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늘 그렇듯, 너무 익숙해져서
더 이상 흥미로울 것이 없던 대학 2학년 겨울 방학,
늘 그렇듯이 하루종일 엄마의 잔소리에 익숙해져 버린 나날이었다.
별로 좋을 것도 싫을 것도 없는 그런 무덤덤한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언니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나와는 사뭇 달랐다.
늘 바쁘고 피곤하다면서도
연실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그런 언니는 보면서 나는 왠지 알 수 없는 부아가 치밀었다.
“도대체 뭐가 그리 좋담?”

언니는 대학에 입학해서 바로 네비게이토라는 서클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 서클에서 언니는 성경을 공부하고 예수를 영접하였다
그 때부터 언니는 전과는 너무도 다르게 생활에 활력이 넘치기 시작했다.
입만 열면 예수님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사실 언니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몸도 약하고 성격도 예민해서
좀처럼 잘 웃거나 활발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는 언니가 힘들까봐 늘 전전긍긍하는 편이었다.
가족들 모두가 교회를 다닐 때도
언니는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교회를 멀리하곤 해서
엄마의 근심이 되기도 했었다.

그러던 언니가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표정이 밝아지고 교회에 열심히 나가게 된 것이다.
성가대며 주일학교 봉사까지 맡아 손이 열이라도 모자랄 만큼
교회 중심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전 같으면 “피곤해” 하며 누워버릴 상황에서도
어디서 힘이 나는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이었다.

언니가 이렇게 변하면 동생인 내가 좋아하고 기뻐해야 할 터인데,
나는 오히려 그런 언니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교회에 너무 빠지는 것 같아.”
초등학교 3학년부터 교회에 다니던 나였지만
언니의 변화는 왠지 낯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런 언니를 못마땅해 한 건
나의 지독한 이기주의 때문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주일이면 설거지며 청소며 엄마의 일을 도와야 하는데
언니는 그런 일은 안중에도 없이 오직 교회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런 일들이 자연스럽게 내 몫이 되어 버렸다
막내로 자란 나는 유치하게도그런 것에 화가 치밀었다.
“언니가 자기 몫을 다 하면 누가 뭐라겠어.”
나는 교회 다니다가 너무 빠지면 광신자가 된다는 친구들의 말이
바로 이런 경우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문득 언니를 설득해 볼 생각이 들었다.
말끝마다 성경을 들이대는 언니를 설득하려면
성경말씀으로만 가능하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성경에는 너무 교회만 다니지 말고
가족들을 배려하라고 말한 구절이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든 그런 구절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뒹굴어 다니던 성경을 찾았다.
어디서부터 읽어야 할까?
막막했다.
일단 신약부터 읽어보기로 했다.

초등학교 3학년 이래로 주일마다 빠지지 않고 교회를 다녔던 나였지만
성경은 늘 어려운 책이었다.
성경퀴즈게임을 위해 성경을 읽기는 했지만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이 어렵기만 했다.
아무리 읽어도 읽히기는커녕 잠만 불러오는 책이 바로 성경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의외로 성경이 읽히기 시작했다.
아니, 오히려 왜 지금까지 성경이 읽히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마태복음부터 읽어 가면서
나는 성경책에 기록된 얘기들에 흠뻑 빠져 들었다.
아주 재미있었다.

그렇게 마태복음을 다 읽고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
점점 성경에 빠져 들어가는 나를 느낄 수 있었다.
눈으로만 읽다가 펜을 찾아 밑줄을 그으며 읽게 되었다.
그러다가 누가복음 10장 38-42절의 말씀에서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거기에 바로 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의 집을 찾아오셨다.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을 잘 대접하고 싶어서 분주한데,
동생 마리아는 분주한 언니는 안중에도 없이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다.
언니 마르다는 화가 났다.
동생에게도 화가 났지만
자신이 얼마나 바쁜지 뻔히 아시는 예수님이
마리아하고만 말씀하시는 모습에 더 화가 났다.
“내 동생이 나를 돕게 해 주세요”
그 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내가 생각하는 인격적인 예수님은
“그래 마리아야. 가서 언니를 도와서 일을 끝내고 오너라.
그리고 나서 얘기를 계속하자구나“
이렇게 말씀하셔야 했다.
얼마나 인자하고 멋있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마리아가 택한 것이 좋은 것이라니!

그 순간 막혔던 눈이 열렸다.
무엇이 좋은 것인지.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아 무릎을 꿇었다.

“주님, 나도 좋은 것을 선택하겠습니다.
빼앗기지 않는 것을 선택하겠습니다.”

알 수 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기쁜 건지 슬픈 건지도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긴 했는데 방향이 틀렸다는 생각.
방향을 알게 되었다는 기쁨.
낭비된 시간들.
가슴 벅찬 기대감....

그날 그렇게 나는 예수님을 만났다.
그 이틑날 아침 눈을 뜨니 태양이 벌써 온누리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그런데 그 찬란한 아침빛은 지금까지의 것이 아니었다.
아주 찬란한 하나님의 임재 그 자체였다.
겨울의 스산한 바람소리도 어제의 바람소리가 아니었다.
그 바람소리 속에도 하나님이 임재하셨다.
정말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그 이후로 이 말씀은 늘 나를 점검하는 말씀이 되었다.
나는 지금 마리아로 살고 있는가, 마르다로 살고 있는가?
나는 지금 좋은 편을 택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예수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는가?
나는 마르다로 살아야 할 때 억울해 하지는 않는가?

사모로 사는 삶은
어쩌면 마리아적인 삶보다 마르다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 발 앞에 앉도록 뒤에서 도와주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요구받기도 한다.
그래도 나는 마리아이고 싶다.
가능한대로 마리아로 살고 싶다.
자주 예수님 발 앞에 앉기를 원한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며...

물론 마르다로 살아야 할 때도 있다.
나의 작은 섬김으로 다른 사람들이 마리아가 되도록.
그 때에도 나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려 한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로 족하느니라는 말씀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