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이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위하여 처음 쌓은 제단이라 사울이 이르되 우리가 밤에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동틀 때까지 그들 중에서 탈취하고 한 사람도 남기지 말자 무리가 이르되 왕의 생각에 좋을 대로 하소서 할 때에 제사장이 이르되 이리로 와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사이다 하매 사울이 묻자오되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되 그 날에 대답하지 아니하시는지라"삼상14:35~36

 

사울은 자기 말이 여호와의 뜻보다 앞서 가고 있다는 것을 도무지 깨닫지 못합니다. 이번에도 그는 여호와의 뜻을 묻기 전에 먼저 자기 뜻을 말합니다.밤에 블레셋을 추격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말자 합니다. 탈취물로 실컷 먹은 백성들은 얼마든지 싸우겠다는 마음으로 왕이 좋을대로 하시라 하지만 에봇을 가져온 아히야 제사장이 브레이크를 겁니다. 왕의 성급하고 경박한 기질을 파악한 것일까요?

 

그는 여호와께 물어 보자며 사울 왕이 좀전에 쌓은 여호와 제단 앞으로 와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자고 아뢰니 사울이 하나님께 물으나 그 날에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죄를 품은 자의 기도는 듣지 않습니다. 오래도록 기도해도 응답치 않을 때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38:사울이 이르되 너희 군대의 지휘관들아 다 이리로 오라 오늘 이 죄가 누구에게 있나 알아보자39: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으리라 하되 백성 중 한 사람도 대답하지 아니하매 40:이에 그가 온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너희는 저쪽에 있으라 나와 내 아들 요나단은 이쪽에 있으리라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왕의 생각에  좋을대로 하소서"삼상38:40 

 

죄는 본인이 짓고 이 죄가 누구에게 있나 알아보자고 합니다(38절). 그럴지라도 거기까지만 말했다면 불쌍히 여김이라도 받을 수 있으련만 그는 자신의 독야청청한 의를 쏟아냅니다(39절). 자기 아들 요나단일지라도 죽이겠다 합니다. 이 아버지는 이스라엘이 블레셋으로부터 구원 받도록 싸운 요나단에게 수고했노라는 말 대신 질투로 이글거립니다. 아비보다 더 나은 아들을 보느니 차라리 안보는게 낫다고 외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왕의 말을 들은 백성 중 한 사람도 왕의 말에 동의하지 않음은 어인 일입니까?

 

사울은 이 때라도 눈치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렇게 가다간 절벽에서 떨어질텐데 사울은 잠시라도 입 다물지 못하고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는듯 아들 요나단과 아버지는 이쪽,백성들은 저쪽으로 나누자고 말하니 이번엔 백성들이 좋을대로 하라 합니다.

 

"이에 사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되 원하건대 실상을 보이소서 하였더니 요나단과 사울이 뽑히고 백성은 면한지라 사울이 이르되 나와 내 아들 요나단 사이에 뽑으라 하였더니 요나단이 뽑히니라"삼상14:41~42

 

부자지간에 대화하면서 살았더라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들의 모든 생각은 아닐지라도 근자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혹여 은혜 받은 말씀이 있다면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졌더라면 이렇게 난처한 일을 직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사울은 온 백성들 앞에서 아들에게 네가 행한 일을 말하라 하자 요나단은 가감없이 고하고 아버지 뜻대로 죽을 수 밖에 없다 합니다. 전쟁터에서 여호와의 구원이 없었다면 벌써 죽은 목숨인데, 자기 살자고 무슨 변명을 할 것입니까? 또한 그 자신도 여호와께 자신이 먼저 산제물 되어 표징을 구함으로 구원 역사를 이루었은즉 가벼운 마음으로 죽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들은 이러하나 아버지 사울은 그렇지 않습니다. 왕이란 권위,아버지란 권위에 스스로 함몰된채 망령된 말들만 내뱉습니다.율법도 고의적이 아닌 부지 중에 저지른 죄에 관해선 속죄제를 허락했건만 율법이신 하나님보다 더 지체가 높은 위인입니다.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삼상14:44

 

설령 고의적으로 아들이 죄를 지어도 이리 말하기가 어려울텐데,율법 권위의 특징은 하늘 높은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놀라운건 백성들이 요나단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는 장면입니다.  

다시한번 율법은 정죄와 사망의 법으로서 누구라도 모세의 자리에 앉으면 이리 된다는 것을 배웁니다. 예수께서 오죽이나 분노하셨으면 당시 종교기득권자들에게  화! 있을진저!를 선포하셨을까 합니다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역하였음이니이다 하여 백성이 요나단을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니라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 추격하기를 그치고 올라가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삼상45~46

 

백성들이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한 것은 사람을 살리는 맹세로서,사울이 자기 의로 아들을 죽이는 맹세와는 대조를 이룹니다.대적 블레셋으로부터 여호와의 구원을 경험한 요나단은 이제 헛되고 헛된 왕의 맹세로부터 백성의 구원을 맛봅니다. 이런 백성들에게 요나단이 어찌 여호와와 마음이 합한 다윗의 등장을 환영하며 그를 백성의 왕으로 세워 주지 않겠습니까?

 

이제 실상을 알아 냈으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이 밤에 블레셋을 추격함이 어떤지 다시 여호와께 나아가면 좋으련만 묻지도 않고 추격도 멈춥니다. 진멸할 것을 진멸치 않으면 종내는 그것들에 의해 진멸당하고 맙니다. 훗날 블레셋에 의해 사울과 요나단과 많은 백성들이 진멸당한 것이 그렇습니다 

 

아버지!

우리는 연약하나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선 홀로 주 여호와이시나이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