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오랜 세월을 목회하던 지역은 싸우스 케롤라이나의 수도이면서도 발전이 다른 도시보다 더딘 한적한 시골풍의 도시이다. 이곳에는 한국의 논산 훈련소 같은 곳이 있는데 미국 전역에서 모집된 신병들이 이곳에서 몇개월 훈련받은 후에 정식 부대로 배치가 된다.

교인들 중에는 남편이 군인인 사람들이 많았는데 장교는 드물고 대부분 말단 계급부터 진급을 해서 올라가 일생을 군대 생활로 보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고등학교 졸업후에 풍족지 못한 가정 사정으로 진학은 포기하고 그래도 다른 직장보다 생활의 미래가 보장되는 군대에 들어와 정년 퇴직까지 바라보며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었다.


최근에 미국 남편과 결혼해서 들어오는 젊은 사람들은 한국에서도 배울만큼 배우고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도 많지만, 몇 십년 전에 이곳에 미국 남편을 따라 들어온 사람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참으로 기구한 운명의 팔자들이 많았다.

오래 전에 미국에 들어온 그들은 대부분 동두천이나 의정부 등 군부대 지역에서 가난한 친정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몸까지 팔며 생활하다가 남편을 만나 따라 들어온 사람들이 많았다.

세상은 참 넓고도 좁아서 그들은 이곳에서도 한국 사람을 만나 인사를 나누다가 보면 그들이 예전에 누구 밑에서 있었다느니 누구네 집에서 세를 살 때 옆방에서 있었다느니 생각지도 않은 대화가 흘러 나오는 것이었다. 현재는 교회 안에서 점잖고 신앙이 깊은 권사님으로 살아가고 있는 분이 있는데, 어느날 한국 가게에서 만난 다른 지역에서 이사해 온 낮선 아줌마의 입을 통해 그녀의 예전의 생활과 과거지사가 한 순간에 이야기 거리가 되기도 하는 것이었다.

과거가 어두웠던 그들은 학력은 없지만 마음은 누구 못지 않게 따뜻한 구석이 있어서 목회자나 사모가 조금만 사랑을 줘도 쉽게 맘의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와 친한 언니나 동생이 교회에서 반기를 들면 이성적으로 이유와 사정을 생각하지 않고 신앙을 떠나서 때를 지어 분란을 일으키고 교회를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다.

특히 분란이 일어나는 것은 그들의 사소한 개인 감정이나 교인들 간의 질투심에서 발단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그들을 교인으로 둔 교회의 목회자는 그들과 행복한 순간들도 많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기괴한 사건의 화살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날아 올 줄 모르기에 늘 긴장하면서 조심조심 언제 어디서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터질까? 조마 조마하며 하루하루를 기도 속에 보내야만 하는 것이다.

 

교인중에 미군인 남편을 따라 이곳에 와서 아들 하나를 낳고 살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녀는 아들이 어릴 때 이혼을 하고 아이와 둘이 살고 있었다. 그녀가 어느날 아침에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서는 자기가 오늘 유산을 하러 가는데 수술 후에 자신을 집에 데리고 올 사람이 없다며 담임목사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녀가 임신한 사실도 몰랐지만 당장 급하다고 하니 그녀가 수술 한다는 장소를 찾아서 갔다. 그녀가 말하는 병원은 대로변 큰 길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아주 외진 동네 뒤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밖에서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평범한 살림집 건물이었다. 간판도 없었다. 그리고 들어가는 정문과 창문에는 튼튼한 쇠 창살이 방어를 하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차에서 내려 이상한 분위기의 건물 가까이에 가서 대문의 손잡이를 잡아 당기니 문이 잠겨 있는 것이었다. 옆을 보니 초인종이 있어서 눌렀더니 안에서 기척이 들리며 누군가가 창새로 슬쩍 내다 보더니 문을 열어 주는 것이었다.

문을 열어 주는 등치가 무척 큰 흑인 아줌마가 우리에게 누구 보호자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보호자 사인을 하라며 종이를 내 밀었다. 누가 데리고 가는지를 확인을 하려 하는 것 같았다. 집안 대기실에는 몇명의 사람들이 누군가를 기다리며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으려니 목회를 하며 참으로 별데를 다 와 본다는 생각이 들며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그곳에 앉아 있는 것이 좀 창피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두커니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한참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마취에서 깨어났지만 아직도 비틀 비틀하는 그녀가 안쪽에서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우리에게 인계가 되었다. 우리는 그녀를 그녀의 집에 데려다 눕히고 그날 애 없는 산모의 미역국을 한 냄비 끓여다 산후조리를 시켰다.


그렇게 우리를 난처하게 했던 그녀가 얼마 후에 어디서 만났는지 느닷없이 한국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겠다고 설치고 다녔다. 그 남자는 일감을 따라 타지에서 이곳으로 와 잠시 머물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너무 급히 서두르지 말라 타일렀지만 그녀의 귀에는 어느 말도 들리지 않는 듯 했다. 그녀는 법원으로 달려가 혼인 신고부터 했다. 누구든 자기 남자를 건드리면 가만 두지 않을 것이라고 떠들며 자기 집으로 데려와 살기 시작했는데 한 두어 달 잘 사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그와 오래 잘 살아주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어느 주일날 예배 시작하기 직전에 그녀의 남편이 느닷없이 목사 사무실로 뛰어든 것이었다. 그는 험악한 표정으로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성전으로 향하던 목사님은 예배 시간이라 어느 권사님에게 사정 얘기를 들어보라고 부탁을 하고 성전으로 향했다. 목사님을 대신해서 그의 사정을 들은 권사님의 말로는 그는 자기 부인이 불륜을 했다며 화장실 쓰레기 통에 버려져 있던 휴지들을 모두 비닐 봉지에 쓸어 담아 교회 목사에게 자기 부인의 불륜을 알리겠다고 들고 달려 온 것이라고 했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그들의 행동에 골이 지끈지끈 아파왔다. 그것도 주일 아침에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지 머리 속이 띵하게 울리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그 권사님이 잘 타일러서 분을 삮혀 보냈다고 했다. 물론 그들은 얼마 안되어서 헤어졌지만 그녀의 이름에는 또 다른 래스트 네임이 붙었다. 이름 앞에 몇개의 성이 더 붙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당시 교회에서는 교인들 성경공부를 위해 교인들 집 집마다 돌아가면서 속회로 모였는데 성경공부가 끝난 후에 식사를 하며 친교를 했다. 그런데 교인들 중에는 별 희한한 음식을 자기 방식으로 만들어 교인들을 대접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느 교인 집에서는 떡국에 부락클리, 호박, 감자등 별 야채를 모두 넣어서 끓여 내왔다. 그런 떡국은 평생에 처음 먹어보는 것이었다.

또 목사님이 인천 출신이라서 회를 좋아한다며 정성을 다해 여러 종류의 회를 한상 잘 차렸는데 간장에다 와사비 가루를 그냥 뿌려서 내오는 것이었다. 정성은 갸륵하지만 와사비 가루가 간장 위에 둥둥 떠서 다니는 것을 보며 밥을 먹으려던 교인들이 웃느라고 정신이 없고,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일을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그 교인은 교회에 나온지는 얼마 안되었지만, 신앙 생활 중에 지난 날 맘대로 살아왔던 자신을 회개하고 새사람으로 거듭나서 신앙생활을 아름답게 하던 교인이었다. 그녀는 집사로 추천되어 집사 직분을 받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목사님은 그들에게 기도에 대해 열심히 공부를 시키고 기도의 마지막 부분에는 꼭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라고 해야 한다고 실습까지 시켰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의 속장 집에서 속회가 있었다. 속회가 시작될 때 속장이 그녀에게 “얘, 너 이제 곧 집사될텐데 네가 대표기도 해라!” 하고 대표기도를 시켰다. 다른 때는 항상 뒤로 빼던 그녀가 순순히 기도를 시작했다. 그녀는 그런대로 곧잘 기도의 서론을 잘 엮어 나갔다.

그러던 그녀가 기도의 끝맺음 부분에 가서는 입을 다문체 아무 말도 안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친구가 그녀를 툭 건드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하나님 아버지, 그럼 소인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하며 기도를 마무리 짓는 것이었다. 그 당시 사극 ‘용의 눈물’이 인기가 있어서 모두 그 비디오 테잎들을 보았는데 그 순간 그 대사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그녀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모두는 데굴데굴 굴러가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 데굴데굴 굴러가며 웃었지만 나와 남편은 같이 웃을 수가 없었다. 우리까지 같이 웃으면 혹시 시험에 들까봐 남편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고 입술을 얼마나 깨물었는지 나중에 보니 피멍이 들어 있었다.

 

정말 흔히 볼 수 없는 에피소드를 매일매일 겪으면서도 하나님이 그래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목회지를 찾아 보내셨을 거라는 소명감으로 그들과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열심히 뛰어 다녔다. 그런 목회의 전쟁터에서 위태 위태하게 하루 하루를 버틸수 있었던 것은 매일 새벽마다 기도로 대화하는 하나님과의 교통 때문이 아니었나 돌아본다. 그들과 그 어려운 13년의 세월을 함께 하루하루를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가슴에 품은 듯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주님의 은혜와 도우시는 손길이 나의 좁은 소견으로는 측량할 수 없는 신묘막측한 기적을 보이시며 하루하루 시간시간 우리와 동행하시며 늘 우리의 등뒤에 서서 계셨다. 아버지! 아버지! 나의 아버지!~~~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