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는 주님 말씀에 제자들은 서로 보며 의심하는데 베드로의 성정은 좀이 쑤셔서 누구인지 당장 밝혀서 가만 두지 않을 기세로 요한에게 머리짓하여 말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때 요한은 예수의 품(가슴)에 의지하여 누운 상태 그대로 예수님께 "주여 누구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그가 사랑하시는 자"라고 말함에 천연덕스럽고 그런 요한에게 <맞아 내 품은 널 위해 있는 것이야>라는 듯이 요한의 무게를 조용히 품고 계시는 예수님은 푸른 하늘 위 뭉개구름 같기도 하고 고요한 연못 같기도 하고 무더운 여름날의 울창한 숲 같습니다. 

 

그 누구도 선뜻 주님 가슴으로 다가가 자신의 머리와 어깨를 홀가분히 맡긴채 그분의 심장 숨결을 들어 보지 못했지만 요한은 예외였읍니다. 주께서 자기를 사랑한다는 확신 하나로 천진스럽게 주님 심장까지 쳐들어 간 요한입니다.

 

허나 이런 요한도 하나님께서 인자 예수를 영광 되게 하심으로서 변모하신 예수를 봤을 땐 죽은 자처럼 엎드리게 됩니다((계1:17). 그 후부터 요한이 어떤 예수를 더 사랑했을지 우리 모두에게는 수수께끼일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영원한 수수께끼입니다.

 

대제사장의 에봇에는 이스라엘의 열두지파 이름이 새겨진 보석 열 두개가 달린 흉패를 만들어 붙혔습니다. 대제사장이 에봇을 입으면 가슴과 심장으로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 쳐들어 왔습니다. 

 

그리스도의 모형인 대제사장은 하나같이 죄와 허물로 죽은 이름들을 품고 죽어야 할 자라는 것을 알았을까요? 허나 유일한 중보자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께선 이 죽음을 아시고 이 때를 위해 오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말씀대로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내주십니다.

 

만일 예수께서 요한의 물음에 가룟유다라고 대답하셨다면 베드로외 모든 제자들이 즉시 가룟유다를 가만이 나둘리 없었을 것입니다.그리되면 십자가의 때가 지연되거나 무산되었을까요?

 

모든 의를 이루시려는 에수께서는 이름으로 지목하지 않은 대신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시며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십니다.

 

이 때 누구라도<유다! 받지마 그것 받으면 예수를 팔게 된다 쟎아!>라며 소리쳤다면 화들짝 정신차렸을까요? 그러나 제자들 모두가 주께서 하시는 말씀의 의미를 몰랐다 합니다(요한13:28)

 

분명 예수께서 떡 한조각 적셔서 건네 주는 자가 예수를 팔 것이라는 말씀을 들려 주셨지만 끝내 그는 조각을 받습니다. 이는 벌써 마귀가 예수 팔려는 생각을 마음 속에 넣었기에 그의 귀와 지각이 둔해졌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 순간 가장 초조했던 자는 사단이였을 것입니다.그런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주께서 주시는 떡 조각을 받자 <곧>사단은 유다 속에 들어가 유다를 정복합니다.(요한13:27)

 

예수께서는 곧 사단이 그의 속에 들어간 것을 훤히 보시며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하십니다.

사단도 주의 허락 없이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모든 정사와 권세가 다 주께 복종합니다. 이 사단이 얼마나 교활한지 미리 마귀를 통해 그의 마음 속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음으로서 마귀의 생각을 통로삼아  유다에게 들어갑니다.(요한13:2)

 

제 맘 속에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을 때 주님 생각인지,마귀 생각인지 말씀과 기도로 분별하여 마귀 생각이라면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단은 마귀 생각을 통로 삼아 들어 옵니다. 

 

"30: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31: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 : 하나님께서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께서도 몸소 인자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렇게 하실 것이다"

 요한13장

 

영광의 첫 테프를 끊은 시점이 인자를 팔려고 가룟유다가 나간 후였다는게 저(우리)를 새롭게 만듭니다. 왜냐면 우리 모두는 어떠한 양상으로든 예수를 판 한 조각의 파편들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판 한 조각의 파편 같은 인생들에게 욕설과 저주대신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분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외 누가 있겠습니까?

 

근데 아버지도 지금 영광 받은 아들로 인해 영광 받으셨다 하십니다. 또한 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셨다면 하나님께서도 몸소 아들을 영광되게 하실건데 곧이라 하십니다.

 

사단도 곧 행했고 유다도 곧 나갔다면 아들이 사람의 영광이 아닌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여 받게 됨이 어찌 곧이 아니겠습니까?

 

저희 친정 어머님께서 제일 좋아하던 말씀이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편50:15)"였습니다.

 

돌이켜 보니 황해도에서 피난 나오셔서 국가적으로 잿더미 위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도 환란이셨고 날 때부터 병마에 시달리는 저를 양육하신 모든 날들이 환란 날들이셨습니다.

 

누워 있는 날 동안에는 내 이마에 손 얹거나 앉아 있는 날 동안엔 내 머리에 손 얹고 얼마나 많은 눈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던지 그 음성이 갈수록 더욱 더 그립습니다.

 

그 말씀 붙잡고 여호와께 구하자 저를 병마에서 건져주심으로서 여호와께서는 제 어머님을 영화스럽게 하셨습니다. 또한 절 향한 어머님의 어떤 기도는 이제사 응답되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곧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시고 아버지가 계신 보좌에 앉히사 열방과 모든 정사와 권세로부터 영광 받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곧,곧이라함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요 가룟유다 일로 서로 의심하며 불안해 하는 제자들을 추스리기 위함일 것입니다

정작으로 주와 함께 있으면서도 주께서 누리시는 모든 영광스런 생각들을 제자들이 공유하지 못한다는게 얼마나 안타깝고 안스러우셨을까? 그러나 주께서는 바닥을 치는 것도 모자라 끝 모를 바다속으로 가라앉는 제자들이 그런 과정을 통과하면서 새창조의 역사를 이룰 것을 바라보십니다

 

어릴땐  죄와 사단에 팔려서 주를 판 한 조각의 파편 같은 유다(저,우리)로 인해 주께서 지게 될 십자가를 왜 영광이라고 하시는지 도무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죄에 팔린 저(우리)를 되사 올 수 있는 속량의 십자가였기에 주께서는 치욕스럽다, 망신스럽다 하시지 않고 오히려 영광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시니 그 사랑이 날마다 새롭습니다.

 

"33: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찌기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13장

 

그 크신 분께서 어찌 이렇게 작은 자들과 함께 해주셨는지 정말 기이한 사랑이요, 감당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아직 잠시 작은 자들과 함께 있는 짧은 순간을 어떻해 표현해볼까 싶습니다.

 

마치 모래 시계의 얼마남지 않은 한쪽 모래알들이 한 알 한 알씩 떨어지는 순간을 바라보는 제자들과 주님이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시선이 다 떨어지면 모든게 끝날 것 같은 의혹과 두렴이였다면 주의 시선은 그 흔한 모래알들이 다 없어진 후에야 비로서 무에서 새 창조란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시점이였을 것입니다.

 

때문에 새창조의 에너지를 <새계명>으로 말씀해주십니다. 이 새계명은 무엇인가로 기억하기보담은 누구신가로 기억함이 곧 이해력이고 실천력일 것입니다 

 

옛계명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였다면 새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새계명에서 주 하나님께선 어디에 계신걸까요?

 

하나님께서 육체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당신 몸이 찢겨질 때 지성소와 성소를 가리고 있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겨집니다.

 

이는 십자가에서 주의 죽으심으로 인해 제 완고한 자아의 육질을 위로부터의 권능으로 찢고 제 속에 들어 오셨음을 찢겨진 휘장 표적을 통해 보여 주신  멧세지인 것입니다.

 

마귀의 생각을 통해 사단도 가룟유다 속으로 들어갔다면 주의 영광스러운 십자가(생각)을 통해 하나님께서 제(우리)속에 들어 오시는 것이야!

 

문제는 제(우리)가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께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린 보이지 않는 믿음을 구하는 대신 보이는 수많은 것들을 구합니다.

 

주를 제 몸 밖에 지극히 거룩한 곳에 계신 분으로 사랑하던 옛 시대는 가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의 몸으로 서로 사랑하며 사는 새 시대는 주를 제 몸 밖 저 아득한 곳에 계신 분으로 알고 사랑하는 그 이상입니다

 

새계명은 굳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따로 분리시키지 않습니다. 이는 주께서 자기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가 그 사랑의 살과 피로 먹어 주와 한 몸되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새 계명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사랑의 주입니다.

이것을 기억하는 한 주의 생명이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신있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우리가 내 제자인 줄 알거라고 하십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