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은 왕이 없어 각자 자기 소견대로 살았던 사사시대에서 왕정시대란 

새 시대를 여는데 쓰임받게 된 불임녀 한나의 격동됨으로 시작합니다

 

한나는 레위 지파로 에브라임 산지에서 살게 된 엘가나의 아내였으나 잉태치 못합니다 

반면 엘가나의 다른 부인인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었습니다. 레위인 엘가나는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 여호와의 법궤가 있는 실로에 올라와서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드렸다 합니다

이 때 여호와의 대제사장 엘리와 그의 두 아들(홉니와 비느하스)이 제사장으로 있었습니다 

 

엘가나가 제사 드리는 날에는 제사장과 제사드리는 자가 함께 먹을 수 있는 화목제물의 분깃을 

브닌나와 그의 모든 자녀에게 주고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었는데 이유인즉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불임녀 한나를 위한 올바른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매년 이러하니 이것을 보다 못한 브닌나가 불임녀 한나를 격동시킵니다.

 

한 사오년전인가 누군가 저에게 "할머니도 못되었으면서..."라며 말꼬리를 흐리는데 

그 때 기분은 생전 느껴보지 못한 낯선 감정이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억센 손이 견고한 나무를 땅에서 뿌리채 뽑아내려고 힘껏 밀치고 당길 때 

나뭇잎들이 떨어지는 기분이였습니다

허나 이내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히5:15)"는 말씀이 떠오르며 

그런 낯선 감정도 안개처럼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런데 브닌나는 한나가 낳은 자식의 어떠함이 아닌 아예 자식을 낳지 못함을 놓고 격동시킵니다

화목제물을 드렸으나 화목한 마음이 아닌 격한 분노에 휩싸이게 되는 한나는 자신을 일컬어 마음이 슬픈 자라합니다.

그 슬픔은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며 말할정도로 

남편의 열정적인 사랑에도 씻겨 지지 않는 슬픔입니다.

만일 한나에게 자식 낳아 의기양양한 브닌나도 없고 따라서 그녀의 격동시킴도 없었다면 

엘가나 사랑 하나로 족하게 살았을까요?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없음으로 인해 한하며 슬퍼하기보담은 아예 포기,체념하고 

자신의 있음에 눈을 돌려 그것을 바탕으로 감사히 사는게 짧은 인생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나는 그게 안됩니다.남편 엘가나를 닮은 자식들을 

낳은 권세로 옷입은 브닌나와 한 지붕 아래서 살자니 괴롭습니다 

브닌나는 자식을 잘 낳았음에도 불임녀 한나에게 빼앗긴 남편 사랑에 격동되어 오만한 말과 

시기 질투로 들끓는 분노의 흙탕물을 한나에게 쏟아 붓는데 그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한나는 자신이 한스럽습니다

 

근데 성경은 이런 상황으로 몰아부치신 분이 여호와라 하시니 만일 성경을 읽지 않으면 어찌 알리요!

우리의 눈과 귀로 우리 상황을 보고 듣지 않도록 여호와께서 보시는 것은 무엇이고 들으시는 것은 무엇인지 

말씀을 통해 알기 원합니다.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니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삼상1:5~6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

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3:15~16

 

창3:16절에 여자를 결과적으로 여자의 후손을 낳은 여자로 본다면 사라, 다말,룻,밧세바,마리아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녀들에게 임신은 쉬운 것이 아니였습니다. 임신하는 고통,곧 임신하기까지 삶의 여종이 고통스러웠습니다 . 

마리아는 자기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고통스러운 임신을 하였습니다.

이 여인들에게는 육신의 남편 저너머 모든 인류의 남편되신 하나님을 사모하며 그분의 다스림에

순복하며 산 여인들입니다.

 

한나의 고통이 사사시대에서 왕정시대를 열게 하는 아들 사무엘을 잉태하기 위한 고통이였다면 

오늘날 교회들이 겪는 고통은 무엇을 임신하기 위한 고통일까요?

코로나의 고통속에 부르짖지 않으면 임신할 수 없는 생명은 어떠한 생명일 것인가?

모든  피조물들이 허무한 줄 알면서도 굴복케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이 썩어짐의 세상 권력에 종노릇하는 

현 상황은 분명 교회가 원통함으로 격동되어 통곡해야 될 때입니다.

 

사사시대에서 새 시대로서의 왕정시대를 잉태하기 위한 고통에 

격동되었던 한나는 불임의 한계를 여호와 앞에 나아가 울부짖음으로서 응답을 받습니다

처럼,오늘날 교회들은 이 팬데믹 코로나 고통속에서 메시야 왕국 시대을 열게 하는 

온전한 교회를 잉태케 해달라고 부르짖어야 할 것입니다.

 

메시야 왕국은 그야말로 온전히 바쳐진 나실인들로 구성된 왕국입니다. 

그런데 한나는 바로 그런 나실인으로 여호와께 드리겠으니 아들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한나는 분명 나실인 삼손 이야기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실인에게 주어진 금기 사항을 지키는게 얼마나 힘들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는 나실인 없이 이스라엘은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합니다.메시야 왕국은 여호와께 온전히 드려진

나실인들 없이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를 깨달은 자들은 경건한 후손들과 본인들이 속한 교회들이 

온전한 교회로 거듭날 수 있도록 울부짖게 되어 있습니다

 

브닌나는 대충 사랑해주어도 임신하는데 왜 한나는 열 아들보다 더 끔찍히 사랑해줘도 임신을 못하는 것일까? 

진작에 이 제사장 가문으로서의 레위지파 엘가나가 알아차렸다면 한나에게 화목제물의 분깃을 

갑절로 주어 화목 대신 불화를 조성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여호와 앞에 나아가 잉태치 못하는 자신과 한나를 위한 대속제물을 드린 후 

회개하며 자신과 한나에게 생명 줄 것을 한나를 대신한 제사장으로서중보기도를 해주었을 것입니다

남편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자기가 아내 위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성경은 남편과 아내를 한 몸으로 다스리는 여호와를 증거합니다.

 

레위 자손 엘가나가 이러하니 한나가 그 시대적인 한계를 뛰어 너머갑니다.

곧 실로 성막에 나아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 대수라고?생각하면 율법의 엄함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율법은 제사장외 성소문을 열고 기웃거리기만해도 죽임당할뿐더러 

당시 평민들의 모든 제사와 기도는 장차 오실 예수의 모형인 제사장의 중보 아래 가능합니다.

물론 뜨락에서의 기도는 가능할 것입니다.허나 한나는 여자임에도 여호와의 전 가까이에서 기도드린 것 같습니다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그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더라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며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1:9~11

 

신약시대는 아무라도 예수 이름으로 기도함에 익숙한 나머지 

예수께서 우리로하여금 아버지께 직접 나아가 기도할 수 있게 해준 은혜을 소홀히 생각해버립니다

십자가의 예수는 탕감뿐만이 아니라 하늘보좌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을 운송해 주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한1:51

 

유일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열려진 하늘 보좌에 계신 아버지께 대제사장 예수 이름으로 구하면 

하나님의 사자(천사)들이 응답코자 구원 받을 후사들을 위해  오르락 내리락거리며 수종드는 것입니다.

 

처음엔 통곡기도였으나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는 걸 보게 됩니다

엘리가 여인이 기도하는 동안 뭘했는지 왜 이렇게 상세히 기록해 놓았을까 싶습니다. 무언가 경고하기 

위해서 일까요? 여인이 여호와 앞에 기도하면 제사장으로서 의자에서 내려와 함께 기도해주면 안될까요?

사사시대의 극심한 타락을 놓고 기도할게 오죽이나 많았을까 싶은데 기도하는 여인의 입을 왜그리 주목하여 

쳐다봅니까? 결국 엘리는 헛다리 짚고  "나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에 여호와 앞에 심정을 통한 것"이라는 

한나의 말에 의례적인 말을 줍니다

 

"엘리가 대답하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삼상1:17

 

남편이 레위지파요 제사장 가문인 한나는 대제사장 엘리를 

여호와와 사람 사이를 중보해주는 역활,통로로 쓰임 받는 자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 사람도 스스로 그 자리에 있고 싶어서 있는게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리 하셨음을 알기에 한나는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삼상1:18a)"라고 말할 수 있는 믿음을 

이제껏 오랫동안 기도 드린 여호와로부터 선물로 받습니다.

 

여호와께서 주신 선물로서의 믿음이 아니라면 어찌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심이 없더라(삼상1:18 b)"고 기록할 수 있었을까요?

 

이십년 전 한 일년여 동안 본교회 주일 성수하기 위해 왕복 4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를 오가며 

한나를 많이 생각하게 되였는데, 그것은 겨우 일 년에 두 서너 번 실로성소에 가서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 앞에 자기 마음을 쏟아 붓는 것만으로도 얼굴에 수심 없이 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예배를 드리고도 수심 가득한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여호와께서 보시는 건 사사시대의 패역함보다는 여호와 앞에 나와 기도로 토해내는 한 여인을 보십니다 . 

그리고 여호와께서 듣는 것은 여호와께서 잉태케하면 나실인으로 드리겠다며 서원하는 내용입니다.

 

우린 소돔 고모라가 동성애와 죄악때문에 망한 줄 알지만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망했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도 여호와께서는 고통 당하는 자들을 보시며 그들과 그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의인들의 말을 들으십니다 . 

그리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 일을 행하십니다

 

아버지!

당신께선 상한 갈대 같은 나라와 교회와 인생들을  꺾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은  많은 죄로 깊은 수렁에 빠져들어가고 있었으나 아버지께서는 

고통스러운 한 여인이 당신 전에 나와 기도하는 것을 보시고,들으시고 새 시대를 잉태시켰나이다

 

아버지!

당신은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시며 우리들의 패역함에도 쇠하시거나 낙담치 아니하시나이다.

오히려 이런 세상에 십자가의 정의를 세우셨사오니 팬데믹 코로나로 섬처럼 갇히게 된 모든 성도들이 

십자가의 교훈을 앙망하며 부르짖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