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다들 지겹다는 공부의 맛을 조금은 알 것 같아서
열심히 공부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좋은 성적에 대한 기대도 많았다.

그 당시 고등부를 담당하던 전도사님께서 귀에 솔깃한 말씀을 주셨다.
“여러분, 시험지를 받으면 먼저 풀지 말고 일단 기도하세요. 자기 자신만 위해서 시험 잘보게 해달라고 하면 그 기도는 안들어 주신답니다. 시험 잘 보게 해 주시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겠다고 서원하며 기도하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시험을 잘 보게 해주실 거예요.”

그 때부터 나는 “하나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하고
기도를 시작하게 되었다.
시험지를 받고 기도하거나, 밥을 먹는 식사기도를 하거나,
교회에 가서 처음 기도를 하거나 어떤 기도든지 그렇게 시작하였다.]

그 때로선 하나님의 영광이란 말뜻을 잘 몰랐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좋아 하신다니
그까짓 비위 하나 못맞춰 드리겠는가 싶었다.

다행히도 성적이 잘 나오면
하나님이 내 아부에 속으신 것 같고
하나님을 속일 정도로 나는 용의주도하다는 자만감으로 으쓱하기도 했다.
한편으론 속아주시는 하나님이 고맙기도 했다.

그런데 결국 하나님은 내 기도를 받으셨고,
그 기도에 내 맘을 싣게 하시고,
내 인생 전체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드리도록 하셨다.
내가 하나님을 속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속는 줄 아시면서도 기꺼이 속아 주신 것이다.

대학 3학년 여름방학,
내가 가입한 기독학생회 수련회가 강원도 태백 예수원에서 있었다.
첫날 그곳에 도착해서는
개신교와는 다른 성공회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어했었다.
그러나 차츰 하나님에게 집중하면서 기도에 몰입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나는 하나님께 마음에서 우러나는 서원을 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 제가 사모가 되겠습니다. 한 사람의 목회자를 바르게 돕는 사모가 되겠습니다. 이 땅에 복음이 편만하도록 전하는 목회자를 도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5년동안 잘 준비하겠습니다. 지혜를 주시고 인도하옵소서.”

기도를 마치고 나서 나는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결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아직 언니들도 결혼하지 않았는데...
게다가 나는 신학생이라곤 아는 사람도 없는데....
그래도 한편으론 다행이었다
5년동안 준비한다고 했으니 그동안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겠지.

그때부터 교회에 가면 사모님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던 모습들이 점차 이해가 되면서도
나라면 이렇게 하리라고 철없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경제적으로 어렵게 사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게 지낸 어린 시절.
그것을 2세에게 겪게 하는 일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것 겪지 않으려고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했고 그것이 눈 앞에 있는데....

나는 다시 하나님 앞에 서야 했다.
하나님께서 내 앞길을 보장해 주신다는 약속이 필요했으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앞길을 보장해 주신다는 응답대신
내가 얼마나 가난에 익숙해 있는지를 보게 하시고
나름대로 웬만한 가난에 기죽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주셨다.

대신 내가 서원한 사모의 자리에 대한 영광만을 보게 하셨다.
세상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니....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 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 : 10)”

우리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언니오빠의 사랑의 수고로 공부하고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동생이
몸도 약하고 보잘것없는(?) 신학생과 결혼하겠다니?
얼마나 많은 반대에 부딪혔는지 상상에 맡긴다.

하지만 그때의 그 서원기도대로
나는 당시 신학생이던 지금의 남편을 만나 5년 후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한 지 2달 후부터 시작된 단독목회,
27살의 새색시가 목회를 시작했으니 얼마나 벅찼을까?
중학생들만 상대하던 내가
어른들을 대상으로 관계를 맺어 가는 일이 얼마나 어렵던지.

이렇게 힘들 때 나는 자주 사모 사표를 내고 싶었다.
사모가 되면서 접었던 중학교 교사,
교사 사표내듯이 그렇게 사표를 내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누구에게 사표를 내야 하는지 늘 당황스러웠다.
남편과 이혼할 건 아닌데 남편에게 낼 수도 없고,
남편은 그래도 목회를 하겠다니 교회에 낼 수도 없고....

게다가 목사라는 사람에 대한 환상은 또 얼마나 많은지.
나는 못해도 남편은 무엇이든 잘해야 했는데
남편은 나의 환상을 채워주지 못했다.
더구나 나의 힘듦도 잘 받아주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남편을 많이 힘들게 했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내게 물으셨다.
“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하지 않았니?”

하나님은 다 속으시는 것 같았는데,
결정적일 때마다 내가 끊임없이 해 왔던 기도를 상기시키시며
네가 말했지 않았냐고, 네가 원했던 삶이 아니냐며 웃으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며?
하나님 문지기도 좋다며?

할말 없게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