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것 같다. 나에게 무엇이 제일 자신 없는 일이냐고 물어온다면 나는 서슴치 않고 음식 만드는 일이라고 대답을 할 것이다.

나는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나서 아들 셋 딸 넷중 제일 끝이다. 많은 수의 식구를 거느린 나의 부모님이 40이 넘어 생각지도 않게 덤으로 생긴 자식이니 우리 어머니는 나를 늘 측은함에 무조건적인 보호 본능으로 감싸서 키우셨다.

어머니의 옛 모습을 떠올리면 늘 머리 가운데 가름마를 타서 쪽을 지시고 집에서도 옷고름 없는 무명 한복을 입으셨던 모습이다. 그리고 동네 마실을 가실 때도 나는 엄마의 한복 치마 꼬리를 부여잡고 어디를 가던지 매달려 다녔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도 엄마품에서 젖을 더듬으면 우리 엄마는 나를 꼭 끌어 안아 주시면서 이렇게 말을 하셨다. ~~에그 측은한 것 같으니라구 시집 갈 때까지 먹어라~~ 하시며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성장을 했으니 자라면서 부엌 일은 언니들이 당번제로 해도 내 차례까지 올 일은 없었다. 어려서부터 내 할일은 엄마나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언니들이 해주는 밥 먹고 그냥 어린아이들의 모습 그대로 뛰어다니며 천방지축 철없이 자라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그녀의 우려대로 오래 건강하게 사시지 못하고 62세에 돌아가셨다. 내 나이 21살, 시집도 못보낸 철없는 딸이 너무도 맘이 안 놓이셨는지 임종을 맞으며 옆에 있던 내가 목놓아 울면서 ~~엄마~~ 하고 울면서 부르니 엄마는 의식이 없는 중에도 나의 절규를 들으신건지 감은 눈가에 굵은 눈물 한줄기를 주루룩 흘리시고는 운명을 하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후 나의 결혼식에는 부모의 자리는 공석인채 외가쪽 친척 할아버지가 웨딩드레스 입은 나의 손을 신랑에게 건네주셨다. 나의 남편은 같은 나이의 나를 돌봐주며 챙겨주었다.

살림을 시작하면서 음식을 해서 먹어야 하는데 도대체 만드는 과정을 본일도 없으니 먹을 수 없게 만드는 음식을 먹던 남편은 할 수 없이 자기가 먹었던 음식의 맛들을 기억해내며 나를 가르치기 시작을 했다. 물김치 담는 과정 그리고 나물 무칠 때 들어가는 양념들을 알려주었는데 남편이 군대시절 취사병이었다는 전력이 큰 도움이 되었다.

어느날 우리 두 사람이 시댁에서 몇일 머물게 되었다. 그날 따라 집안에는 여자들이 모두 외출중이라서 내가 식사를 준비하게 되었다. 시아버님이 나에게 미역국을 좀 끓이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부엌쪽 광에 들어가서 미역을 내다가 물에 담갔다. 그런데 왠일인지 그 미역이 좀 뻣뻣한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좀 질이 떨어지는 미역인가?” 하고 중얼대면서 미역국을 정성을 다해 끓였다.

밥상을 다 차린 후에 시아버님과 남편의 형님들을 불렀다. 밥상을 방으로 들인 후에 방문 밖으로 나가는 나에게 남편의 형님이 ~~계수씨! 이게 무슨 국입니까?~~ 하고 문을 나가고 있는 나의 등뒤에서 큰소리로 묻는 것이었다.

그의 질문에 멈춰 서서 머뭇거리는 나를 쳐다본 시아버님이 말을 막으시며 한마디 하시는 것이었다. ~~얘! 그래도 먹을만 하니 그냥 먹어둬라.~~ 그때까지도 나는 그들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후에 남편이 나에게 내가 끓인 국은 미역국이 아니라 다시마 국이었다고 일러주었다.

 

어찌나 살림에 문외한이었던지 첫애를 낳은 나에게 나의 큰언니는 ~~살림은 할줄 모르면서 애는 어떻게 낳았나 몰라!~~ 하며 핀잔을 주었다. 첫애를 낳으러 가는 시간 까지도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몰라 아무 출산 준비도 없이 그냥 시간만 보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 한심한 내가 애를 낳고 있는 사이에 큰언니는 이른 새벽에 가게문도 열지 않은 동대문시장의 포목점으로 뛰어가서 문을 두드리고 겨우 기저귀감과 아기용 이불을 구해왔다.

 

그렇게 노인네의 막내로 태어나 아무것도 할줄 모르던 내가 남편을 따라서 교회 사모가 된 것이었다. 이민 한국교회의 사모 역할은 정말 종가집 맏며느리도 울고갈 노동력을 지녀야 했다.

물론 탁월한 실력과 능력으로 그러한 모진 과정을 안겪고 넘어가는 사모도 많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타고난 어느 것도 없으니 힘들고 궂은 교회 뒤처리는 모두 내 몫이었다. 출산하는 유학생 산모들을 챙겨야 하므로 산모용 미역이 늘 집에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교인들 가족 모두를 불러다 먹여야 하는 일은 그냥 늘 있는 목회의 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교회 바자회나 김치 담그는 날은 이민생활에 돈 버느라 늘 시간에 쫒기고 고달픈 교인들 대신 추운 겨울 엄동설한에도 앞장서서 맨발로 소금에 절은 엄청난 양의 배추를 찬물에 몇번이고 행구어 씻어야 했다.

남편도 이민교회 목회자로서 설교와 심방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니었다. 가난한 교회살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교회 건물이 오래되어 고장나고 고쳐야 하는 일은 직접 뜯어 보고 배워가며 손수 해결했다. 돈을 주고 기술자를 불러서 들어가는 재정 지출을 줄이려는 마음에서였다.

십 몇년을 그렇게 몸으로 겪다 보니 남편은 날로 날로 기술자가 되어 전기, 목수, 미쟁이 일 등 못하는 일이 없게 됐다. 그렇게 배우고 익힌 기술은 후에 우리 가정의 경제가 어려워 막다른 골목에 섰을 때 버려진 헌집들을 싸게 사들여 우리 부부가 틈틈이 고쳐서 되팔아 가계를 위험에서 구하는데 한 몫을 단단히 했다.

음식을 못하던 나도 할수 없는 상황에서 끙끙 앓으며 큰 행사들을 자주 치루다 보니 그런대로 교회 사모로서의 역활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우리 교인들 다수가 음식의 정통맛을 따질 정도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서툰 솜씨로 남편 목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이리뛰고 저리 뛰던 내가 백인 교회로 파송을 받은 남편을 따라 전혀 다른 식성을 지닌 교인들 속에 사모로 제 2의 목회 데뷔를 한 것이었다.

한국인 목사가 목회를 하니 그들은 직접 물어오지는 않았지만 우리들의 의식주 중 특히 먹는 것에 관해 많은 궁금증을 갖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 우리들의 매일의 식단인 밥과 국, 김치나 멸치붂음, 나물들을 그대로 보여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순수한 시골 사람들이라서 미국음식 중에도 주로 컨추리 음식을 즐겨먹었다. 그런 그들에게 처음부터 전통 식단을 소개하기 보다는 그들이 좀 알고 있는 낮익은 음식부터 소개를 해야겠다고 맘을 먹었다. 그래서 생각을 해낸 것이 볶음밥이었다.

처음 교회에 부임을 해서 한달도 못 되어서 초상이 두 집이나 생겼다. 미국 장례는 장례식 전날에는 죽은 고인을 살아 생전 모습 그대로 자연스럽고 예쁘게 평소대로 화장을 시키고 옷을 입혀서 관에 넣어 상반신 쪽만 열고 하반신 쪽은 관 뚜껑을 닫아 그 위에 장미나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을 해서 올려 놓는다. 그리고 가족 친지들에게 보여준다.

그날 저녁 그 뷔잉(고인을 보여주는 예식)이 끝나고 나면 많은 손님들이 고인의 자택으로 모여 시간을 보내다 가는데 그날 저녁을 위해 사모인 나는 음식 준비를 해 가야했다. 나는 이리저리 궁리 끝에 메뉴를 정했다. 볶음밥과 불고기에 부락클리를 넣어 익힌 것, 그리고 옥수수 빵과 과일 셀러드를 곁드려서 손님들이 도착하기 전에 부지런히 음식을 배달해 주었다. 초상난 집의 부엌에는 교인들이 한 접시씩 사랑으로 날라온 음식들로 풍성했다.

그렇게 몇번 초상을 치루고 나니 우리가 먹기에는 맛이 별로인 볶음밥이 아주 유명한 그레이스(나의 영어이름)표 음식으로 소문이 났다.

그 후로는 교회에서 큰일을 치룰 때마다 교인들이 볶음밥을 먹기 위해 참석을 하는 것이었다. 교인들이 어쩌다 병이 나서 교회를 못오면 심방을 가서 무엇이 먹고 싶냐고 물어 보면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볶음밥~~ 하는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볶음밥의 인기 때문에 내가 부엌에서 땀흘리며 움직이는 시간이 늘다보니 남편은 미안한 마음에 한마디를 하는 것이었다. ~~여보 당신의 볶음밥이 부족한 나의 목회를 도와주니 고마워…~~

음식엔 전혀 관심이 없던 내가 미국교인들에게 시원치 않은 볶음밥 메뉴로 이렇게 인기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볶음밥의 용도는 아주 다양해졌다.

 

어느날 우리 교인중에 제일 가난한 ‘캐씨’라는 아줌마가 자기 아들이 다른 주에 사는데 이미 여자와 동거를 해서 아들을 하나 낳고 살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들이 그곳의 벌이가 시원치를 않아서 부모 곁에 와서 살기를 원하는데 이곳에 오면 결혼식부터 치루어 주어야겠다는 것이었다.

‘캐씨’는 우리 교회에서 매주 토요일 오전이면 극빈자들에게 생활 필수품을 무료로 나눠 주고 있었는데, 교회에서 배급해주는 일주일 식량으로 대 식구가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육중한 체중에 기동이 어려운 깊은 병색이 역력히 보이는 사람이었고, 자식들 조차도 모두 어려운 사정에 아이들을 몇씩 낳고 살다가 이혼을 하고 각자 돈벌이를 위해 아이들을 모두 캐씨의 월세집에 맡겨놓은 상태였다.

아주 좁은 공간의 월세집에는 13살 이하의 손자들이 4명이나 같이 살아가고 있었다. 벌이도 없는 그녀였지만 모성애와 신앙심은 깊어서 핏줄들을 최대한 거두려 피 눈물나게 애쓰고 있었다. 그러한 초라하고 어려운 그녀에게 교인들은 자기들 일로 바빠서 관심도 없었다.

 

드디어 어느날 캐씨의 아들이 부인과 돐이 지난 아들을 데리고 우리에게 인사를 왔다. 그들은 그날 자신들의 결혼식을 의논을 하러 온 것이었다. 남편은 그들의 결혼식 날자를 잡고, 하루 전날인 어느 금요일 오후에 교회당에서 그들의 결혼식 예행 연습이 있었다.

그런데 그날 나가보니 참석 인원이라고는 캐씨네 식구가 전부인 것이었다. 보통 예행 연습을 하는 날에는 신랑과 신부 친구들이 모여 둘러리를 서고 신부 입장에 신랑 입장에 교회안이 들썩 들썩 시끄럽고 끝난 후에는 모두 모여 좋은 식당에 가서 잔치집 전야의 분위기로 들썩거려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날 그녀는 혼자 입장 연습을 하고 축가도 없고 끝난 후에 캐씨가 교회에서 토요일 아침에 식구들이 일주일 먹으려고 받아간 핫도그와 콩을 친교실 한쪽 귀퉁이에 차려 놓은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우리가 몇개 집어 먹으면 모자랄 형편이라 우리 부부는 핑개를 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 나는 마음 한편이 왜 그리 아프게 저며 오는지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 차를 타고 마켙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즉흥적으로 머리속에 생각나는 대로 메뉴를 짜고 시장을 봐가지고 돌아 왔다. 그리고 그 다음날 토요일 낮 결혼식 시간에 맞추어 많은 양의 볶음밥과 불고기 애그롤 그리고 그린빈과 셀러드를 부지런히 땀을 뻘뻘 흘리며 만들어 친교실에 갖다 놓았다.

드디어 결혼식이 시작이 될 시간이 되었는데 그 많은 교인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지 축하객은 모두 합해야 20명도 안되었다. 교회 반주자가 웨딩 마치를 울리자 신부가 입장을 했다. 그녀는 어디서 구했는지 하얀색의 긴 원피스를 입고 머리위의 베일은 자신이 레이스 천을 사다가 잘라서 머리에 꽂았는지 엉성한 분위기였는데 꽃도 조화를 들고 혼자서 입장을 하는 것이었다.

 

보통 신부의 입장 모습은 한손은 아빠의 손을 잡고 한손은 꽃을 들고 입장을 하는데 그녀는 양 손으로 모두 꽃을 보듬어 잡고 걸어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래도 피아노 곡에 맞춰 아주 천천히 웃으며 스텦을 맞추고 있었다. 혼자 걸어 들어오는 그녀의 미소 띄운 모습이 너무도 측은해서 똑바로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를 보면서 나의 결혼식에 아빠없이 친척 할아버지가 데리고 들어가던 슬폈던 순간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그래도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던 캐씨의 아들이 씩씩하게 마주 나가 신부의 손을 잡아주었다. 아주 초라한 결혼식이었지만 그런대로 은혜스럽게 식이 진행되어 주례사가 끝나고 식순에도 없는 축가를 남편이 강대상에서 내려와 나와 같이 그들 부부를 위해 축가를 불러 주었다.

그 전날 저녁에 급히 한국찬송가 책을 찾아서 ‘사랑’이라는 복음성가를 불러주기로 하였다. 예식 전에 반주자에게 악보를 주고 제대로 맞추어 보지도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하나님께 그들의 미래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불러주었다. 한국말로 불렀으니 그들이 알아듣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어로 번역된 악보를 복사해서 나누어 주고 가사 내용을 남편이 영어로 설명을 해주었다.

그런 해프닝 후에 우리 부부의 한국말 축가는 유명세를 타서 간곡히 부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또 축가를 한국말로 불러야만 했다. 그날 결혼식 후에 많지 않은 숫자의 하객들이 내가 해온 급히 만든 잔치 음식으로 마냥 행복해 하며 볶음밥이 더 더욱 유명해지고 있었다.

 

그들 식구는 결혼식 후에 우리부부에게 특별한 정을 주며 다가왔다. 주일 예배도 빠지는 일이 없이 식구 모두가 교회의 궂은 일에도 헌신을 했다. 그들은 일부의 교인들이 자기들에게 관심을 갖건 안 갖건 신경쓰지 않았다. 그들은 극빈자들에게 배급하는날  빵을 받으러 오는 가난하고 냄새나는 이웃들이 동양인 사모인 나를 낮설게 쳐다보며 비켜설 때 그들에게 나를 소개하며 자기들이 사랑하는 자기들의 사모 그레이스라며 자랑스럽게 소개를 하는 것이었다.

 

나의 서툰 미국 교회에서의 목회는 볶음밥이 사랑의 줄이 되어 교인들과 나를 사랑으로 연결시켜 주었다. 교회에서 만나는 교인들은 영적인 사람들이라서 목사와 사모가 그들을 향해 쏟는 사랑이 진심인지 아닌지를 말로 표현치 않아도 금새 알아차린다. 내 자식들이 육신의 자식이라면 교인들은 하나님이 맡기신 우리들의 영의 자식인 것이다. 어린아이부터 늙은 노인까지 그들은 교회안에서 늘 목회자로부터 진실하고 헌신적인 사랑을 받기를 원한다.

목회를 하면서 늘 영의 자식을 위해 헌신하고 고통받고 애쓰는 만큼 하나님은 내 육신의 자식들에게 풍성한 복으로 채워 주신다는 진리를 나는 목회의 어려움 속에서 깨달았다. 볶음밥을 볶으며 애쓴 보잘 것 없는 나의 수고가 풍성한 하나님의 축복이 되어 그 은혜로 우리 아이들이 받은 축복은 너무 커서 감히 자랑할 수가 없다. 한 순간 한 순간의 감사 찬양이 내 입술에서 흘러 나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내 영혼이 죽는 날까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모든 영광과 감사를 하나님께 돌리며,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