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이 지나면 유교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막14:1~2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이십니다.
유월절은 애굽의 종된 집에서 이스라엘이 빠져나오기 직전 이스라엘의 집 문설주에 발린 어린 양의 피를 보고 멸망의 천사가 Pass Over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것은 장차 이스라엘을 구원할 흠없는 어린 양 예수의 죽음을 예표한 것입니다 

사복음서에서 자주 언급된 "인자의 때"란 이렇듯 어린양 예수께서 죽임 당할 유월절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대제사장들과 일행들이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거듭 시도했으나 잡히지 않으셨던 것은 "인자의 때"가 안되였기 때문입니다.
마가는 바로 그 인자의 때가 코 앞에 이르렀다는 것을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는 말로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근데 예수를 죽이려는 자들이 민란이 날까봐 명절에는 죽이지 말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악간의 그 어떠한 왕들과 방백들의 권력이나 궤계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있는 자로서 당신 때에 당신 뜻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예수를 통해 이런 아버지를 알 수 있다는 것, 나아가 이런 아버지 품에서 살아 갈 수 있다는 건 말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이처럼 스스로 계시는 분이 내(우리)아버지라는 것만 한 평생 묵상해도 행복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예수님의 아버지, 곧 우리들의 아버지, 내 아버지를 묵상하면 할수록 우린 세상이나 사람들의 그 어떠함에 매이지 않고 담대하게 초연히 살 수 있게 만드는 아버지 생명을 공급받게 될 것입니다.

비록 아무런 대책이 없을지라도 그저 스스로 계시는 아버지 한 분만 믿고 신뢰하면서 살 수 있다는 확신도 생길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노력하여 취득하는게 아니라 아들 예수로 인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아버지로인해 주어지는 믿음으로 인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잡히시기 이틀 전이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십니다.
이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나드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사람들이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냐며 화를 냅니다.
또한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며 책망합니다.

가끔씩 나도 대형교회들을 생각할 때 저 건물들을 팔아서 매우 가난한 출석 교인들을 도와준 후 예수를 좇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힘 다해 여인이 향유를 예수께 쏟아 부었듯이 저들도 힘 다해 예배당 건물을 건축한 경험이 있으니 혹여 그 경험들이 각각 자기 의, 자기 공로로 고착화 된다면 그 누구라도 그 건물을 깨고 나와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드는 희귀한 야생 나드초의 딱딱한 뿌리 한 아름 짜야 겨우 한 두 방울 나오는 것으로 휘발성이 강해 단단히 밀봉해 운반한다 합니다.
당시 나드 100ml에 300데나리온으로 일년치 품삯이라 합니다

옥합을 깨 향유를 쏟아 붓는 여인과 그 쏟아지는 향유를 감당하시는 주님과의 관계를 명백히 설명해 줄 수 있는 말은 "복음"외에는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곧 복음이신 예수와 그 예수를 주로 받는 자는 둘이면서도 한 몸된 교회로 남자도 영적으론 다 그리스도의 신부요, 어린양 예수의 아내된 여인으로서의 관계속에는 늘 힘 다해 쏟아 붓는 향유가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죽음으로서 쏟아부으신 피와 물과 살보다 더한 나드 향유는 없을 것이며 그런 주님의 장례를 기념하기 위해 죽을 힘 다해 나를 부인하며 주를 좇아 온 모든 세월은 복음이 아니면 설명이 안됩니다.

예수께서는 그녀의 행동이 사람들 눈에는 허비요,미친 짓처럼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을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는 말씀으로 돌파해나가십니다.
생명이 없어 텅 빈 그녀에게 생명,성령,그리스도의 영을 주시기 위해 이제 곧 죽게 되실 분께서 하신 말씀엔 정과 육이라곤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 없는 오직 복음의 필요조건만이 있을 뿐입니다.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힘 다해 향유를 예수께 쏟아 부은 이 한 여자가 이틀 후 그가 잡혀가 십자가에서 벌거벗긴채 못박혀 죽어가는 것을 보았을 때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는 주의 말씀과 함께 그녀도 죽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왜 예수께서 그녀가 한 일이 당신께 좋은 일을 한 것이며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이라 말씀하신건지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내가 예수께 와 힘 다해 나를 쏟아 붓는 행위는 그 양상이 어떠하든 실로 예수께 좋은 일입니다.
예수께서 그런 나를 품고 율법의 요구인 저주와 사망을 그 몸으로 다 이루신 후 부활하실 때 나도 함께 살리신 것이니 이보다 더 좋은 일,복음의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께서 이 여인의 행위를 두고 당신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는 말씀에 연이여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일(미리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도 기념하게 되리라고 선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미리 장례 준비한다는게 무엇인지 모른채 복음을 전파 할 것입니다.

이 말은 장례(십자가 죽음)를 미리 준비함 없는복음(반쪽 복음)만 전파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장례 없는 죽음은 죽은 시늉만 하는 가짜 부활로 성령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끊임없이 소모와 헌신과 희생의 섬김을 요구하는 율법 아래 살게 됩니다. 
복음은 의무와 강요의 섬김이 아닙니다
복음엔 예수 생명 예수 사랑 예수 섬김이 있을뿐입니다.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함이라"롬 7:2~4

내가 율법 남편 아래 사는게 너무 고달파 아무리 다른 남편, 곧 생명과 자유를 주는 남편에게 가려 해도 법으로 묶여 있어 도무지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율법의 상징인 나무와 하나되어 죽어주심으로 율법도 그리스도의 몸과 함께 죽은 것입니다.
이는 나를 통치하고 주관하던 법적 남편으로서 군림하던 율법 남편 (전 남편)이 죽은 것으로서 이젠 얼마든지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이에게 가도 음녀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저주와 사망의 율법에서 생명과 성령의 복음으로 가려면 필히 이 여인의 힘 다해 예수께 나오는 길외에는 주어진 길이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그 길외 다른 길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입이다.

여인이 드린 나드향은 일년치 품삯으로 어쩜 오늘날 수많은 여인들이 평생을 걸려 주께 드리는 몸과 시간들과 정성들과 

물질들에 비하면 얼마든지 적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서 간과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타임이라는 것입니다.

이틀 후면 아무리 섬기고 싶어도 섬기고픈 예수께서는 더이상 육체로는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여인이 때 맞추어 쏟아 부은 행동은 실로 예수 살아 생전에 좋은 일이 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져 와 영원으로 계속 전해질 것입니다.

오늘날 성령으로 계신 예수께서도 우리가 첫 사랑를 회복시키지 않을 때 촛대를 옮기신다는 걸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차지도 뜨겁지도 아니할 때 토해내십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일 때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이 지워집니다.

주님!
옥합을 깬 여인의 행위를 물질적인 현상 세계속에만 가두려는 인식의 고리들을 복음으로 끊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