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님의 마지막 과제


어제 수요일 밤 예배때 목사님께서 사모님의 마지막 모습을 이야기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그 이야기는 김상길 교우의 세례식에 얽힌 이야기다.
김상길씨가 우리교회 나오기 시작한 것은 지난 3월,
피닉스에 있는 호텔 운영을 시작하면서 캘리포니아에서 이사 오셨기 때문이었다.
사모님은 처음 그분을 볼때 “저분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분이다.” 라는 확신을 가지셨다고 한다.
그래서 만나 볼 때마다 믿기를 권고하셨다한다.
그분은 캘리포니아에 자주 갈일이 생겨 오락가락 하느라 오지 않는 날이 절반은 되었다.
임철순 집사집에서 아들 추모식을 하는데 오셨지만
고기만 굽고 예배는 들어오지도 않으셔서
“예수님을 꼭 믿으셔야 합니다.”라고 했더니
“장가 들러 교회에 왔지, 예수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는 것이었다.
상처하신지 일년쯤 되셨다는데 미국에서 홀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사람은 다 알것이다.

사모님의 말씀에 인간적인 반응을 보이셨지만 이곳에 있는 날은 교회에 빠짐없이 다니기 시작하셨다.
사모님은 그떄 후로 기도 수첩에 그분의 이름을 써 놓고
빨간 줄로 몇번을 그어놓으시고 동그라미도 쳐 놓고 기도하기 시작 하셨다.
요즈음 목사님이 그 수첩을 열어 보았더니 그렇게까지 열심히 기도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호텔로 심방을 몇번 가셨지만 못만날 때가 많으셨다고 한다.
마지막 호스피스에 계실 때 하루는 그분을 꼭 좀 모시고 오라고 신신 당부를 하셨다.
그때는 복수가 많이 차서 제대로 앉아 있을 수 없었던 때였지만
그분이 오시자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앉으셨다.
“선생님은 꼭 예수님을 믿으셔야 해요.
나는 이제 언제 가야할지 모르는 사람이지만 꼭 제 말씀을 듣고 믿으셔야 해요.”
온 힘을 짜서 누누히 말씀을 하셨다
복음 제시.. 전도폭발 강사이기도 하셨지만,
처음 신학교를 다니실 떄부터 일년이면 5-6백명을 전도하시던 사모님 때문에
신현균 목사님의 교회에서 우리 목사님이 후계자로 지목되기도 하셨다는데,
목사님보다 더 많은 전도의 열정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심방을 다니셨었다고 한다.

얼마간 복음 제시의 말씀을 하시던 사모님은
너무 기운이 진하셔서 중간 대목부터는 목사님께 부탁하셨다.
사모님과 목사님의 말씀이 다 끝나자 영접하시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분은 너무나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에 “그렇게 까지 말씀하시니 그래야지요.”하시고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영접하셨다.
사모님은 그녀의 지상의 마지막 과업을 마치시고
너무나 좋아하시며 성탄절 예배 때는 꼭 그분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부탁하셨다.

그날부터 이것저것을 달라고 하시며 열심히 잡숫기 시작하셨다.
“ 내가 왜 이렇게 먹는 줄 아세요?”
누님 목사님께 물어오셔서 “이제 나으려고 먹는게지” 하셨더니
“아니예요. 세례식에 꼭 가보고 싶어서 그래요.”하고 답하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례식 날 옷을 입고 따라 나서려다
도저히 힘이 없어서 주저 앉고 말았다고 한다.
그래도 그날 얼마나 기뻐하시고 좋아하셨는지!
그리고 꼭 이틀 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고..

목사님은 훌로리다에서 목회 하실 때의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한번은 훌리마켓(벼룩시장)에 다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떄
사모님과 똑같은 응답을 각자 동시에 받았다.
교회에 오지 못하는 그들에게 “너희가 가라”는 말씀을 들었던 것이다.
그 말씀을 순종하여 18인승 밴을 타고 플리 마켓에 주일마다 가서 예배를 드리던 추억…
사모님은 이른 아침 커피를 끓이고 과자도 구워가지고 그들을 먹이셨다고…
처음 4명으로 시작했던 예배가 밴이 꽉 차고도 넘쳐 문을 열어놓고 예배를 드렸다한다.
한사람은 집사가 되고 몇사람은 세례를 받았다고….
그 추억의 이야기 끝에 목사님은 목이 메어 어쩔줄 몰라하셨다.
사모님처럼 영혼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자며 말씀을 마치셨는데
우리 모두 얼마나 감격스럽게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른다.

또한 이런 이야기를 하면 맨 뒤에 앉아서 손가락을 손에대고 하지말라고 할 것이라며
사모님의 모습을 추억하시는 목사님이 안스럽게 보이기도 하였지만,
자랑스런 사모님을 인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을 것이 틀림없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