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면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증언하였노라 하니라"요한1:33~34

 

"네가 그리스도도,엘리야도,그 선지자도 아닌데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냐(요한1:25)"고 물을 때는 그들이 원하는 답을 세례요한은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떠난 이튿날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알게 된 세례요한은 자신이 왜 물세례를 베풀었는지 말해줍니다

여호와께서 물로 세례를 베풀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린 예수님을 들음으로 믿음이 생겨 내 죄를 사해주신 구주로 영접할 때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스승되셔서 진리이신 예수님을 가르쳐주심으로 예수님과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알게 됩니다

   

이렇듯 삼위 (성령,성부,성자)하나님의 영광 안에 거할 때 비로서 그간에 편린처럼,섬광처럼 경험했던 영적인 것들이 기록된 말씀을 근거로 재해석되기 시작합니다

 

증언을 하려면 필히 여호와께서 역사하시는 현장속에 있어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자기에게 일러주신 여호와의 말씀이 요단강가에서 이루어진 것을 보고 그 본 것을 다 증거합니다 

 

예수를 보지도 않고 믿게 된 우리들은 모든 성경(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증언합니다 

 

세례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이튿날 거니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때 세례요한은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서있다가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하니 두 제자가 그 말씀을 듣고 세례요한을 떠나 예수에게로 갑니다

 

세례요한은 물세례의 일인자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때문에 그만큼 물세례 베푼 자로서의 한계가 무엇인지 절감한 자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다 성령세례를 베푸실 메시야를 만났으니 물세례의 한계를 돌파하여 하나님 나라를 불같이 일으킬 수 있는 새로운 열정이 생겼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 못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의 증언을 직접 듣게 된 자기 제자 중 두 사람이 자기를 떠나가는 것이 그러합니다 

 

분신같은 제자들이 떠나가는 현상속에서 그는 신부를 취하는 자는 자신이 아니라 신랑 예수라는 것을 모든 사역자들에게 자신의 체험으로 가르쳐준 셈입니다 

세례요한은 이 때 자기 제자들을 신랑 예수께서 신부로 취하는 것을 보며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 

"와서 보라"하시니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다 합니다

 

태초에 계신 말씀이 육신으로 오셔서 자신들에게 던져준 "무엇을 구하느냐"는 말 건넴은 모든 사람들의 말건넴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딱 한번 유일하게 태초의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그 두 사람에게 던진 "말건넴"은 보석 그 이상입니다 

 

메시야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름도 설레임이지만 그분께서 먼저 자신들에게 말건넴을 시도하셨다는건 더 큰 설레임입니다

 

이에 두 사람은 머뭇거리지 않고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로 답합니다  질문에 질문으로 오가는 대화입니다  메시야께서는 당신의 질문과 자기를 따르는 자의 합일점을 "와서 보라!"는 말씀으로 조율해 주십니다 

 

메시야!

우리 중 그분과의 안면 트는 작업이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어린아이 같지 않으면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다 큰 두 사람은 그분께서 먼저 말을 건네 주시지 않았다면 좀 더 걸었을지도 모릅니다 

 

누군가 나를 따르기를 멈추지 않는 자가 있다면 혹시 이 사람이 성령세례를 베푸실 메시야를 만나고 싶어서가 아닐까?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게 주어진 책무가 참으로 크고 큽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조심히 뒤따르노라면 반드시 어떤 양상으로든 당신 집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말건넴을 듣게 됩니다 

 

당신의 말건넴에 정답이 아닌 각자 수준대로 반응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어떠한 반응을 보이든 그분께선 우리를 끌고 가시며 우리의 마음과 귀를 열어주십니다

 

본디 무지한 나인지라 무지한 말을 할지라도 설령 살다 지쳐 향방없는 욕지거리를 한다 해도 그분께선 당신의 말건넴에 자존심을 걸고 당신 뜻대로 끌고 가십니다~^^

그 과정속에 절대 주권자를 진리로 알게 되여 자유케됩니다  생각에 절대 주권자와 함께 가면 오히려 자유가 구속당할 것 같은데 그 반대입니다

진리 되신 그 분을 알아갈수록 절대 인격자라는 것도 알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메시야는 멋진 동네 멋진 주택 소유자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메시야께서는 그런 것에 연연치 않으심을  그분의 집에 가서 느꼈을 것입니다

환경이 그를 압도하거나 우러러 보게 만드는게 아니라 당신이 모든 것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가서에서 신랑은 신부에게 레바논에서부터 헤르몬 꼭개기까지 함께 가서 사자 굴과 표범산을 내려다 보아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복음에서 신랑은 신부될 두 사람에게 물세례 베풀던 요단강가에서부터 나사렛 집까지 함께 가자 하십니다   장차 겟세마네 동산까지 함께 데리고 가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보라>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요한1:39

 

우린 그분이 "오라"하시지 않으면 "갈 수 없고","보라"하시지 않으면 "볼 수 없고"," 함께 거하자"하시지 않으면 "함께 거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솔직히 저는 이렇게 쓰기만 해도 말할 수 없는 영광을 느낍니다  그와 저와의 어마무시한 격차를 알기 때문입니다 

 

메시야 집에 가서 집을 보고 메시야와 함께 머물다 보니 바깥 세상은 오간데 없을 정도로 그분께 푹 빠져있다 정신차리니 시간개념이 돌아 온 것 같습니다   때가 열시쯤 되었다 합니다  

 

안드레가  형제 시몬을 찾아 메시야를 만났다며 예수께로 데려오니 그를 보시고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베드로/반석)"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재의 나를 장래의 영광으로 보시며 새이름을 주십니다(계시록2:17)

신랑은 술람미 여인이 미흡할 때부터 어여쁜 자야내 신부야  하나 밖에 없는 완전한 자야 내 사랑이라고 부르심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예수를 만난 빌립도 나다나엘을 찾아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 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는 나다니엘의 말에  빌립은 지지 않고 "와서 보라"합니다

벌써 빌립은 예수님처럼 말합니다~^^

 

나다니엘이 오는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그를 가리켜 "보라!"고 선포하십니다.  무엇을 보라는 것일까 잔뜩 기대감을 갖게 됩니다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음"을 보라하십니다 

성경은, 보지 말 것과 볼 것을 구별시켜주십니다. 곧 먹을 것과 먹지 말 것을 구별시켜주십니다 

 

빌립이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가 그분이라고 밝혔을때 나다니엘은 자신의 속내를 감추지 않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반문한 사람입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했을 때 그는 반가움 대신 나사렛이란 비천한 현실을 직시합니다

 

그러나 메시야는 약육강식의 냉혹한 제물이 되어 헐벗고 굶주리며 눈물이 마를 날 없는 그러한 곳에 풍성한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이란 새이름을 갖게 된 야곱은 형 에서의 동의 아래 장자권을 취했지만 그 수법이 간사했습니다  겉과 속이 달랐습니다 

 

그에 비해 나다니엘은 진지했던 것 같습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는 반문은 오히려 그가 메시야를 대망함에 매우 심사숙고했다는 반증이라 볼 수 있습니다 

 

"어떻해 나를 아시나이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저는 이 장면에서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셨음에도 육체란 질그릇이 결코 막을 수 없는 충만한 신성을 보게 됩니다 

나다니엘도 자기를 압도하는 신성 앞에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이란 고백은 이스라엘이 임금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처럼 사람을 왕으로 구한 결과 풍전등화의 역사를 거쳐오면서 뼈속 깊이 새겨진 고백일 것입니다

 

나다니엘의 고백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주십니다

언제나 그분께서는 우리를 성장/성숙시키심에 현재의 앎 그 이상으로 인도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일뿐더러 온 세계도 이스라엘의 임금이라는 것을 보게 될 때 이스라엘은 자기들만의 임금으로만 제한시켰던 죄악을 회개할 것입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한1:50~51

 

이제 마악 공생애 사역에 진입하신 예수께서 앞으로 펼치실 일들은 온 이스라엘을 놀래키는 일입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기적과 표적과 기사보다 더 본질적인 주님의 십자가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로서 인자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살아나시고 승천하사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으심으로 이스라엘만이 아닌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께로 가는 하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천사도 고난 당하신 주님의 신비를 알고파 오르락 내리락하며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어찌 전하는지 보면서 함께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도록 함께 일합니다 

 

아버지!

원하건대 주는 이제 또 우리들의 죄악으로 인해 막힌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소서

우리가 우리의 수치된 죄악을 회개하오니 오셔서 주 앞에서 코로나를 불이 섶을 사르듯이 성령의 불로 소멸시키사 연약한 인생들이 사는 지구를 정화시켜 주소서

또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진멸시키시든지 회개케 하사 주의 원수들도 주의 이름을 알게 하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