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기도 응답으로 차린 사업체에서 남편은 혼자 기술을 터득해 가며 열심히 일한 보람이 있어서, 빈손으로 시작한 가게가 놀라운 매상에 이르게 해주셨다. 힘든 하루 하루였지만, 그래도 수입이 늘어나는 재미에 고달픈 것도 모르고 지냈다.

그렇게 일년 가까이 지나던 어느날, 신앙생활에 푹 빠져 은혜 속에 생활하던 남편이 신학을 하고 싶다고 의논해 온 것이었다.

그러한 생각이 나에게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나는 희생과 고통의 삶이 뻔한 길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냥 내 방식대로 교회 생활을 잘 하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그렇다고 내 생각대로 강하게 표현할 수도 없고… 남편이 심중은 표현 했지만 그도 갈등을 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그 길이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인지 더 기도해 보라고 했다.

 

남편은 갈등하면서 고민하다가 문득 기드온의 기도가 떠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기도하기를 ~~하나님, 만일 제가 신학을 하기를 원하신다면 수일 내로 이 가게를 팔아 주세요. 그러면 주의 뜻인 줄 알겠습니다~~ 하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 사실 가능성이 희박한 그 기도의 내용은 자신없는 고난의 길을 피하고 싶은 심중이 내포된 그런 기도였다. 그리고 가게를 판다는 소리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기도를 하고 며칠이 지난 어느날 저녁 문 닫을 시간쯤 되어서 처음 보는 중년의 남자가 손님이 끊어져 조용한 가게로 들어왔다. 그는 가게 문을 들어 서면서 자기 소개를 했다. 그의 얼굴은 초면이었지만 알고 보니 우리가 아는 분의 동생이었다. 그는 우리 가게를 오래 전부터 보고 있었던 사람이라 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우리 가게를 너무 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 부인도 이곳에서 같이 일해 보고 싶으니 팔라고 통 사정을 하는 것이었다. 가게 값도 충분히 계산해 주고 당장이라도 체크를 써 준다는 것이었다.

너무도 당황스런 일이었다. 기도는 그리 했지만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놀라움이 컸다. 하나님과의 약속이 현실이 되었으니 안 판다고 우길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무엇에 홀린듯 처음 만난 아저씨에게 며칠 만에 가게를 넘겨주고 나왔다. 우리 스스로 기도를 해 놓고도 꿈같은 현실에 참으로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 두렵기까지 했다.

 

그 당시 우리는 장로교회를 나가고 있었다. 한국에서 남편의 처음 신앙이 들어간 곳도 장로교회였다. 남편이 신학을 생각했을 때는 북쪽에 있는 장로교 신학교를 맘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담임 목사님과 의논을 했더니 목사님이 우리 남편을 멀리 보내고 싶지 않으시다면서 가까이 있는 감리교 재단인 듀크 신학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졸업 후에 따로 장로교 과목을 더 들으면 된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남편은 듀크 신학 대학원의 입학 절차를 알아 보았다. 토플 시험도 보아야 하고 학교에서 요구하는 서류들이 만만치 않았다. 토플 시험과 학교에서 요구하는 서류들을 준비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려야 했다.

 

남편은 고민에 빠진 눈치였다. 남편은 고민하다가 마음의 결정을 이야기했다. 신학교 가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고, 그렇다고 마냥 시간을 보낼 수도 없는 일이니 차라리 돈을 많이 벌어서 충성하는 것이 낫겠다고 했다.

여기 저기 사업을 알아보다가 후렌차이즈 사업에 연결이 되어서 본사에 가서 면접을 하고 서류에 싸인을 하러 가기로 날자를 잡게 되었다. 본사에 가려면 다른 주로 가야 하는데 그 전날 저녁에 나는 일을 가고 집에 없었다.

그날 저녁에 남편이 애들 학교에서 있는 행사에 아이 셋을 데리고 참석하고 돌아 오다가 집 가까이 있는 신호등 앞에서 산지 한달도 안된 새차가 어두운 밤중에 인적이 끊긴 조용한 사거리에서 갑자기 이유도 없이 시동이 꺼지며 서 버린 것이었다. 그 차는 그 다음날 공장에 들어가서 일주만에 고쳐져 나왔다. 물론 새 비지니스 일은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고장난 차를 찾아 오면서 마음 속에 전혀 우연일 수 없는 하나님의 깨우침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다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돌리기로 맘을 먹고 돌아왔다. 그날로 부터 듀크 신학 대학원에 입학 하기까지는 2년이란 세월의 모진 연단 속에 많은 기적들을 체험하고 우리가 지녔던 물질이 다 바닥이 난 후였다.

하나님은 우리의 계획과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으로 하나님의 때에 우리를 이끌어 가시기를 원하셨다. 우리의 울부짖는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사소한 작은 부분에 까지도 관심을 보이시고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살아계신 아버지셨다. 세상의 부모는 자기가 지닌 한계 내에서 자식을 위해 헌신하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불가능과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자식을 위해 있게 만들어 주시는 분이셨다.

 

그 당시 나는 홀로 있는 시간에는 늘 찬송으로 화답하며 눈물로 하나님과 대화를 했다. 늘 뜨겁게 사모하는 마음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내 영혼이 두려움 속에 갈망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는 나에게 방언과 신비한 체험들을 허락해 주셨다. 그러한 체험들은 우리가 나아가는 어려운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엄청난 힘이 되어 주었다.

직장을 잃고 좌절 속에 있을 때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셔서 이웃을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모든 사업에 필요한 준비물들을 채워주셔서 빈손으로 시작한 가게가 놀라운 매상에 이르게 해 주셨다. 또한 신학공부를 위해 확실한 기도의 응답을 주셨는데도 우리는 다시 세상으로 향하는 계획을 하고 있었었다.

 

작은 사건 속에서나마 우리는 다시 깨우치고 돌아서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과의 약속의 기도 응답을 되새기며 남편은 듀크 신학 대학원을 들어가기 위해 토플 시험부터 준비를 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10년 가까이 머리를 잠 재우다가 토플 공부를 하려니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나는 돈벌러 나가고 집안에서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내가 하던 살림까지 챙겨야 하니 참을성과 인내가 없다면 목표를 잊고 옆길로 빠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1년여 만에 학교에서 원하는 토플 점수를 받고 원하는 서류들을 준비해서 제출할 수가 있었다. 그런 중에 시간이 지날수록 넉넉하게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은행의 잔고는 매달 매달 줄어들며 우리들을 초조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모든 서류를 제출하고 입학 허가서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쪽에서의 답변은 서류는 다 갖추었지만, 한국에서 대학 졸업한지도 오래 됐고 미국에 와서 공부를 한 적도 없으니 듀크 신학 대학원에 입학하려면 일반 대학 영문학과에 가서 영작문 코스를 듣고 평점 B 이상을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국문학과에 가서 작문 코스를 듣고 평점 B를 받아오라고 해도 힘들텐데 미국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영어를 사용하고 그들 중에 또 특별히 영어에 자신이 있어 모인 사람들이 영문과 학생들일텐데 그들 틈에서 좋은 학점을 기대한다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신학교를 장학생이 되기 위해서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이것은 아예 포기하라는 말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했다. 주립대학에 등록하고 처음 공부를 하고 온 남편은 자기 클래스에는 모두 갓 스무살 된 학생들이고 나이 먹은 학생은 자기 혼자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클래스의 교수는 깐깐하기로 소문난 여자 교수였다. 학기 중에 9번 작문 시험을 보고 그 점수를 평균해서 학점을 준다고 했다.

남편은 열심히 다니며 시험을 치뤘다. 남편의 시험지를 보면 교수가 쉼표, 마침표 등 빠지거나 틀린 부분에 표시를 한 빨강색 펜의 흔적이 시험지를 덮고 있었다. 매번 점수가 B에서 아슬 아슬하게 모자라는 것이었다. 아예 많이 모자라면 애저녁에 포기하고 마음 편하게 살텐데 그럴 수도 없는 것이었다.

 

미국에 와서 영어 속에 살면서 영어로 골이 아프고 영어가 우리 가족을 슬프게 만들고 있었다. 사실 내가 남편을 처음 만난 것도 인천의 영어 회화 학원에서였다. 그 당시에 중년의 미국 아줌마가 열명 정도를 그룹으로 회화를 가르쳤는데 거기에 나와 남편이 같은 그룹에 있었다. 우리는 매일 매일 공부시간에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같이 만나 차도 마시게 되었다. 후에 보니까 남편까지 된 것이었다. 그때 인연이 되었던 영어가 이리도 속 썩일 줄은 정말 몰랐다.

생각만큼 학점이 안 나오니 남편은 몇번을 좌절하고 포기하려 풀이 죽어 있는 것이었다. 그런 그를 옆에서 보고 있는 나는 그냥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입 다물어 주는 것 외에는 속수 무책이었다. 그를 달리 도와줄 방도가 없었다.

 

드디어 마지막 시험으로 결판이 나는 운명의 시험을 치루는 날이 다가왔다. 아직까지의 점수를 평균해보니 마지막 시험을 A+를 받아야만 평점이 B가 되는 것이었다. 평점 B를 받지 못하면 식구 모두가 헌신해온 희생은 물거품이 되는 것이었다.

그날 남편은 학교로 향하면서 나에게 쉬지 말고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고 전쟁터에 나가는 용사의 각오로 떠났다. 그의 뒷모습의 분위기는 각오와 좌절의 측은함이 발걸음에서 서려나왔다.

나는 그날 바닥에 엎어진 채 간절하게 하나님의 기적을 간구했다. 너무도 지루한 긴 시간이 흐르고 난 후 남편 차의 엔진 소리가 집 밖에서 들리더니 남편이 발소리와 함께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내 눈과 마주친 남편은 그동안 받은 무거운 부담감의 쇠사슬에서 해방된 자유인의 미소를 나에게 보내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미소의 의미를 깨닫고 달려가 물었다. ~~아빠! 잘 된거야?~~ 남편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날 남편은 시험 보러 가면서 어디론가 가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가능성도 없는 A+에 대한 미련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괴로운 심정으로 강의실 의자에 앉아 있는데 교수가 들어오더니 칠판에 문제를 주면서 작문을 하라고 했는데 그 시험의 문제는 ~~내가 결혼하면 이러이러한 남편 혹은 아내가 되겠다~~ 고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 시험 문제를 받은 남편이 빈 시험지를 들여다 보고 있으려니까 그 시험지 속에 자기 같은 무능한 남편을 믿고 돈 벌러 다니느라 기를 쓰며 4식구를 위해 고생하고 있는 불쌍한 마누라 얼굴이 떠오르면서 그렇게 불쌍하고 미안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왕에 모두 틀어진 일이니 부인에게 못해 주었던 일들을 생각하면서 속죄하는 심정으로 울면서 아내에게 이렇게 해주겠다고 써내려 갔다는 것이었다.

그날은 마지막 시험이라 그런지 교수가 책상에 앉아서 내는 순서대로 시험지를 하나 하나 읽어보고 그 자리에서 점수를 메겨주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낸 남편의 시험지를 읽어본 교수는 남편이 쓴 내용에 감동을 받아 마침표 하나, 따옴표 하나, 하나 하나 점수를 세어주던 모든 깐깐함은 뒤로 한 채 A+를 준 것이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의 역사였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을 만드는 과정에 묘한 절차를 밟으시며 당신이 원하시는 낮아지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계셨다. 그 당시 시험을 치루고 있던 학생들은 모두 갓 스무살 된 젊은이들이었으니 깊은 감동의 글은 아니였으리라 생각된다. 좌절 속에 애절함이 깃들어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자신의 부인에게 잘 해주지 못했던 것들을 회개하며 지난 날을 돌아본 남편의 글은 비록 문법과 문장이 서툴렀지만 그속에 숨겨진 진실이 교수의 맘을 감동케 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하나님은 늘 우리 곁에서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고자 발버둥 치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고난의 낭떨어지 끝에 서서 떨어지려는 찰나에 있을 때 항상 기적의 문을 열어주시는 것이었다.

쓰임 받을 아들을 위해 늘 당신의 때에 기적을 보여주고 계셨다. 부족하고 모나서 쓸모 없는 돌멩이를 풍파에 갈고 깎여지게 만드시며 차근차근 당신의 길로 들어서게 하시는 연단을 끊임없이 준비하고 계셨다. 그런 연단과 시련을 옆에서 지켜보는 나는 내 자신이 늘 얼마나 연약하고 마음 졸이는 믿음이 부족한 내조자인가를 부끄러워 할 수밖에 없다. 나는 늘 짧은 생각에 앞서 행하고 나서서 방해가 되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이다.

주여~~ 이 부족한 딸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