 율법을 지킬것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문제를 삼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즉 할례를 받아야 되느냐 안되느냐가 아니라 구원을 받는 조건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다시 행15장을 계속읽어보면 이 문제떄문에 에루살렘에서 성경 잘 아는 모든 사람이 모여 이 문제를 놀고

논의하게 되었는데 5절을 보면 "바리새파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여기서 바울의 논쟁이 할례가 나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상으로 참 좋은 것이지요,

그러나 그 할례가 우리를 구원할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계획아래 이루어진,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시기 위하여 흘리신

보혈의 피의 공로로 내가 그것을 깨닫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나의 주님(나를 다스려주실분)이시오

                                       나의 구세주(나를 구원으로 이끄실 분)로소이다"라는 고백으로 얻는것이지

거기에 하나 더 얹어서 할례도 받아야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베드로가 일어나서 반론을 시작합니다.

7절에서 9절까지는 변론이고 10절과 11절에서 결론을 맷읍니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이것이 베드로의 결정적인 결론입니다.

구원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주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느니라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들이 즉 믿는다는 바리세인들이 사도바울에게는 무서운 복음의 적들이였던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거짓형제들입니다.

이들이 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 들어 왔다고 했읍니다.

갈2:4절에서 '가만히 들어온;형제라고 지적합니다.

왜 그들이 가만히 들어 왔읍니까?

4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하므로'

우리가 지킬수 없는 율법을 조건으로 한다면 우리는 그떄부터 지킬수 없는 율법의 종노릇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에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은 주님이 주신 성령의 능력으로 율법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레서 그리스도인이란 무율법주의자가 아니라 주님이 주신 능격으로 율법을 지키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길 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려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려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하려 함이로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안에 머물기만 하면 주님이 나를 들어서 율법을 지키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진리요 이 진리가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자유케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구원을 받았다는 사람이 이 율법을 무시하고 방종하게 산다면 그 신도는 둘중에 하나입니다.

아직도 주님을 체험하고 거듭남이 없든가 아니면 영적인 병이 들어도 단단히 들은 신자임에 틀림이 없읍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주의자도 아니지만 무율법주의자도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것을 다 이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안에 있고

진실한 사랑은 받은 사람은 사랑하는 분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할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라는 원리예요,

은혜란 한 마디로 말해서 주님의 극진한 One Way=하나님의 일방적 사랑입니다,

다시말해,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우리의 속제물로 오셔서

십자가위에서 보혈의 피를 흘려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이제 너는 의인이다,하고 칭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말입니다, 

 

다시 5절에서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었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사도바울은 모든 문제에 대해서 마음이 큰 분이였읍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관계의 문제들을 모두 용납했읍니다.

즉 관용을 베풀줄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에 관한한 목숨을 걸고 용납치 않았읍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요?

저도 그렇게 하고 싶읍니다.

누가 나에 대해서 자기들의 이권대로 말할떄 다 용납해주고 싶읍니다.

그래서 세상적 일에 관해서는 제가 머리를 숙이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이 복음의 본질에 관해서만은 바울의 가르침같이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아래서 영원한 자유를 누릴수가 있게 됨--그보다 더 기쁜일이 어디있겠읍니까???

천하를 다 얻어도 너의 구원/영생을 얻지 못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오???

 

만약 사도바울의 이와같은 완벽한 복음의 수호가 없었더라면 우리 기독교는 변질된 유대교에 불과했을것입니다.

 

그래도 사도바울은 할례를 반대한 분은 아닙니다.

할례자체로는 참 좋은 것입니다.

창세기 17:10절에서 하나님이 준 언약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언약이 구원의 조건으로 준 언약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아야합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그래서 바울도 할례주는 것을 찬성합니다.

행16:3을 보면 "바울이 그(디모데)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세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줄 다 앎이러라" 이렇게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합니다.

할례가 공동체의 이익을 가져올 경우 반대할 이유가 없읍니다.

 

(2) 교제의 동지들을 소개합니다

 

반대로 여기서 사도비을은 거짓형제들에게 했던 것과는 달리

어떤 태도를 가지고 참 동지들을 대했는가를 배우려고 합니다

.

2장 1절에서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바나바와 디도입니다.

먼저 비니비와의 관계: 바나바는 구브르에서 태어난 레위족속의 한 사람이며

                                      사도바울이 가장 사랑의 빗을 진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알기 위하여 행 9:26,27을 보면

"사울이 에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꼐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바나바가 없었더라면 사도바울은 주님의 제자들과 사귐을 가질수가 없았읍니다.

또 행11:19-24절까지 보면 바나바가 그 유명한 안티옥의 목사가 됩니다.

그래서 바울과 함께 일하려고 바나바는 사울을 찿아 다소로 갑니다(25절).

 

26절:"만나매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래서 여기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란 말이 탄생하게 되는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을 따르는 작은 예수란 뜻으로 시작된 별명입니다

. 

또한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바나바가 사도바울을 발탁하여

전도라는 무대위에 세워놓고 자기는 서서히 무대에서 말없이 사라져갑니다. 

이런것을 우리들이 못하는것중의 하나이지요.

끝까지 나를 내 세워야만 되는 것이 우리들의 본성이라고 나는 봅니다.

안심하고 맡응수 있는 사람이 나올떄 거침없이 물려줄수 있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교회양상과 얼마나 다릅니까???

마치 교회가 목회자의 사적 재산인양,,퇴임하면서도 꺠꿋이 물러나지를 못하고

이권으로 옥신각신하며 빗어내는 추한 모습들을 볼떄 서글프기 한이 없읍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5:36절부터 보면 마가 떄문에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바나바와 바울은 헤여지는 계기가 됩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 위대한 전도사역을 할수 있었던 것은 곁에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있었기 떄문입니다.

또 다른 디도라는 사람:

디도는 바울에 대해서 어떤 사람입니까? 

딛1:4에서 바울은 말씀하시길 ",,,믿음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라고 소개합니다.

이와같이 디도는 바울의 전도를 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전도란 한 사람을 내 교회 나오게 하는 것이 전도가 아닙니다.

그 사람을 가르쳐서 주님의 제자가 되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도록 기르는 것이 전도라는 것을 믿으십시오,

 

성경속에 나타난 교회중에서 제일 문제가 많았던 교회는 어떤 교회였읍니까?

고린도 교회지요, 이 교회가 문제가 있을 떄마다 현장에 사도바울과 함께 수습하러 나서는 사람이 있읍니다,

그 사람이 바로 디도입니다.

 

고후 7:5,6을 읽어보면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디도가 옴으로

바울을 위로했다고 말씀하심을 볼 수 있읍니다.

그래서 디도서는 그레테 섬의 교회들에 문제가 생겼을 떄 바울이 디도를 파견하고 쓴 서신입니다.

이렇게 디도는 바울이 어려운 일이 닦칠떄마다 해결사로 파송되는 사람이였읍니다.

바울이 세계전도의 큰 장을 열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돕는 사람들이 많았기 떄문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2절에서 바울은 에루살렘에 갈때 계시에 따라 바나바와 디도를 대동하고 갔읍니다.

또 7절에서 사도바울은 베드로를 만납니다.

바울은 무할례자(이방인) 그리고 베드로는 할례자(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사도들이였읍니다

다시말해 유대인이나 이방인(유대인이 아닌 우리 인류 모두) 모두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으신 분,,,,

.

이것이 지체의 원리입니다.

이 지체의 원리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필요함을 깨달을때

교제가 일어나며 교회가 성립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자기에게 부여되어진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도바울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부르심의 다름을 인정하게/알게 되었읍니다,

 

또한 9절에서 사도바울은 야고보(예수님의 동생)을 만나고 처음으로 게바(베드로)와 요한도 만나

서로를 존경하는 태도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서로 서로 보기만 해도 알게되는 것은,

아  이 사람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구나를 알게 되기 떄문입니다.

이들은 처음 만났지만 서로의 임무를 잘 알았읍니다,

우리는 서로 비방할떄 교제가 무너지고 교회는 온데간데 없게 되는 것입니다.

비방은 사탄만이 좋아하는 교제를 파괴하는 방법임을 명심하십시오..

 

(3) 교제의 초점에 대하여 두 가지 

 

첫쨰는 들의 교제는 선교를 위해서 즉 복음전도를 위해서 입니다.

베드로는 유태인에게로 바울은 이방인에게로,,,,선교를 위힌 교제였읍니다.

둘쨰는 10절 말씀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셨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즉  우리는 선교를 위해서 구제하는 것입니다.

구제를 할때 선교의 길이 열리기 떄문입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