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일생동안 수 없는 만남을 갖는다.
그 중에 부모와의 만남은
그 사람의 일생의 출발이며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는 중요한 만남이다.
나는 독실한 기독교인 부모를 만났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우리나라에 복음이 처음 들어올 초기에  
주님을 뜨겁게 영접했던 분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사돈인 나의 친할아버지에게 복음을 전했고
두 분의 신앙은 날이 갈수록 견고한 믿음으로 성숙해 가셨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 말기였던 때는
일본군들이 우리나라에서 닥치는 대로 철이나 놋 등을 빼앗아 갈 때였는데
교회의 종을 떼어 내 놓으라는 일본 순사에 맞서다가
감옥에 끌려가  무수한 매를 맞으시기도 했다.
외할아버지와 친할아버지는 각각 사재를 털어 고향인 황해도에 예배당을 세웠다.
6.25동란 때는 모든 사람이 피난길에 올랐지만
몸을 숨기며 도망 다니는 목사님들을
공산당들의 눈을 피해 보호시켜 드리고 섬기시느라
또 예배당을 지키시느라고 피난을 하지 않고 그 곳에서 죽음을 맞이하셨으니...
그 분들의 딸이요 며느리였던 나의 어머니의 믿음은 산처럼 견고한 분이셨다.

어머니의 가슴 속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소원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이삭의 하나님이 되고
이삭의 하나님이 야곱의 하나님이 되듯이
신실히 믿은 할아버지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축복이
어머니에게 이어지고
어머니의 자손으로 이어지기를 소원하신 것이었다.
그러기에 딸 둘을 낳고 어렵게 얻은 아들을
주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로 온전히 드리겠다고 서원 하신 후
그 아들에게 온갖 정성을 다해 믿음의 아들로 기르시고 계셨다.
그러나 6.25 전쟁 중에 그 아들을 잃으셨다.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서 셋째 딸을 낳았고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아기를 잉태했는데
어머니는 배 안에 잉태된  생명을 축복하며
이 아이가 아들이든지  딸이든지
주님의 사역을 온전히 하는 종으로 섬기게 하겠다고 서원을 했다.
어머니는 그 서원을 주님이 받으셨다는 증표로
이 아이를 낳은 후  태의 문을 닫아주시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나는 독자이신 아버지에게 실망을 주는 네 번째 딸로
나를 낳고 저절로 단산된 어머니에게 서원의 증표인 막내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나를 향한 부모님들의 신앙교육은 철저하셨다.
성경을 읽히고, 가르치시고, 암송하게 하고...
교회 생활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방학이면 새벽기도를 데리고 다니셨다.
내가 어릴 적에는 왜 그토록 춥고 눈이 많이 왔는지...
장화를 신고 새벽기도를 나서도 장화 속으로 눈이 들어와 양말이 젖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일어나기 싫은 추운 겨울 새벽길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따라 다녔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 어느 겨울 날
어머니를 따라 새벽기도는 갔는데
다른 성도님들은 다 집으로 돌아가고 어머니만 남아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 날은  난로불이 일찍 사위어서 어머니의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너무 춥고 지루했다.
그래서 나도 기도를 했는데 그 내용은
“주님! 나는 지금 너무 춥고 지루해요.
우리 엄마의 기도를 빨리 들어 주셔서 어서 집에 가게 해 주세요.”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눈을 감고 있는 내 앞에
십자가에 매달려 피흘리시는 주님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었다.
주님의 온 몸은 채찍에 맞아 살이 터지고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눈을 떴다.
나는 기도하고 있는 엄마에게 달려가서 “엄마! 여기에 주님이 피흘리고 계셔요 .”
울면서 소리 지르는 나를 가슴에 안으시고 어머니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
“내 딸을 만나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어머니가 너무 간절히 기도하셔서 나도 다시 눈을 감고 기도했는데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던 자리에 천사들이 나팔을 불며 노래하는 것이었다.
나도 천사들을 따라서 노래를 불렀는데
입에서 이상한 발음이 쏟아져 나왔다.
그날 새벽,
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인 방언을 받은 것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교회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셔서 세운 곳이고
그 곳엔 주님이 항상 계시고
그 곳엔 천사들이 주님께 찬양하는 곳이기에
우리들도 찬양하는 곳이라는 의식이
뚜렷한 지문처럼 진하게 박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