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니라

 ~

 율법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멀어진 자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리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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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저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다면 그리스도께서 제게 주고 싶었던 "자유"는 어떠한 자유였을까?

질문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 자유를 정의해 주기 위해 역사적인 실제 인물을 등장시켜줍니다

바울안에 그리스도 예수를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는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바울에게 성경을 풀 수 있도록 지혜와 계시의 영을 부어 주시길 기뻐하시는 아버지께서는 지금도 동일하게

우리들에게 그 영을 부어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바울은 여종 하갈을 율법으로 비유했는데 그 이유는 여종 하갈은 굳이 믿음의 행위가 필요없었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그의 육체나 아브라함의 육체나 육체의 행위로도 얼마든지 생산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체로 생산된 아들은 아무리 그 씨가 아브라함의 씨일지라도 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율법을 행함으로는 자유인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율법은 자유를 줄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종의 멍에를 씌워주는 것처럼

육체 또한 자유를 줄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육체의 행위로는 아무리 율법을 지킨다해도 종을 낳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시 바울은 자유한 여자 사라를 약속(복음)으로 비유했는데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불임증에 걸린 사라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육체로는 절대 생산 불가능한 사라에게 아들을 주겠다는 여호와의 약속만큼 절대적인 것이 있었을까요?

이 말은 사라에게 자신의 절대적인 절망 상태로부터 

자유함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여호와의 약속을 믿는 길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불임증 위에 육체마저 노인인 사라가 약속을 믿어 성령의 능력으로 아들을 생산했는데 

바로 이 아들이 유업을 이을 수 있는 자유자가 된 것은 언약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잠시 사라가 왜 자유한 여자일까?를 숙고해 보는 건  

그녀가 단순히 아브라함의 정실부인이였기에 자유한 여자라고 하기엔 너무나 가난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사라는 아이를 낳지 못해 자유롭지 못한 상태로 기나긴 여정을 보냈습니다

그녀가 불임증이란 옥에 갇힌 종처럼 지낸 흔적이 곧 여종 하갈을 남편에게 주어 이스마엘을 낳게 한 것이 아닙니까?


하다면 그럼에도 왜 바울은 그녀를 자유한 여자라고 불렀을까요?

이는 사라가 여호와의 언약과 한 몸된 여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그 언약을 줌으로 불임증에 갇혀 있는 종된 사라를 자유케한 것입니다

여호와는 이렇듯 언약의 씨를 줌으로 우리를 갇히게 만든 다양한 옥으로부터 자유케하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애굽의 종되었던 이스라엘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자유케 하신 분이라는 걸 기억해야만할 것입니다


사라는 이렇게 자유케하시는 여호와의 언약(씨, 아들)을 믿음으로 

받아 그 불변의 언약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삭을 통해 지상에 나타나게 한 영광스런 여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라를 자유한 여자,위에 있는 예루살렘(새 예루살렘), 자유한 어머니로 불렀던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놀라운 것은 이 유업으로서의 "자유"는 여호와를 남편으로 갖고 있는 예루살렘보다 

남편이 없이 홀로 살던 이방을 통해 더 많이 생산되어 더 넓게 더 확산되었다는 것입니다(이사야 54:1~3)

할렐루야!


바울은 이사야 54장의 예언대로 남편 없이 홀로 살던 이방 땅인 갈라디아에서 지금 성취되는 걸 봅니다

그는 그 현장 속에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주신 말씀의 증인이 되어 

그 말씀을 소급시켜 이렇듯 다시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복음이 얼마나 구체적이며 얼마나 정교하며 얼마나 명철한지 깨닫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저도 진정 복음과 하나된 복음체로 살고 싶습니다


갈라디아교회는 마땅히 그리스도께서 주신 그 자유함의 탄성속에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데 예상 외의 그리스도로 부족해 율법을 더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바울은 율법으로 자기 몸에 흔적을 남기려하는 자들에게 

그럴바에야 아예 생식기를 잘라버리면 더 큰 흔적을 남길 수 있지 않냐고 힐문합니다


아버지!

진실로 진실로 당신께서 제게 주시고픈 유업이 "자유"라는 것에 다시한번 감격합니다

이 자유는 죄와 사망과 저주의 법이 되는 율법의 모든 정죄와 비판의 옥문을 열고 찬란한 부활의 주께로

달려가는 당신과 하나로 연합시키는 자유입니다


바울은 자기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외에는 아무 흔적도 남기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에게 남기려했던 모든 흔적들을 다 지워버린 자입니다

저도 그렇게 만드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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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1~36


펌(위키백과)


자유(自由)는 일반적으로 어떤 존재가 내부나 외부로부터 구속이나 지배를 받지 않고 하고자 하는 것을 하거나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서구 학술사의 맥락에서는 영어 리버티(liberty)와 프리덤(freedom)의 번역어로 사용되고 있다. 단정할 수는 없으나 일반적으로 liberty는 freedom과 뚜렷한 차이를 갖는다. freedom은 주로 누군가가 의지한 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이며, 누군가가 행위 할 수 있는 힘을 가짐을 말한다. 

반면 liberty는 원칙 혹은 법이 아닌 자의적인 의지로 행해지는 억압을 봉쇄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며 연루된 모든 이의 권리를 고려한다. 따라서 liberty로서의 자유는 자유를 행할 수 있는 능력(capability)을 조건으로 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권리(rights of others)에 따라 제약을 받는다.

철학적 맥락의 자유는 결정론과 대조되는 자유의지와 관계된다. 사르트르는 자유가 형벌에 가깝고, 결속·앙가주망을 참자유라 하였다. 불가에선 죽음도 자유라 하였고, 도가에선 문명과 욕망의 자유를 거부하고 자연적으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한다. 정치학에서 자유는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자격을 갖는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자유로 구성된다. 신학에서 자유는 원죄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