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못 볼 줄만 알았는데 "죽은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죽기 전에 하신

말씀의 강력이 무덤 속에 누운 시체를 썩지 않도록 부활케 하사 다시 보게 된 제자들의 큰 기쁨을 생각해봅니다 

 

그러면서도 부활의 주께서 부활 이전의 육체로 돌아가 다시 예전처럼 함께 자고 먹고 마시며

구름에 달 가듯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니며 하나님 나라를 전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살짝 있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허나 이젠 정말 주께서 말씀하신대로 아버지께로 가실 수 있도록 보내 드릴 각오도

하지만 아직 뭔지 모르게 가닥이 잡히지 않는 제자들이 갈릴리로 가서 고기를 잡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 요한21 : 1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니엘과 세배대의 아들들과 제자 둘이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말하는 베드로를 좇아 함께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합니다 (요21:2~3) 

 

한 때 우리는 베드로의 믿음이 약해져서 다시 고기 잡으러 간거라고

남 말하듯 했지만 살아보니 모든게 그분의 섭리였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예수와 함께 그분의 공생애 사역 현장에서 함께 살 때는 사람들이 주께 드리는 헌물로 먹고

살았지만 공동체의 머리되신 예수께서 아버지 보좌로 가신다 하시니 예전처럼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쩜 이 작은 무리들의 가야할 바를 놓고 베드로만큼 고민한 제자도 없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헤어지지 않고 다 함께 먹고 살며 주군의 말씀대로 살아갈 방도를 고민하지 않았다면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만큼 우린 밥도 먹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성경은 베드로가 다시 갈릴리로 가서 고기 잡게 된것을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만날 것을 말씀하셨다고 증거합니다.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리라 하거늘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마28:7~10

 

여자들이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하신 말씀을 분명히 전했다면 저들의 현재 방향은 갈릴리입니다. 

부활의 주께서 제자들과 다시 만남의 장소를 갈릴리로 설정할 수 밖에 없는 것 

또한 구약의 말씀을 온전히 실현하기 위함입니다.

 

요한은 갈릴리를 디베랴 호수라 기록합니다. 갈릴리의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14년~37년)를 위하여 갈릴리 연안 남서쪽에 디베랴 도시를 세웁니다.

 

따라서 로마인들은 갈릴리 바다를 디베랴 호수라 불렀다합니다.<이방의 갈릴리>가 된거라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세계를 정복한 로마의 막강한 힘아래 헐덕거리는 갈릴리의 숨결을 생각하노라니 다시 또 눈물이 차오릅니다

 

가난한 이들과 애통하는 이들과 억압하면 억압당할수 밖에 없는 

온유한 이들과 함께 모여 기도하며 울어 보지 못한 시간들이 너무나 많아 주님께 회개합니다 

 

어제 작은 딸이 십 년 전에 코로나 팬데믹 현상이 올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 주셨는데도 바로 몇 주전에야 비로서 깨달았다며 펑펑 우는 것이였습니다. 

만일 십 년전에 그 때 깨달았다면 코로나 팬데믹 현상으로 겪게 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보호 요청기도를 십 년동안 쌓아 놓을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했으니 어찌 울지 않겠습니까?

 

우린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 마음과 함께 하고 있습니까?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해변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사9:1~4 

 

부활의 주께서 갈릴리에 먼저 오셔서 숯불도 피워놓고 떡을 만들어 구우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당신의 제자들이 대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욕망 아래 무거운 멍에를 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은

백성들을 당신처럼 사랑하며 섬길 수 있는 사람 낛는 어부가 되는 꿈을 꾸고 계셨을까요?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요한21:4

 

만일 제자들이 내가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에 가있을거라는 말씀을 가슴 속에 품고 있었다면 

울 주님께서 분명 이곳 어딘가에 계실 것이라며 찾아 다녔을까요?

혹은 만일 분명 여기 계시니 이제 곧 만날 수 있을거라며 내내 기다림으로 

가득찬 시선이었다면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요? 아쉽지만 날이 새어갈 때에 바닷가에 서계시는데도 모릅니다.

근데 주님께서는 우리가 모른다고 당신 일을 접고 사라지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으로 연약한 우리를 위로해주십니다 말씀 붙잡고 그 말씀이 언제나 응할래나 간절히 사모하는 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요한21:5~7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부활의 주님을 몇 번 만났기에 그 목소리를 기억할만도한데 아직도 모릅니다. 

그런데 밤새 아무 것도 잡지 못한 빈 가슴에 떨어지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는 말씀에 붙들려 그물을 던지니 그물을 들 수 없도록 고기가 잡힙니다.

 

자신의 의지가 미처 작동하기전에 마음과 손발이 움직여질 때가 있습니다. 

말씀에 붙들려,성령에 붙들리면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를 의식하든,안하든,우리들의 삶의 바닷가에 서계시든 안계시든 그분의 임재를

느끼든 못느끼든 그분께서 주신 성령님과 함께 양날이 선 말씀에 붙들려 마음과 몸이 복종하길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이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라 하니 겉옷을 두른 후 바다로 뛰어듭니다.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예수가 아니면 이제는 그 누구를 보아도 두 번 다시 뛰지 않을 심장이 

다시 또 뛰기 시작합니다. 그 누구를 보아도 뛰지 않던 심장이 말씀을 뵈오면 마구 뜁니다.

 

여기서 고기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사람이 낛이는 것은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게 아니라 성령과 말씀에 붙들려 살 때 성령과 말씀이 일하사 성령과 말씀이 사람을 낛습니다. 

세미한 음성이지만 분명한 말씀을 주실 때도 계시고 날마다 먹는 음식처럼 날마다 기록된 말씀으로 

들려주시는 하늘 만나를 먹다보면 나 자신부터 말씀의 그물 안으로 걸리는 걸 봅니다.

 

자신이 주께 낛인 상태가 될 때 사람 낛는 어부가 될 것입니다.

겉옷을 두른 후 예수께로 달려가는 베드로에게서 장차 진리의 겉옷을 입은 상태로 살아갈 모습이 보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요한21:4~11

 

오십 칸은 약 백미터로 추정됩니다.저분이 저렇게 살아 계시기만 한다면 그곳이 어디든 지구 끝까지라도 좇아갈

베드로의 육중한 추진력은 마침내 하늘 보좌에 계신 주께 가기 위해 거꾸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나셔야 해후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와보니 숯불이 타오릅니다. 숯불쬐다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의 

숯불 트라우마를 치유해 주시지 않으면 부활의 주께서도 편히 아버지께로 가실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께서 지금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 하자 베드로가 가서 그물을 육지로 끌어 내어 세니 

153개의 물고기를 카운트하게 만듭니다. 몇 마리 일까? 굳이 세도록 예수께서 인도하셨다고 봐도 괜챦을 것입니다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나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숫자값153)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겔47:10a 

 

예수께서는 처음에 베드로를 부르실 때에 사람 낛는 어부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베드로외 다른 제자들을 사람 낛는 어부로 세우십니다. 

그리하여 이 갈릴리 바닷가에서부터 세상 끝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미 물고기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어찌 베드로가 그 때 그 순간의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물고기가 잡혔던 것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가 주신 단 한번의 찬란했던 영광만으로도 

얼마든지 견디며 살아갈 수 있는 신성함이 잠재해 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외 그 기적을 본 여러 사람들도 있었으나 유독 베드로만이 그런 고백을 한 걸 보면 확실히 그는 달랐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요한21:12~14

 

다 큰 사람들 조반을 챙겨주시는 울 주님 바쁘십니다. 떡과 생선이 있는 숯불 위로 가셔서 떡도 가져다가 

제자들을 주시고 또 가셔서 생선을 가져다 주십니다. 일상 속에 음식 나눔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밤새 고기 잡느라 허기진 제자들을 먹이신 후 베드로에게 질문의 말씀을 세 번 들려 주십니다 

 

1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그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2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그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치라"

3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요한21:15~17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주를 먹을 수 없고 주를 먹지 못하면 양을 먹일 수 없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거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한21:18~19

 

여기서 말하는 젊고 늙음은 미성숙과 성숙으로 봐도 좋을 것입니다. 성숙할수록 진리의 띠를 몸에서 풀지 못합니다.

오히려 진리의 띠가 몸이 되니 진리가 끄는대로 몸이 끌려갑니다.

최종적으로 이 진리의 띠는 죽음을 거쳐 부활의 주께서 가신 아버지 보좌로 인도합니다

이로써 성도에게 죽음만한 영광은 없을진저!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 품에 의지하여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요한21:20~22

 

베드로가 요한의 미래는 어떤지 주께 묻자 울 주님의 유머에 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는 말씀은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 없느니라"고 세족식때 제 발은 못씻을거라며 버팅기던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을 생각나게 만듭니다 

베드로야! 너는 나하고만 상관하면 되느니라~^^ 너는 나만 따르면 되느니라. 

 

주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베드로가 숯불 앞에서 세 번 주를 부인한 것을,

세 번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음으로서 세 번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말하게 만드십니다.

말로 범죄한 것을 말로 상쇄시켜주심으로서 사단이 틈타지 못하게 차단시켜 주신 후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그렇게 주를 부인함은 삼 년반 동안 주를 따른 것도 부인한 셈이니 부활의 주께서는 기여이 세 번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하게 하신 후 다시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시는 의례로서 "너는 나를 따르라!"고 

다른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명하십니다.

 

이렇게 다른 제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해주심은 두 번 다시 베드로의 트라우마가 다른 제자들에게도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려함이십니다

 

울 주님께선 영계와 인간계도 다 아시는 분이시기에 미궁에 빠졌던 베드로를 

이런 수순으로 다시 제자궤도에 올려 놓으십니다. 이런 주를 어찌 아니 사랑할 것인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