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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2:11-21  복음속에서의 대립

 

?오늘의 본문에는 처음으로 사도바울과 사도베드로의 복음안에서 갈등 보여주고 있읍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 게바였읍니다.

그런데 여기 바울앞에서 복음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할떄 바울은 어떻게 나오는가가 참 주목됩니다.

또한  이 복음을 젼고하게 지키기 위해서 바울은 어떻게 했는가를 오늘 배우려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의 내용을 통해서 복음이 어떻게 지켜져야 할 것이며

참된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배우려 합니다.

 

우선 갈등의 배경을 생각해보겠읍니다.

11절부터 13절까지에서,

바울과 베드로의 갈등은 베드로의 실수로 책망할 일을 스스로 만들므로 시작됩니다.

11절에서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떄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면책하였노라"

여기서 게바(아람어)는 베드로(희랍어)입니다.

바울이 게바가 하는 짓을 보니 복음적으로 벗어난 일을 해서 꾸짖었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나이로 보나 사도직으로 보나 바울에게는 감히 잡근할 수 없으리 만큼 선배의 입장에 있었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 복음을 이행하는 데는 추호도 욯서할수 없었던 바울이였읍니다.

왜냐하면 이떄 바울이 아주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라 해서 잘못된 복음을 행하는

선배 게바를 묵인 해 준다면 장차 올 세대에 이 복음이 어떻게 전해질 것인가가 더 큰 문제였던 것입니다.

 

다시, 12절에서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들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여기서 야고보는 이 당시 에루살렘에서 감독으로 있던 예수님의 동생입니다.

야고보 밑에는 바리세인 즉 유대인그리스도인들 뿐이였읍니다.

 

그래서 이들은 그리스도인이라기보다 율법주의자였다는 것을 항상 마음에 두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지만은

할례도 받아야만  하나님으로 부터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이단이였다고 말씀드렸읍니다.

 

또한 이들은 이방인은 무할례자라하여 개로 취급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보면 게바가 지금 누구와 식사를 하고 있읍니까?

무할례자들 즉 개들과 밥을 먹는 것입니다.

물론 율법주의자들의 안목에는 그렇게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접근해오니까 베드로는 이방인과 밥을 같이 먹다가 겁이 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로부터 책망을(요즘말로 왕따를 당할까봐서) 들을까봐서,,,

그래서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교제를 잠시 끊고 떠나갔읍니다.

 

그리했더니,

13절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보세요, 여기서 예수님의 수 제자인 베드로의 잘못된 행동이 다른 유대인들이나

심지어 바나바에게끼지 미친 영향을 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날 하루에 삼천명의 사람들을 거듭나게 한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바도 사람이기에 실수는 여전히 있었던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회개에는 일생에 단 한번의 회개(하나님과 화해하고 자녀가 되는 회개)가 있고

또 하나는 계속적으로 살아가는 동안에 하는 회개가 있다고 했읍니다.

우리가 언제나 성령의 지배 아래에서 살고 있지 않는 한 항상 우리가 손과 발을 씻듯이

지속적으로 행함의 죄에 대해서 회개를 해야합니다.

 

어쨋든 베드로라는 인물을 연구해보면 우리가 영적으로 배울 특유한 짐들이 많은 주님의 수제자였읍니다,

요한복음 1장 40,41과 42절을 보면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가

베드로를 데리고 예수님께 옴으로 만남이 시작됨을 봅니다.

 

그런데 이 당시 베드로의 이름은 시몬이였읍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잘 할 떄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예수님꼐서 주신 이름)야 하고 부르시고

잘 못하면 예수님은 항상 시몬(세상이름)아 하고 부르심을 봅니다.

베드로는 성경에서 보면 변화무쌍한 사나이였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라고 반석이란 뜻의 이름을 처음 만났을떄 지어준 이름이지요.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이미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계시를 주셨읍니다.

사행10장의 이야기를 보면 이달리야의 군대의 백부장인 고젤료라는 이방인을 만나

복음을 전하도록 하는 명령을 받았읍니다.

읽어보세요.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였지만 그리스도인은 아니였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똑같이 구원하실 게획을 가지고 있으시며

똑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취급하심을 알았읍니다

.

그런데 여기서 다시 차별하는 행동을 취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 집고 넘어가야할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민이라고 자처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지시하셨기 떄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길들이기 위해서는

이방인과 성별=聖別을 시킬 필요가 있었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세상것에 영향을 받지 않고 교육시키기 위해서,,,,

.

그러나 교육이 다 이루어 진 다음에는 그들을 시켜 이방인을 교육시키고 하나님을 전도하도록 명하십니다.

만약에 우리도 예수님의 성령으로 무장되지 않은 사람이 나가서 전도한다고 해 보세요,

전도는 커녕 그들로부터 오히려 세상적으로 물들어 문제를 더 만들지 않읍니까?

행 1:8절의 말씀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과

에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의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라고

성령의 권능을 받고 전도를 가도록 명령하십니다.

 

한국 교인들이 인원 늘리기에 바쁜  전도, 즉 내 교회성장만을 위한 전도를 하다보니

정작 안 믿는 분들에게 예수그리스도를 전하기는 커녕, 그 골자/내용은  온데간데 없고,

오히려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보다 더 나쁘다는 평을 안 들을 수가 없게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권능 없이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악령의 유혹에 빠져서

남의 비평을 하다 끝내기 떄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성별이 이루어져야하고 이 성별 속에서 권능을 받으면 전도를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삶을 배움도 없이 전도할 생각은 전혀 하지 마십시오.

 

전도는 범교회적이라야 합니다.

오직 안 믿는 분들께 구원의 산 길인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주 목적이라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들에게 강압적으로 내 교회로 끌어들이려고 성급해서는 안 되고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으로 상대방을 편하게 놓아 주면서

사랑의 교제를 통해 그분꼐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이해시켜주는 것입니다.

본인의 꺠달음과 자발적인 결단이 스스로 설 떄까지,,,,

 

어쨋든간에 오늘 이 사건은 역사적으로 볼 때 사도행번 10장과 15장의 이야기가 있은지 오랜후입니다.

이 두 장에서 베드로를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벽을

베드로를 통해서 완전히 무너뜨렸읍니다.

그래서 15장 9절에서 베드로가 변론하기를

"믿음으로 저희(이방인)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이방인)나 우리(유대인)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라고 증인이 되었던 그가 지금 그 복음을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베드로의 위선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더 문제는 베드로라는 사람이 예수님의 수제자인데 이분이 유대인 율법주의자 앞에서

이방인과 함꼐 행동하지 안은 척하니까 그 곳에 있던 모든 유대인 교인들이

바나바를 합하여 베드로를 따라서 이방인과 어떤 교제도 하지 않는척하고 물러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하면

주님이 무너뜨린 이방인과 유대인의 벽을 다시 세우는 장면입니다.

그떄 대쪽 같았던 바울은 참을 수가 없었읍니다.

이 사건을 묵과/간과하므로, 앞으로 올 세대에

진실한 복음을 수호하는데 있어 지대한 걸림돌이 될것을 알았던 바울은

율법이 아니라 오직예수님만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지대한 교리를 확실히 세울 필요를 느꼈던 것입니다.

 

이 베드로의 실수가 오늘의 배경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제 바울이 진정한 복음이 서도록 교정하는 작업이 시작됩니다.

비록 그는 주님의 실지 인물을 본바도 없고 만져본바도 없는 사도지만

이 잘못되어가는 복음을 보고 참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선배님들의 잘못을 책망하며 이 문제에 뛰어듭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몇가지 배워야 할 점은,

바울은 개인적인 시비를 걸기 위해서 이 문제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또 베드로의 잘못을 책망하여 그를 궁지에 넣자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였읍니다.

바울은 베드로를 유대인 교회의 기둥으로 귀히 여기는 분이였읍니다.

그러자니 그 기둥/반석이 흔들리며는 복음은 미래에 완전히 왜곡되게 전해짐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예수님의 우리의 구원을 위한 십자가상의 죽음은 헛되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진실한 예수님의 제자라면 나의 어떤 이속에서 이사람에게 전도한다고 할것이 아니라

에수님의 복음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목숨을 내놓고 수호하고 

그것이 이 복음에 아무 하자가 없는 일이라면 큰 관용을 베풀줄 아는 사람만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는 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세상사람들로부터는 좀 너무하다는 평을 받을 수도 있읍니다.

그러나  우리가 막상 하나님앞에 서는 날,

 어떤 사람은 이를 갈며 영불속으로 던져지고

어떤사람은 큰 상을 받고 하나님곁에서 영생을 누릴 것입니다

.

그러면 바올이 수호하려 했던 내용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읍니다.

 

14절 이하에서

(1) 율법주의자와 타협함으로 부터 받는 악 영향을 먼저 생각헤 봅시다. 

           베드로와 같이 율법주의자와 타협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 것인가를 먼저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그 영향권으로 부터 교회와 교인들을 지킬 의무를 느낍니다.

 

           악영향을 네 가지로 분류:

     a) 그것은 교회의 교제(Coinonia=Fellowship)를 위협합니다.

                 교회가 평등하지 못하고 어떤 교육관계나 인종관계나 생활상의 지위등등의  

                 편견을 갖는다면 이것은 복음에서 벗어난 엄청난 문제를 제기합니다.

 

          b) 15절과 16절에서 칭의(Justification)의 교리를 왜곡시키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오직 의롭다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처럼 율법 즉 할례가 구원을 받게한다라고 주장한다면

                 주님의 복음은 왜곡될 수 밖에 없읍니다.

 

          c)  17---20절의 말씀, 율법주의에 빠져 살게되면 복음적 삶을 부인하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주의 방법으로 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주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하라'한 율법은 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하지말라'한 율법은 다 해 버렸읍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듈법을 꺠뜨린 범법자들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이 율법을 배워 좋은 사람되려고 하는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 율법주의자임을 아십시오,

 

                 예수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는 이 일을 지킬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율법을 받아 들이게 되면 기독교는 단순한 도덕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교회에서 이 참복음을 선포하지 않고 율법을 가르친다면

                 그 교회는 윤리를 가르치는 도덕학교일 뿐입니다.

                 그리고 교회 나오는 것이 기쁨과 능력의 체험을 하는 장소가 아니라. \

                 괴롭고 피로한, 오히려 멍에를 더 지우는 곳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할수 없는 일을 하라하니까요.

                 그러나 정작 이 참복음속에서의 삶은 환희의 삶이요 능력의 삶이요

                 질질 끌려 다니는 삶이 아니라 자립하는 삷입니다.

 

           d) 만약 우리가 율법주의를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은혜를 무호화 시킵니다.

                

                 이것은 21절의 말씀인데 우리가 만약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이행해서 하늘나라에 간다면

                 구약에 적혀있는 그 율법을 이행해서 천당 갈 것이 왜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그 고통을 받으시고 돌아가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율법 즉 도덕을 배우는 것이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길 같지만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셔야 합니다.

 

                 다시 교회로 돌아가서 생각합시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머리로 모인 성도들입니다.

                 이 성도들이 모여서 무엇을 합니까?

                 서로 교제(코이노니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중요한 성도간의 교제를 율법주의자들 앞이라 해서 꺠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도 본질적인 것과 비 본질적인 것을 잘 구별할 줄 아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날의 교회의 양상은 잘봇된/왜곡된 본질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비본질적인 것의 다름데 대햐여 편을 가르고 소리높여 서로 싸우는 슬픈 현실입니다.

 

                 만약 비본질적인 것을 가지고 관용이 없이 비방하고 돌아다닌다면

                 저는 그 사람 거듭난 적이 없는 비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정작 본질적인 문제에는 관심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사적인 이권/욕심이 개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율법주의에 타협을 교정하지 않을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2) 칭의를 왜곡한다라고 했는데 칭의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나처럼 참 실수와 허물을 잘 범하는 사람도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라고 칭함을 받을 수가 있을까?

          이 근거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주님의 은혜 떄문입니다.

          내가 무엇이 잘나서가 아니라

         사랑이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저 주고 싶었던 은혜떄문입니다.

 

         로마서 3장 24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롤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자 되었느니라" 

        

         예! 의의 근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떄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은혜를 베푸시는데는 하나님의 방편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라고요?

         예수그리스도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라고 말씀하시지요.

         그저 예수님만 나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면 하나님은 미쁘시사 나를 의롭다고 칭하십니다.

         

         그래서 다시 롬3: 25, 26절을 읽어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떄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 안에 들어가는 순간 제일 먼저 일어나는 사건이

         하나님과 죄인인 내가 화목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에 의롭다는 칭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 안에 머물면서 하나님과 사귐을 갖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감으로

         우리는 점점 거룩하게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 2:16절의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갈 2: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3) 복음적 삶의 능력을 부인하게 됩니다.

          17절에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꼐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수 없느니라"

          방금 바울은 율법을 통한 행위로써 의롭다함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했읍니다.

          그렇다면 행함을 아무리 해 봐야 그것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없다면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읍니까?

          하고 반문하고 나올떄, 그렇다면 예수그리스도가 죄를 짓게 하시는 자냐?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대답은 결코 그럴수 없느니라 라고 하십니다.

          바올은 롬 6: 1,2절에서 더 잘 설명하십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살리오"

         

          죄에 대해서 죽은 우리, 죽은 자는 화도 없고 성질을 내지 않읍니다.

          우리가 아직도 대적한다는 것은 죽지 않아서 그렇읍니다.

          죄에 대해서 죽으시기 바랍니다.

          이 무서운 죄로부터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얻은 사람이라면

          다시 죄를 지을수가 없다고 사도 바울은 강력히 말씀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의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율법적 행함을 통해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롬 6:3절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우리가 침례받을 떄 어떻게 합니까? 물속에 들어가지요?

          왜 물속에 들어갑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동일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옛 성품의 소유자는 그리스도와 함꼐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 속에서 다시 나올떄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물에서 나올떄 새 사람으로 예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의식이 침례식인데 

          골3:3 "이는 너희는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꼐 하나님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 밖으로 나오는 순간 우리는 성령밖에 머물고

          다시 옛 성품의 소유자가 되어 사탄에게 복종하는 자연인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로 돌아갑시다.

           6:10-11에서 말씀하십니다. "그의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지어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머무를 떄만 우리의 죄는 죽어 있고 예수님의 밖에 나오면

          우리의 옛 죄성을 지닌 사람으로 돌아와

          다시 육체의 정욕에 이끌리어 살수밖에 없는, 사탄에 속하는 세상적 삶을 살게 됩니다.

 

          다시 갈라디아서 2:19로 돌아갑시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20절을 봅시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꼐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절은 바울 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고백이요 자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할려고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 안에만 살면 되는 것입니다.

 

           먼저도 말씀들인적이 있읍니다.우리는 꺠진 그릇이고 예수님은 물로 비교할수 있읍니다.

           꺠진 그릇에 물을 채우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읍니다.

           깨진 그릇을 물 속에 풍덩 집어 넣기만 하면 그 꺠진 그릇도 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있으려면 먼저 내가 예수님 안에 들어가야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4) 율법을 쫒게 되면 주님의 은혜를 무호화하게 됩니다.

           21절에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페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꼐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율법이 언듯 보기엔 참 그리스도적인 것 같지만 이것이 복음에 대해서

           가장 비본질적이라는 것을 상기 하십시오,

          

           율법으로는 어쩔수 없이 우리는 범법자일 수 밖에  없읍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흘린 피의 공로를 덧 입을떄만이 하나님의 의롭다하는 칭을 얻을수가,,,

           즉,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이루어지기 떄문입니다.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