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와서 한국 사람들이 조금 안정된 후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내 집을 장만하는 일이다. 한국에서 늘 좁은 땅덩어리 속에서 내 집 장만의 꿈을 목표로 하고 살아 가서들 그런지 이민자들은 이곳에 와서도 집부터 마련하느라 애를 쓴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 가족이 처음 이곳에 와서 장만한 집은 뢀리 외곽에 새로 개발되던 나무가 많은 아름다운 동네에 새집들로 들어선 예전의 캠프장이있던 자리였다. 그 동네의 분위기 그대로 우리집 주소도 켐프화이어 플레이스였다.

우리 부부가 그 동네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차로 집을 구경하며 다니다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집 앞에 붙은 세일 간판을 보고 부동산에 전화를 걸었다. 부동산 에이전트인 ‘얼-게이’라는 할아버지와 같이 완성되지도 않은 집을 둘러 본후에 우리 부부는 집을 사겠다는 결정을 하고 집을 짓고 있는 건축업자와 몇일 후에 만나서 그 집을 사기로 했다. 그리고 계약금을 걸고 여러 과정의 집 주인이 되기 위한 수속을 밟아 나갔다.

집을 짓고 있는 중에 나는 우리집 대문의 틀을 우리가 본 다른 집과 똑같이 고쳐 달라고 떼를 썼다. 그때 건축업자인 ‘헤롤드 키이쓰’(Harold Keith)는 나에게 애원하는 눈빛으로 만일 내 말대로 고쳐 놓는다면 우리집의 설계도의 이름이 바뀌어야 한다며 곤란해 했다. 하지만 그는 나의 때를 못이기고 내 의견을 따라서 다른집의 대문과 똑같이 고쳐 놓아 주었다. 그런 후에 그는 나에게 우리집의 스타일 이름이 뭔지 모르게 되었다고 하소연을 하는 것이었다.

조금 지나서 집도 거의 다 지어져 마무리 단계에 있고 이제 싸인만 하면 되는데 우리 부부가 만족하고 다니던 직장에서 생각지도 않은 일이 생겼다. 미국에 와서 늘 말로만 들어오던 레이오프(감원)를 우리 두 사람 모두 당해야 하는 현실에 직면한 것이었다. 나는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물론 6개월 정도는 실업수당이 나오겠지만 그것만 믿고 집을 덜컥 산다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를 생각할 때 불안한 마음에 선뜻 내키지를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우리가 살 집의 빌더(건축업자)인 헤롤드와 의논을 하기로 했다. 헤롤드에게 전화상으로 대충 상황을 설명했지만 그래도 어떻게 결정지어야 할지 마음이 갈등하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어느날 저녁 시간에 헤롤드를 만나기 위해 거의 완공이 되어가는 새 집 앞에 다달았다. 집 드라이브웨이에는 벌써 헤롤드의 짐 싣는 큰 트럭이 도착해 있었다. 그 집은 2층 집이었는데 앞 뒤 땅이 넉넉해서 우리 아이들이 뛰어 놀기에 편안한 나무 숲에 둘러 쌓인 아담한 집이었다.

집 문을 열고 들어서니 그들 부부는 텅빈 거실에서 서성이고 있다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집 안에서는 새 집의 냄새가 강하게 코를 자극했다. 우리 네 사람은 일단은 화이어플레이스(벽난로) 앞 카펫 위에 편안한 대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근심에 쌓인 우리 부부의 분위기를 파악한 헤롤드가 먼저 말을 꺼냈다. “~~ 어떻게 하면 좋을까? 너희는 레이오프(감원)를 당했으니 계약금을 떼이지 않고 해약을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집을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스타일을 고쳐 놓았기 때문에 이 집을 다시 다른 사람에게 팔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다시 팔려고 내놓아도 우리는 손해가 많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가 이 집을 그냥 산다면 너희들이 집을 사고 난 후에 직장을 다시 얻을 때까지 내가 너희들에게 수입이 있게끔 도움이 되어 주면은 안될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너희에게 도움이 될수 있겠냐?” 하며 말문을 여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에도 확실한 대답이 입밖으로 나오지를 않는 것이었다. 사실은 해약하기로 거의 마음을 먹고 나갔는데 그의 사정을 들어보고 그의 진솔한 제안에 어렵고 힘들더라도 그 집을 사기로 했다.

그날 저녁의 만남 이후에 헤롤드는 우리 집을 지은 빌더를 떠나서 우리 가족의 오래 전부터 사귀어 온 친구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와의 결정대로 새 집으로 이사 가는 날 헤롤드는 자기가 데리고 일하는 일꾼들과 자기의 큰 트럭을 끌고 와서는 어수선한 우리의 이삿짐을 모두 날라다 주었다.

새 집으로 이사를 하니 아이들은 자기들 방이 새로 생겼다는 기쁨에 모두들 계단을 뛰어 내리고 오르며 부산스럽게 재잘 거렸다. 하지만 우리 부부의 마음은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서니 환한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정을 붙이고 안정되게 일하던 직장을 2년 정도 잘 다니다가 우리 부부는 직장을 잃고 집에서 지내야 하는 형편으로 바뀌어 버렸다. 어두운 마음이 한 편에 깔려 있었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그동안 온 식구가 매일 매일 같이 있을 수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을 했다.

가족 그리고 그리운 친구들과 떨어져 사는 몇년 동안 우리 식구들은 많은 연단을 겪고 신앙이 많이 자라고 있었다. 나와 남편은 집에서 노는 날이 시작이 되자 제일 먼저 계획을 한 것이 금식 기도였다. 부부가 같이 금식 기도를 시작을 하니 혼자 하면서 끼니를 챙겨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어서 수월한 것 같았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최초의 금식 기도였다. 아침에 일어나 생수 한컵 마시고 아이들만 간단히 챙겨 먹여서 학교를 보낸 후 하루종일 찬양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묵상을 했다. 난생처음 굶어보는 경험인데도 배도 전혀 안고프고 가슴 한복판이 즐거움과 뜨거운 사랑으로 용솟음치며 잔잔한 고요의 바다 물결같이 신비한 평안함이 가슴 밑에 깔리는 것이었다. 삼일을 그렇게 부부가 같이 큰 은혜 속에 푹 잠겨 보냈다.

그리고 금식 기도가 끝난 그 다음날 아이들은 모두 학교에 가고 조용한 아침 시간에 누군가가 우리집 문의 벨을 누르는 것이었다. 그 시간에 모두 일들을 나갈 시간이라 방문객이 누굴까 궁금해서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 밖에는 짙은 수염이 덥수룩한 헤롤드가 듬직한 몸집으로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것이었다.

그는 들어오라는 말을 듣기도 전에 자기 집인양 저벅저벅 신발을 신은채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나의 남편에게 큰소리로 말을 했다. ~~헤이 영! 내가 너에게 좋은 일감을 갖고 왔지. 내가 새로 건축한 집 정원에 잔디 씨를 뿌리는 일인데 일주일에 몇일만 가서 일하면 되고 수입은 네가 벌던 것보다 많을거야~~

조금은 높은 톤의 목소리로 들떠 있는 그의 생각지도 않은 제안에 우리는 너무 좋아했지만, 일을 그의 맘에 들게 할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다. 그런데 헤롤드는 친절하게도 자기 소유의 땅고르고 씨 뿌리는 트랙터를 이미 우리 집 앞에 대기 시키고 남편에게 같이 나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그날 남편은 헤롤드와 함께 나가서 트랙터를 사용하는 트레이닝을 받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 주말에 토요일 아침 일찍부터 우리 다섯 식구는 소풍가는 기분으로 도시락과 물병을 들고 우리들의 일터로 향했다.

그가 새로 지은 단지는 규모가 엄청나게 넓은 타운이었다. 몇명의 다른 빌더와 함께 집들을 지어 놓았는데 거의 완성 상태로 잔디만 깔리면 마무리 되는 것이었다. 말로만 듣고 생각하던 것보다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우선 이곳 저곳에 뒹굴고 있는 조각난 벽돌들과 각목들 큰돌덩이들 쓰레기 더미들 등 그것들을 치우는 시간만도 하루종일 걸렸다. 그날 집에 돌아온 우리들은 모두의 얼굴이 술에 취한 사람들처럼 벌겋게 달구어져 있었다. 그래도 헤롤드에게 너무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일찍 큰 아이들은 학교를 가고 막내와 세 식구가 어제 정리해 놓은 집터로 향했다. 일단은 남편이 트랙터로 땅을 뒤집어 놓아주었다. 트랙터가 지나간 자리를 나는 이리저리 따라 다니며 뒤집혀진 땅속에 묻혀있는 돌멩이들을 모두 거두어 냈다. 그런 후에 남편이 땅을 평평하게 고르고 비료를 뿌리고 흙을 섞어 놓으면 나는 바켓에 씨를 담아 들고서 이리저리 뿌리고 다녔다. 그런 후에 짚으로 땅위에 뿌려 마무리를 했다. 막내딸은 엄마 아빠와 소풍나온 기분으로 점심까지 맛있게 먹으면서 즐거워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을 하면은 그 정경을 헤롤드 아저씨가 봤다면 못 마땅해 했을 것이란 생각에 미안한 맘이 든다. 경험도 없는 내가 아이까지 데리고 가서 같이 어울려 이리 저리 뿌린 씨가 잘 자랐을지 지금도 맘이 편치를 않다. 헤롤드는 한달이 지난 후에 우리가 일한 삯을 현찰로 들고 집으로 찾아 왔다.

후에 미국 생활을 하며 안 일이지만 미국에서 일한 삯을 현찰로 주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란 걸 알았다. 그는 우리에게 자기가 체크로 임금을 준다면 우리에게 나오는 실업수당이 끊어 질 수도 있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를 위해서 임금을 매우 후하게 계산해 주었다. 아마 헤롤드가 전문적인 사람을 고용해서 쓴다 해도 삯을 그렇게 많이 주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 그는 우리 가족을 도와주기로 맘을 먹었던 것 같았다.

그 후에도 우리 가족은 헤롤드의 부인인 조이스와도 친해져서 그들의 아름다운 별장에까지 초대 되었다. 그의 가족들은 스모키 마운틴 자락에 붙어 있는 작은 산을 통째로 소유하고 있었다. 그 산을 정상까지 오르려면 외길로 깎여진 산길을 겨우 차가 한대만 오를 수 있었는데, 흙길 밑으로는 깊은 낭떠러지의 계곡들이 운전대를 잡은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산 중턱쯤 오른 후에는 예전에 마을이 있던 흔적이 있었는데 길 가에는 옛날 주유소가 골동품같이 문을 닫은채 그대로 서 있었다. 산 정상에는 그 산의 전 주인이 만들었다는 제주도의 백록담 비슷한 호수가 정상에 있었는데 그들은 그 호수 주위에 산책로와 수영 시설 낚시 시설 등을 자연과 어울리게 절묘하게 잘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우리가 묶었던 집외에도 몇채의 집이 더 있었는데 그 집들은 모두 백년 이상된 집들로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산속의 집임을 실감나게 했다. 그 집안의 모든 집기들은 티스픈 하나에서 가구까지 모두 오래된 세월의 손때가 묻은 골동품들이었다.

어두움이 깔리자 헤롤드는 우리 가족을 지프차에다 싣고 산속 어디론가 조심스레 데려 갔다. 그는 시끄러운 소음의 시동을 끄고 우리들에게 조용하라 손짓으로 일렀다. 그 순간 조용해진 적막과 고요가 넓은 산을 뒤덮고 풀벌레 소리가 우리 귀에 유난히 큰 소리로 왁작거렸다. 그리고 하늘의 별들의 반짝거림이 흑빛의 어둠속의 우리들 시야로 쏱아져 들어 올 때 그는 갑자기 헤드라이트를 앞을 향하여 좍 비추었다. 그런데 그순간 우리의 시야에는 믿지 못할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졌다.

어두운 산의 정기를 뚫고 쏱아지는 눈부신 차의 헤드라이트 빛을 사슴들이 느끼지를 못하는지 그들은 동요도 없이 수 많은 떼가 웅덩이의 물을 마시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우리들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우리들의 놀라움을 헤롤드가 미리 알고 조심시킨 것이었다.

그날 밤의 아름다운 정경은 우리 아이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거리로 남았다. 헤롤드는 산속의 동물들을 위해 넓은 옥수수 밭을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많은 옥수수들을 헤롤드 가족이 먹는 것인줄 알았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이들은 산속에서 조랑말도 타고 신이 나게 놀았다.

그 산 주위에는 그 산을 지켰던 주인들의 묘가 잘 관리되어 있었다. 헤롤드가 그 산의 주인으로 정해지기까지의 과정은 많은 세월이 지나갔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주인 묘 주위에는 몇명의 부인이 같이 잠들어 있는 묘도 있었다. 그리고 야외에 설치된 퇴색하고 허물어져 가는 야외 무도회장의 모습은 부와 풍요의 허망함을 을씨년스럽게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이었다.

그날의 잊지 못할 추억으로 인해 우리 가족은 또 한번 헤롤드 부부와 그 곳에 놀러 갔었다. 그들 부부는 우리 가족에게 너무도 따뜻한 많은 사랑으로 엮인 추억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우리 가족이 켐프화이어 동네의 집에 머물며 사는 동안 그들은 우리의 어려운 사정을 때 맞춰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람들처럼 우리 가족에게 도움을 주고 정을 같이 나누는 따뜻한 이웃이었다.

헤롤드와 조이스에게는 외동딸이 있었는데 그 친 딸외에도 양아들이 세명이나 같이 살았다. 그 양아들 한명 한명은 너무도 불행한 가정의 아이들이었다. 한 아이는 친 엄마가 감옥에 복역중이라서 그애를 데리고 가끔씩 면회도 간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도 외부모에 마약 중독이나 범죄자로 아이들이 고아원에 가야만 하는 불쌍한 아이들이었다. 헤롤드 부부가 그 아이들을 동정으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키운다는 것을느낄 수가 있었다. 그 부부는 아이들에게 자신감과 떳떳함을 심어주고 있었다. 그렇게 지내는 아이들은 자기 부모의 감추고 싶은 이야기 조차도 우리들과 솔직하게 대화를 했다.

우리 가족과 친해진 털보 아저씨 헤롤드는 가끔씩 느닷없이 우리집에 들려 내가 부엌 바닥에서 큰 다라에다 김치를 버무릴 때 들어 와서는 내가 만드는 김치의 간까지 봐주고 가는 것이었다. 물론 나의 청에 안 받아 먹을순 없고 돌아가는 입가는 벌겋게 불이 붙어 있었다. 헤롤드는 나의 말도 안되는 청에도 늘 긍정적이었다.

그동안 헤롤드와 조이스가 우리 딸들에게 사랑을 듬뿍 담어 가져다 준 인형들은 아직도 아이들이 간직한채 우리 아이들의 아이들이 갖고 놀고 있다. 나는 늘 켐프화이어 집에 살며 우리 가족이 행복했던 이야기 속에는 맘좋은 털보 아저씨 헬롤드와 조이스를 빼놓고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그들에게서 받았던 따뜻하고 포근한 사랑은 인종을 떠나서 이방 나라에 와서 아이들과 살아 갈 때 낮설은 서러움을 잊게 해주는 가족의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