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쿠오바디스)"요한13:36a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뭔지 알 것 같다가도 도무지 알 수 없을지라도, 

가룟유다처럼 예수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있는 제자들 중 베드로가 그 유명한 질문을 합니다 

 

다른 말씀들이야 이해가 잘 안되어도 주만 나를 내쫓지 않는다면 죽는 날까지 주만 졸졸 따라만 다녀도 

행복했을 사나이 베드로의 쿠오바디스란 질문은 사실 서운함과 슬픔에 가득찬 질문입니다 

 

왜냐면 베드로의 이 질문은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요한13:33b)"는 

주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과의 엄청난 수준차가 오히려 자신들보다 훨씬 능하신 주시라는 것에 전 인생을 다 맡겨도 좋을만한 

신뢰감과 존경심을 더해줄 뿐이고, 그런 분을 사랑할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게 행복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 작은 자들이 예수를 사랑할 수 있는건 그분께서 사랑할 수 있는 길(허락)을 터주셨고, 

그것을 전제로 자기 사람으로 먼저 선택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영과 지혜와 지식과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여호와 경외의 영으로 충만한 당신 생명을 세상영들,영악,사특,

교만,열등,무지,미련으로 충만한 죄인들에게 각각 자기 영광을 분배해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찢겨 죽으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충분히 아시기에 우선적으로 그를 위로하며 안심시킬 수 있도록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요한13:36 b)"고 답해주십니다.

 

주께서도 우리에게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말씀하셨다면 우리들끼리야 어떠해야 할까 생각봐야 할 것입니다. 

종교권력자일수록, 율법적인 권위자일수록 적당선 긋기에 노련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장을 제한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또 묻습니다.

이렇듯 또 묻는 베드로를 생각하면 한 시라도 엄마를 떨어져서는 살 수 없는 아기를 보는 것 같습니다.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한13:37

 

아기는 엄마가 자기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려면 밖에 나가서 일을 해야 해야만 한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설명해 주어도 눈만 멀뚱멀뚱,그러나 더욱 더 반짝입니다.

 

일하러 가면서 아기를 얼마동안 탁아소에  맡기려 할 때 아기는 엄마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크게 울어댑니다. 

그래도 엄마는 아기를 위해서 우는 아기를 떼놓고 일터로 갑니다.

 

이 십 일년 전 끝모를 바닥을 칠 때 제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 것은 세 아이들이였습니다. 

엄마가 정신줄 놓으면 세 아이들이 어찌살꼬 싶을수록 없던 힘이 생겨나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남보기에는 버젓이 집도 있고 사업체도 있는데 빚은 쌓여가고 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도 아침마다 눈뜨면 영안으로 보이는 것이 제비조차 날아서 넘어 가지 못한다는 

파촉령 같은 험산준령이였습니다 

 

그때마다 세 아이를 생각하면 한 걸음씩 올라갈 수 있는 힘이 주어졌던 것을 아직까지 기억합니다. 

아이들은 자기 엄마이지만 엄마가 무슨 싸움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릅니다.

자녀들도 자기들에게 주어진 과제를 풀어가며 사느라 나름 힘들게 살았고 

더구나 엄마와 함께 영적 전투에 임할 때가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얼마후 작은 딸이 엄마가 싸우는 선한 싸움에 함께 동참하여 오늘에 왔으니 꿈인가합니다

 

베드로가 왜 지금은 내가 주를 따라갈 수 없냐며 나는 주를 위해 목숨까지 버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를 열렬히 사랑했던 한 사나이의 절절함을 율법적으로 보면 자기 의와 자기 용기는 주를 따름에 장애물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반면 복음적으로 보면 그는 정말 나보다 더 뜨겁게 주를 사랑했다는 흔적 앞에 숙연해집니다.

 

그럴 때 자신의 솟구치는 사랑에도 무참히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절대자와 피조물과의 숙명적인 불협화음을 

베드로와 함께 깨닫곤 심히 통곡 할 것입니다. 통곡의 강을 건너본 자는 주를 따라 죽음의 강도 건널 것입니다 

 

예수께서 먼저 아버지께로 간다는 것은 예수만이 절대적 의이시기에 그분만이 아버지께 용납되기 때문입니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요한16:10

 

때문에 베드로는 아무리 주를 따라 가고 싶어도 의의가 없으니 의로우신 아버지께로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육으로든,혼으로든,영으로든 당신을 사랑하여 어린애처럼 당신과 헤어지기 싫어서 

항상 따라 오려는 베드로에게 당신의 의를 전가시켜 주실려고 지금 십자가를 향해 가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결과 지금은 아니지만 후에는 아버지 집에 먼저 가 계신 주를 따라올 수 있다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겠다는 그에게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요한13:38)"는 말씀을 주십니다 

 

예수를 향한 우리의 배반과 저주는 지금 막 나타난게 아니고 오래전부터 이미 우리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모태 죄인입니다.

 

만일 베드로에게 너도 갈릴리 예수와 함께 한 자가 아니냐며 열 번 물어 보았다면 

열 번 다 부인 할 정도로 우리는 타고난 죄인들입니다.

선악과는 그렇게 우리로하여금 하나님과도,나와 내 자신에게도,

나와 이웃간에도 숙명적인 불협화음을 낳았던 것입니다.

 

주님!

우리가 진실치 못하여 자신에게조차 진실할 수 있는 능력마저 잃어버린 것에 애통하게 하옵소서.통곡하게 하옵소서.

주님!

하나님과 이웃과 심지어 제 자신과 자연에게까지 화목치 못한 모든 죄의 근원을 없이하시려 화목제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

저희로 화목제물되신 당신 안에서 하나님과 이웃과 자연과 더불어 새창조의 하모니를 위해서 

살아가는 자들이 되도록 성령으로 충만케 하옵소서.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