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하니 사무엘이 이르되 그러면 내 귀에 들리는 이 소의 소리는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라"삼상15:12~14

 

다윗은 멀리서도 주는 나의 생각을 아시오며 나의 앉고 일어섬도 아신다고 고백합니다. 제자들도 예수와 함께 삼 년 반을 동거동락한 끝에 그는 모든 것을 아시기에 굳이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분이라는 걸 믿게 됩니다 (요16:30)

 

사울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은 물론 자신의 모든 생각까지도 아시는 전능한 하나님을 몰랐을까요? 잃어버린 나귀사건을 통해 사무엘을 만나게 된 것이 뜻밖에 지도자의 기름을 사무엘로부터 받게 되자  뭐가뭔지 얼떨떨한 사울입니다. 그런 사울에게 사무엘 선지자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일어나게 될 세 가지 징조를 말씀해주십니다.놀라운 것은 그 세가지 징조가 하루만에 다 이루어집니다. 그런 신비로운  경험을 할 때마다 사울의 영혼은 오랜 잠에서 깨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 일이 있은지 얼마후 여호와의 영에 크게 감동되어 암몬의 나하스왕과 싸워 압승했던 사울입니다. 그후부터 그가 전투장으로 향하여 가는 곳마다 승리하게 된 것도 여호와의 영(성령의 기름부으심)이 함께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허나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는 여호와의 명을 여호와의 생각대로 행하지 않고 사울은 자기 생각대로 행합니다. 그리고도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이 오자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너무 가엾고 불쌍한 사울!  그러나 정작 자신은 자신이 얼마나 불쌍하고 가엾은 자인지 모릅니다. 큰 키에 준수한 외모가 오히려 자신의 실상을 못보게 만드는가 봅니다. 외모가 그러하여 자신의 실체를 바라보는데 방해가 된다면 차라리 자랑할 것 하나도 없는 외모가 진짜 복입니다.

이스라엘의 백성 중 대표가 이렇다는건 나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날 구원하신 가장 큰 동기가 내가 너무나 가엾고 불쌍해서 입니다. 서로 불쌍히 여기라는 말씀은 우리 마음을 여호와의 마음,그리스도의 마음,곧 지성소로 초청해 주시는 말씀으로 이는 주와 함께 거하자는 말씀입니다. 지성소로 들어 갈려면 나란 단단한 겉사람과 가증되고 역겁고 심히 부패된 마음과 종교성으로 충만한 혼과 육이 찢겨지지 않으면 못들어갑니다.


우린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 막는 휘장을 설치하셨다고 배웠습니다. 옳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근데 왜 하셨을까? 묵상해보면 내 죄악된 육체를 보호해주시기 위한 여호와의 긍휼이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 죄악된 육체를 휘장으로 가려주시지 않으면 여호와의 진노로 진멸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진실을 누가 가르쳐주십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그 육체가 찢어지며 돌아가시는 순간 헤롯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역사적인 사건이 가르쳐주지 않습니까?

왜 예수께서 대신 죽어주셨습니까?

나로썬 사망이 무서워 못죽기 때문이고 이 더러운 죄인이 죽은들 여호와의 거룩함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오랫동안 갈망하며 기다리던 육체의 예수께서 오셔서 나 대신 죽기를 무서워하는 내 연약함과 사망과 저주의 나를 품고 생축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나를 살리시려 다시 부활하사 나도 함께 부활의 새생명가운데 거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 온 밤을 부르짖게 된 동기가 무엇이였을까? 생각해보면 사무엘은 기름부음 받은 자의 버려짐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엘리 대제사장 가문을 통해 일찌기 배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의 종들은 이런 연유로 버려짐을 당할까 하여 성령의 격동속에 온 밤을 지새워 부르짖다 겨우 새벽 끝에 가셔야 잠든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종교성이란 나보다 더 큰 능력에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기독교인들도 처음엔 종교로 시작했을지는 모르나 나중엔 내 종교성이 다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다만 아버지의 뜻이,곧 십자가의 잔을 마시는 자가 되길 바랄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교리가 아닌 실제적인 삶으로 살아내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는 모든 성도들은 자기를 부르신 이의 뜻대로 사는 자입니다.  이리 되면 만물의 찌거기를 자처하는 자가 된 셈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불쌍함은 여호와 보시기에는 결단코 불쌍하지 않고 보시기 좋은 불쌍함입니다. 이미 승리하여 구원 받은 아름다운 불쌍함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죽더라도 말씀을 지켜라입니다. 그러니깐 내가 죽어야 할 때 변명하지 말 것과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다른  사람을 끌고 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이 양과 소의 소리가 들림은 어찜이뇨?" 라는 사무엘의 질문을 받게 됩니다. 이에 사울의 첫번째 변명은 자신이 한게 아니라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고 왔다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아말렉 사람과 그들에게 속한 모든 것들은 여호와의 심판 아래 저주와 진노의 대상이기에, 그것들을 가져오거나 품으면 나도 진노와 저주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변명은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 할려고 가장 좋은 것을 남긴 것이며 그 외의 것들은 진멸했다고 합니다. 사울 왕은 자신의 허물이 무엇인지 진짜 모르는 것인지, 알면서도 정직하기엔 너무나 약한 것인지,위선과 외식에 익숙해진 것인지 혼란합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말씀에 연동되는 깨끗하고 단순한 생각들은 흩어지고 섞지 말아야 할 사람의 탐욕적인 생각들은 받아 들어 자신을 혼란하게 만듭니다. 백성의 목자가 되어 백성을 여호와의 명대로 인도해야 할 사울 왕이 자기 생각대로 인도합니다. 그것도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기에 필요한 좋은 제물로 쓰기 위해서라 합니다. 사람의 종교성만한 탐심도 없을 것입니다.

 

이십 여년전 캐쉬어가 삼백 불 넘게 덜 찍었다는 걸 가게 와서 물건 정리하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 돈을 헌금함에 넣고 내내 회개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차라리 엘에이 갈비 사다 실컷 우리 아이들과 함께 배터지게 먹었다면 덜 비참했을 것입니다. 종교성은 여호와께서 원하시지도 않는 제물을 드립니다. 흠도 티도 없는 그리스도 한 분이면 족하신 여호와 알기를 힘쓰지 않는 이상 우리들이 드리는 제사와 분향함에 그분은 염증과 혐오심을 느끼십니다

예배를 안드리자니 뭐하고 드리자니 그 거룩한 기쁨과 순결한 생명력에 감흥을 느끼지 못할 때 사무엘처럼 근심된 마음으로 온 밤을 부르짖어야 할 것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의 철닥서니 없는 변명을 들은 후 "가만히 계시옵소서 간 밤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신 것을 왕에게 말하리이다"하니 사울이 "말씀하소서!" 라고 대답합니다. 사울에겐 종의 개념이 애당초 없는 자 같습니다. 허긴 하인을 두고 살았으니 자신이 하인일리 없겠지요. "내 주여 말씀하소서 종이 듣겠나이다"와 "말씀하소서"는 언어의 결이 달라도 한참 다릅니다. 우린 따끈따끈한 찐빵 같은 말씀을 좋아하는데 지금 사무엘이 사울에게 들려 주시는 간 밤의 말씀이야말로 방금 쪄온 찐빵이 아닐까 합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어찌하여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삼상15:17~19

 

따끈따끈한 찐빵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지극히 작은 소자로 오신 나사렛 예수를 품고 살 때 만들어집니다. 여호와께서는 사람과 보는 차원이 다르기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왕의 기름을 붓습니다. 우리들은 이렇듯 하나같이 지극히 작은 소자,작은 무리,작은 공동체에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임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들려오는 여호와의 목소리는 방구석에 처박혀 있도록 만들지 않습니다. 기도골방이나 성경 공부방도 종내는 사회속에서 말씀대로 걸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인생 길을 걷노라면 죽기까지 내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하는 사건들을 늘상 만나게 됩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말렉의 죄성과 약자들을 잔인하게 탈취하는 약육강식의 본성을 다 진멸하기까지 나를 쳐서 말씀에 복종시키는 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