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데전2:2

복음을 터트리면 아무리 고요하려해도,평온하려해도 생각처럼 안됩니다
복음의 정체성이요 엑기스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은 세상에  수많은 소요를 불러 일으킬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만일 내게 아무런 일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내게 복음은 있지만 전하지 않기에 나타나는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복음에 물 타서 전하고픈 유혹은 항상 내 안에 있습니다
물타서 전하면 듣는 사람들이 좋게 여기며 저항하거나 핍박할 가능성이 적어지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면 반드시 익숙한 소견들과 개념들과 충돌하며 심령 속에 내란이 일어납니다

나아가 내란의 영역도 안에서  밖으로 나와 점점 확장되어 집안과 사회와 한 나라로 번져나가게 됩니다

또한 나라와 나라끼리 민족과 민족끼리 전쟁과 난리를 몰고 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고자 하실 때 말씀의 운동력을 누가 막습니까?

계시록에 보면 흰 옷 입은 큰 무리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큰 환란에서 건짐 받은 자들입니다

결코 복음은 세상과의 화목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세상과의 전투를 말하는 것으로 그 큰 성 바벨론인 세상으로부터 나오라 하십니다

평화와 사랑과 하나를 외치는 자들을 경계해야 할 근원적인 요인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린 광명한 언어들에게 미혹당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것들과 투쟁하게 되여 있습니다

복음(성경)은 우리 입맛대로 된게 아닙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과 생각과 방향으로

우리 상식과 기대와 주장을 전복시키는 말씀들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주께서도 내가 평화를 주러 온 줄 아느냐 나는 검을 주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일차적으로 선포에 그 능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선포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음은

우리의 귀와 눈이 멀었기에 아무리 선포해도 말씀이 들리지 않고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에겐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은혜로 들리고 보여지기 시작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도 바울 같기를 사모한다면 숱한 환란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대로 증거하면 굳이 맛보지 않아도 될 고난과 시련과 온갖 비방과 저주와 욕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각오해야만 합니다

모세오경과 선지서가 아무리 이스라엘과 함께 있었어도 바울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성경의 의도대로 그리스도를 파헤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오순절 성령 강림 직후 베드로도 눈이 열려 그리스도 예수를 말함에 선지서를 근거로 증거했지만 오늘날까지 수많은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이 예수를 무너뜨리려다가 역으로 무너짐을 당하게 만드는 그리스도론을 바울만큼 성경을 통해 정립시켜 놓지는 못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선포한 복음으로 인해 숱한 환란과 비방과 매맞음과 배고픔과 파선과 고난을 받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숙명적인 불협화음이 복음이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적나라하게 표출되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것이 아닌 철저히 하나님의 것입니다
굳이 인간이 복음에 기여한게 있다면 내 반역적인 죄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것인 복음을 본질상 하나님과 불화하여 하나님께 진노의 대상일뿐인 인간과 인간 세상에 접목시킨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불가능한 일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의 죽음과 부활로 탄생시킨 교회를 시작으로 그의 사도들과 종들과 함께 기필코 완성시키십니다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베뢰아 교회
고린도 교회가 그렇고 오늘날 열방의 모든 교회가 그러합니다

비록 그 과정엔 온갖 소요와 반란과 환란과 심지여 죽음까지 점철되어 피비린내가 날지라도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기필코 해낸다는 겁니다

오죽하면 복음을 전하는 바울과 그 일행을 가리켜 "천하를 어지롭게 하는 자들"이라고 말할까요?

그것도 하나님을 알만한 율법과 성전과 성경을 지닌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제게는 가히 충격입니다
어릴 적부터 하나님을 알만한 성경과 가정과 교회 문화속에 살아 온 저도 능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 그러합니다

저도 제 입맛 따라 형상화시킨 하나님이 참 하나님인줄 알고 섬기다보면 얼마든지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나 그의 종들을 참람타하며 대적할 수 있는 무지의 소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이르기 직전 빌립보에서 당한 고난과 능욕이 있었음에도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변개하거나 약화시키지 않고 담대하게 또 전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바울의 담대함과 용기는 어디로부터오는 것일까? 묵상하고자 합니다

왜냐면 갈수록 극대치의 인본주의가 법과 때를 조작변개시키며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원적으로 법은 하나님이십니다
종종 법 앞에 사람 이름이 붙는 경우가 있음을 알면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모방의 천재인 사단은 하나님의 법을 모방하여 변개시킵니다
그 법이 어떠하면 그 나라가 어떠함입니다
우리의 자유한 법을 시기 질투하는 세력은 교회안밖으로 늘상 존재합니다
때문에 바울은 이 세력들과 엄청 싸웠습니다

또한 한 나라가 법으로 보장한 자유를 어찌해서든지 없애려한다면 그처럼 악한 정사와 권세를 대항해서도 마땅히 싸워야 합니다

빤히 듣고 보면서도 짖지 못하는 파숫꾼들은 분명 담대함과 용기가 없거나 영적 분별력과 선악간에 단단한 지각력이 없어서일 것입니다

복음은 굳이 정치에 개입하려하지 않으려해도 복음이 하나님 것인 이상 하나님을 주로 섬길 수 밖에 없는 왕과 백성이란 정치적 구도를 갖춘 정치의 원형이기도 합니다

사단은 이 신정 정치마저 모방하여 자신을 왕으로 섬기는 자들에게 천하만국을 주겠노라고 아직까지 유혹합니다

때문에 우린 주께서 가르쳐주신대로 그리스도의 왕국이, 주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이사를 주로 섬기던 당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마치 아합과 이세벨 왕국의 정치와 혼합종교와 싸웠던 엘리야를 연상케합니다

그러다 종내는 로마의 주인 가이사를 부인하고 예수를 주로 시인하여 죽임 당합니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주로 섬기지 않고 예수를 주로 섬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숱한 환란과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죽임을 당할지라도 복음을 증거한다는 건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 힘을 한 두 번 경험하는게 아니라 복음으로 일관된 일상속에서 날마다 경험하며 사는 자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그 힘의 신성함과 거룩함과 탁월함을 잘 아는 자로서 자기를 힘입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힘입어서"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데살로니가에서도 전하였다 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그 거룩하고 탁월한 힘의 극대치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의인의 부활로 나타납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힘입어 나오는 담대함과 용기는 의인의 부활에 산 소망을 둘 때 생산되는 에너지인 것입니다

실로 이런 자는 목숨이 하나 밖에 없는 것을 유감으로 여기며 복음 전함에 담대함과 용기로 충만하여 달려갈 것입니다

아버지!
제 힘의 끝엔 죽음과 연약함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제 힘의 끝자락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은혜가 온전해지는 기회라는걸 붙잡게 하옵소서
당신의 능력으로 충만하여 악한 정사와 권세를 거슬려 싸울 수 있는 용기와 담력을 주옵소서

복음을 전함으로 오는 숱한 환란을 성령의 기쁨으로 받게 하옵시며 당신의 기쁨으로 제 기쁨을 삼게 하옵소서
내 연약함과 무력함속에 복음이 더 더욱 온전히일한다는 것을 항상 의지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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