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 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

으니 23: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

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24: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

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

이다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니 사무엘이 사울

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

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다 하고 사무엘이 가려고 돌아설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

라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이스

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님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이에 사무엘이 돌이켜 사울을 따라가매 사울이 

여호와께 경배하니라"삼상15:20~31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보내사 사울 왕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데 말씀으로 주십니다. 첫번째 말씀(삼상15:14)을

사무엘을 통해 주실 때 사울은 양과 소들은 무리가 끌고 온 것으로 백성들이 여호와께 제사 드릴 제물이며 

그 외에는 다 진멸했노라고 변명인지 사실인지 탐욕인지 마치 신접한 자처럼 말합니다.

그러자 사울을 깨우치기 위해 두 번째 말씀(삼상15:16~18)을 주십니다. 말씀이 여전히 들린다는 건 아직 그리

스도께서 회개의 문을 열어 놓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신령과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것이 무엇일까? 

사무엘과 사울을 묵상하면서 건진 것이 있다면  "내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로 충만하여 

나를 제로 상태로 비우는 것입니다.

 

사울이 두 번째 말씀을 들은 후 그는 첫번째와는 달리 자신의 진정성으로 변명합니다. 한 때 이 죄인도 진정성을 

추구한 적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으로 말하면 극치일 것이지만 십자가의 주보다는 아름답지 않습니다. 

물론 진정성의 추구도 순수와 성찰에 도움은 되지만 이 역시 자기 의와 아름다움을 끄집어 내는 고차원적인 혼적 

유희라는 것에 미련없이 치워버렸습니다.


사울의 진정성은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입니다. 진실로 사울은 지체치 

않고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갔습니다.가서 그는 이스라엘을 선대한 겐 사람들을 진노로부터 건져주는 배려까지 

행했습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그러나 이 진정성은 불순종을 회개하는데 방해물이 될뿐이였습니다.인간이란 것은 자신이 잘한 것으로 자신의 

잘못한 것을 쉽게 얼버무리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의 길로 행한 그 발걸음의

진정성을 붙잡고 놓치 않으니 여호와의 목소리 속에 깃드인 다른 항목(다 진멸할 것)에 관해선 소경이 됩니다. 

첫 걸음은 잘 떼었으나 그 다음 걸음들은 여호와의 목소리,인간의 목소리,짐승의 소리들과 혼합된 걸음이니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에 삼 세번 하나님께서는 최종적으로 세 번째 기회를 주기 위해 다시 또 말씀을 주십니다(삼상15:22~23). 순종이,

듣는 것이 제사보다 낫다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처음부터 아담과 이브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고 순종했다면 

피흘리는 제사를 통해 여호와를 만나는 율법제도는 생기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이 마지막 기회만이라도 왕이란 신분에 연연치 않고 순전히 자신의  영적 대각성을 위하여 사무엘의 겉옷 

대신 자신의 왕복과 마음과 체면과 자아의 의를 찢으며 그 즉시 죽이지 않고 사로잡아 온 아각 왕과 소와 양들을 

죽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슬프게도 사울에겐 여전히 나!나!나!가 절규합니다. 나와 함께/나로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내가 범죄했을

지라도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입니다.

 

사울은 여호와의 백성을 일컬어 내 백성이라 부르고 사울에게 기름 부으신 여호와를 사무엘의 여호와라 부릅니다.

이 사람의 예배는 사람들과 장로들과 이스라엘 앞에서 자신의 신분 유지와 인정 받기 위한 수단인 것 같습니다. 

이것으로 사울을 향해 열려 있었던 삼 세번 회개의 기회는 지나갑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너희는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끌어 오라 하였더니 아각이 즐거이 오며 이르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하니라 사무엘이 이르되 네 칼이 여인들에게 자식이 없게 한 것 같이 여인 중 네 어미에게

자식이 없으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이에 사무엘은 라마로 가고 사울은 기브아

자기의 집으로 올라가니라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

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셨더라"삼상15:32~35

 

실상은 폐위된 사울 왕이나 다음 왕이 등극할 때까지 이스라엘의 질서 유지를 위하여 사무엘은 사울을 따라갑니다.

또한 사울이 진멸하지 못한 아각 왕을 여호와 앞에서 찍어 쪼개어 죽이려는 목적으로 따라갑니다 . 

내가 마땅히 진멸시키지 못한 아말렉 사람의 죄는 어떠한 것일까?   

 

"너희가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를 

길에서 만나 너의 피곤함을 타서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기업으로 얻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사면에 있는 모든 대적들을 벗어나게 하시고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할찌니라 너는 잊지 말찌니라"신25:16~19

 

출애굽 당시 아말렉은 이스라엘이 어찌 바로의 손을 벗어나 홍해를 건넜는지 이스라엘의 신에 관해서 소문으로 

들어서 훤히 알고 있었음에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래전에 에서와 야곱은 화해했지만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가 첩 딤나에게서 낳은 아들 아말렉(창36:12)의 후손들과는 숙적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르비딤에 이르러 물이 없어 갈하게 되자 영육간에 지쳐서 <하나님이 정말 우리들 가운데 계신 것일까> 

회의를 품었을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아말렉이 뒤로 쳐진 연약한 자들을 쳐서 이스라엘 전체를 곤경에 빠뜨립니다. 

싸울 힘이 전혀 없는 피곤하고 지친 약자들만 쳐서 죽이는 아주 야비한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이 너무나 피곤한 

나머지 우리 중에 정말 하나님이 계실까 회의를 품고 있을때 아말렉이 공격했다는 것이 우리를 일깨웁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런 이스라엘을 위하여 아말렉과의  전쟁을 선포하시고 여호와닛시란 승리의 깃발을 꽂게 하신 후 

내가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리라고 맹세하십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모세와 아론과 훌의 기도와 현장에서 싸우는 

청년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다 함께 여호와와 하나님 나라의 대적 아말렉과의 싸움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판 아말렉 죄악은 빈익빈 부익부의 자본주의로 인해 인간을 물질의 노예로 만들어가고 있는 시스템속에 

숨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예전보다 더 구석구석 자본으로 돌아 가는 사회적인 행렬에서 뒤쳐지는 성도마저 

노략질해 가는 어두운 세력들이 있다는 것에 각성해야 합니다. 이들의 특징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특히나 펜데믹 코로나 현상은 가난한 자들을 생계 활동에 제약받음으로 더 가난하게 만듭니다. 또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그나마 참석하던 공예배가 코로나로 인해 닫힘으로 믿음의 파선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그야말로 우리 중에 

정말 하나님께서 계신 것일까? 회의의 물결 속에 떠내려가는 영혼들이 왜 아니 없을까 싶습니다.


이럴수록 모세와 아론과 훌과 여호수아와 같은 종들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공동체를 공격하는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시겠다는 여호와의 맹세를 붙잡고 부르짖을 필요가 있습니다. 혹여 만군의 여호와께서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사

교회와 성도들을 대적하는 아말렉 사람들의 정사와 권세들과 싸워 승리를 안겨 주실 줄 어찌 알겠습니까?

  

사울이 아말렉을 진멸치 못함으로 폐위 되었다면 다윗은 아말렉과의 승리 후 왕권이 튼튼히 세워집니다. 

그리고 에스더도 아말렉의 후예 하만과 그 무리들을 진멸함으로서 영원히 기념되는 부림절의 왕후가 됩니다.

오늘날 교회가 자본주의 폐단과 코로나를 통해 야비한 정책을 펼치는 아말렉의 정사와 권세들을 진멸코자 

열망한다면 여호와께서 반드시 개입하십니다.

 

아말렉의 아각 왕은 겉옷이 찢긴 노선지자 사무엘을 어찌 보았을까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어찌 

노선지자를 두려워할까 싶은데 사무엘 앞으로 나오는 자세가 과연 그렇습니다. 사무엘은 그를 여호와의 맹세대로,

여호와의 명령대로 찍어 쪼개서 진멸시킵니다. 사울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사무엘이 대신 행함으로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사무엘은 라마로 사울은 기브아로 가고 성경은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보지 않았다 합니다.


깨어진 파트너쉽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는듯 합니다. 깨어진 파트너쉽을 새로이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허나 사무엘이 온 밤을 지새워 사울을 위해 기도한 것처럼 그는 홀로 여호와의 전에 앉아 

있을 때나,혹은 선지자의 무리들과 함께 나라와 민족을 놓고 기도할 때 사울을 놓고 기도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