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나훔2:2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씨를 통해 하늘의 별처럼 헤일 수 없는 후손들과 땅을 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실현시켜야만 하는 천명을 갖고 태어난 자가 바로 야곱이였던지라 야곱은 태중에서부터 그 어미 리브가를 통해 여호와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태아가 발길질하며 노는 것과 싸우는 것은 느낌부터 다를 것입니다
오죽하면 그 어미 리브가가 이런 경우에 내가 어찌할꼬라며 여호와께 물어보았을까요?
내 자식들이 어쩌다가가 아니고 자주 다툽니까?
이런 경우 어찌할꼬?라며 여호와께 나아가는 어머니는 반드시 여호와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리브가에게 이르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25:23

우리 모두는 비록 쌍둥이는 아닐지라도 선악과를 먹게 된 첫 아담의 후손인 이상 태중에서부터 두 국민,두 민족이란 숙명적인 분리로 인해끊임없는 갈등과 충돌의 본성을 갖고 태어납니다.

놀라운 것은 성경은,즉 복음은 이 자아 분리 분열 현상으로 인한 갈등과 충돌의 본성을 이기도록 해주시는 산 현장을 기록해 놓음으로 모든 세대를 걸쳐 우리를 그곳으로 초대해 주고 있습니다.

속임수와 궤계로 에서의 장자권을 도둑질한 야곱이 그가 사백명을 거느리고 오고 있다는 소식에 먼저 식구들과 가축들을 보낸 뒤 홀로 얍복강 나루터에 남게 되었을 때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하게 됩니다.

씨름을 건 자가 야곱을 이기지 못하게 됨을 보고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침으로 실제로 절게 만듭니다.

날이 새어도 야곱이 놔주지 않자 나로 가게 해달라는 말에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않으면 못보내겠다고 야곱이 답하자 생뚱맞게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주십니다.

야곱은 그 자리에서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원했던 자도 아니였을 것입니다.
허나 그 사람은 야곱에게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라는 의미있는 말씀도 연이어 들려 줍니다

어디가서 누구에게 이렇게 귀한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요? 이런 복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마음과 들을 수 있는 귀는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요?

새 이름을 받게 된 야곱은 밤새 누군지도 모른채 딩굴며 투쟁했던 그 사람의 이름이 궁금해져 갈켜 달라 하지만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냐며 대신 축복해주십니다.

자신의 이름을 묻는 야곱에게 대신 축복을 해주셨다는 것은 본인이 곧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만복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걸 은연중 밝혀주신 것입니다

그 사람의 축복을 받게 된 야곱은 이제 영안이 열려 자신의 특별한 경험을 해석하게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으나 죽지 않고 생명이 보전되었으니 그곳을 "브니엘" 이라 명명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속임수로 인해 오래도록 형을 떠난 도피 상태 속에 누적되어 온 무거운 갈등과 충돌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얍복강으로 찾아 오심으로 말미암아 화해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야곱의 회복이요 이는 곧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꺽인 가지를 다시 당신께 접붙혀 열매맺는 영광을 얻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은 경계가 분명한 땅으로 다윗이 정복한 이스라엘의 영토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 의외로 작지 않습니까?
욕심은 금물입니다
각자 주신 분량의 복에 감사하는게 곧 주신 복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작은 영토도 불순종으로 인해 빼앗겼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야곱이 장자권 훔쳤다고 장자가 됩니까?
장자권은 그저 표피일뿐입니다.
장자권안에 담긴 성격과 성분이 충만할 때
비로소 장자가 되는 것입니다.

"큰 자가 작은 자 어린 자를 섬기리라 "

이는 "큰 자는 뭇사람 끝에서 섬기는 자"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예수님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말해주 듯 야곱의 영광은 한 개인의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로 편입되는 미래적이면서도 지극히 현재적인 역사를 관통하는 초월적인 차원으로 이 영광은 한 몸된 공동체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우선이듯 나와 이웃과의 관계도 우선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곱과 이스라엘의 영광이란 내가 찾아가는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 오시는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해가 달에게 빛을 주지 아니하면 달이 빛을 발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내가 찾아가는 영광은 거의가 다 썩어질 영광일 것입니다.

나훔 당시 초강대국의 왕이였던 앗수르 왕과 니느웨는 사라졌지만 오늘날 여전히 나훔서가 유효한 것은 하나님 말씀의 영원성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앗수르로 대변된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로 되어 가기 때문입니다(계11장)

앗수르란 나라가 망한 요인으로 여호와께서는 그 나라에 마술에 능숙한 미모의 음녀가 많았다 합니다 
그 많은 음녀들이 여러 나라를 미혹하였고 그의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했으니 그 음행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래서 여호와께서 네 치마를 걷어 올려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나라들에게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뭇 민족에게 보이겠다 하십니다.

선악과 먹은 결과가 고스란히 재현됩니다
그러나 그 때는 부끄러운 곳을 영구히 가릴 수 있도록 가죽 옷을 입혀주셨는데 이제는 아예 치마를 벗겨 당사자 얼굴도 보고 여러 나라와 뭇민족들이 보며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주겠다 하십니다.

구경거리 능욕거리가 된 것입니다
만물의 찌꺼기가 된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그리스도로 인한 구경거리 능욕거리로써의 만물의 찌끼가 될 것인가? 
아니면 내 죄로 그리 될 것인가 선택해야 될 것입니다.

나훔을 통해 여호와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니느웨의 참상을 위해 누가 애가를 불러 줄 것이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 할 자를 찾을꼬?라며 아픈 마음으로 묻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훔3:7).

그리고 당신이 친히 육체가 되사 우리를 살리시려 십자가에서 치마를 벗기시며 온갖 저주와 능욕의 구경거리가 되셨습니다 

우린 왜 이 질문에 응답자가 되어야만 하는지 이사야를 통해 하신 말씀을 보면 이해가 갈 것입니다.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이사야19:24~25

아버지
남편되신 여호와와 그 말씀이 항상 살아 계심에도 우린 세상과 짝이 되여 세상의 온갖 아름답고 탐스럽고 지혜롭게 할만한 사상과 책들과 말들과 가치관을 좇아 살아 온 음녀들입니다.

니느웨와 앗수르의 음녀됨을 보이시며 우리의 음녀됨을 회개시키시는 아버지 마음을 깨닫게 하소서

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손으로 앗수르 같은 음녀를
새롭게 만들어 주시는 아버지 사랑에 항복하게 하옵소서.

용서 받을 수 없는 모든 음녀들이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용서 받을 수 있도록 복음의 그 날이 이미 하나님 나라로 여기 와있다는 것에 감사 찬송케 하옵소서.

지금은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을 받고 있는 그 날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을 당신의 말씀대로 선포하나이다.

여호와여 우리 주 하나님께선 선포된 말씀대로 행하시는 자이시기 때문입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