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이 왕이 될 때에 사십 세라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지 이 년에 이스라엘 사람 삼천 명을 택하여 그 중에서 이천 명은 자기와 함께 믹마스와 벧엘 산에 있게 하고 일천 명은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기브아에 있게 하고 남은 백성은 각기 장막으로 보내니라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치매 블레셋 사람이 이를 들은지라 사울이 온 땅에 나팔을 불어 이르되 히브리 사람들은 들으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수비대를 친 것과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함을 듣고 그 백성이 길갈로 모여 사울을 따르니라"삼상13:1~4

 

사울 왕 이 년에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수비대를 친 것이 계기가 되어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알다시피 사울 왕은 암몬의 나하스 왕을 칠 때 삼십 삼만 명과 함께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만일 사울 

왕이 여호와의 나라인 이스라엘과 그의 백성들을 사랑했더라면, 삼십 삼만 명을 각기 장막으로 돌려 보내기 전 

거룩한 땅에 침범해 들어 와 거룩한 백성들을 괴롭히는 블레셋을 진멸시킨 후에 보냈을 것입니다.

 

블레셋이 얼마나 이스라엘 곳곳을 염탐/간섭/억압 정책을 펼쳤으면 이스라엘 땅에 철공이 없게 만들었을까 싶습니다.

철공낌새만 보여도 잡아다 죽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삼상13:19~22)

추측컨대 사울 왕에겐 그런 거룩한 꿈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허나 요나단 왕자는 할례 받지 못한 블레셋으로부터 

받는 백성들의 고통을 두고만 볼 수 없어 자기 땅에 버젓이 블레셋 수비대를 둔 진영을 공격합니다. 이 사실이 블레셋

사람에게도 들리고 사울 왕에게도 들리니 왕이 온 이스라엘 땅에 나팔 불어 백성들이 길갈로 모여 왕을 따릅니다.

 

근데 이스라엘을 치러 온 블레셋 병거가 삼만,마병 육천 명,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함

을 보고 절박하여 굴과 수풀과 바위 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어 버립니다. 어떤 이들은 아예 요단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가나 사울 왕은 아직 길갈에 있고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은 떱니다. (삼상13:4~8)

 

이럴 때 우린 무슨 생각을 할까요? 왜 요나단은 괜히 블레셋을 건드려 이런 큰 화를 불러 일으켰을까? 가만이 나두면

그럭저럭 밥은 먹고 살아갈 수 있는데 라며 그를 원망할까요? 아니면 우리가 진작에 블레셋을 진멸시켰어야 하는데 

이참에 죽든지 살든지 목숨은 하나님께 맡기고 일사각오로 싸울 준비를 하자며 준비할까요?

 

거룩한 십자가 군병들이 싸움을 안하면 마귀와 그에 속한 자들도 아무 짓 안합니다. 허나 십자가 군병이 말씀과 기도

에 전념하며 주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살고자 하면 마귀와 그에 속한 자들이 세력을 구축하여 달려듭니다. 이럴 때 

주저 앉을 것인가?돌파해 나가야 할 것인가?

 

일사각오는 말로 외친다하여 자동적으로 생기는게 아닙니다. 주님과 늘상 교제하는 가운데 조금씩 조금씩 자라나갈 

때 담겨지는 십자가 정신입니다. 생각에 요나단은 사무엘의 말이 떨어지지 않고 온 이스라엘에 응하도록 역사하시는

여호와를 진지하게 맘 속에 품은 자 같습니다.

 

또한 아버지가 여호와의 영에 크게 감동되어 암몬의 나하스 왕과 싸워 대승한 것도 보았고 사무엘 선지자의 고별

설교도 들었을 것입니다.왕을 구한 죄로 모두가 떨고 있을 때 너희가 잘못했을지라도 두려워 말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섬기면 자기 백성을 기뻐하며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에 왕의 아들로서 위로와 평안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또한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사무엘의 말씀을 뜨겁게 사랑했을 것입니다.그가 다윗에게 준 사랑을 보면 확실히 그렇습니다.

 

사울이 정한 기한 내에 사무엘을 기다려도 오지 않자 백성들이 흩어지므로 직접 번제와 화목제물을 드립니다(삼상13)

 율법에 제사는 오직 구별된 제사장만이 할 수 있습니다. 사울도 기름부음 자이지만 어디까지나 왕이였지 제사장은 

아니였습니다. 신약시대에는 기름부음 받은 모든 성도들이 왕 같은 제사장이지만 구약 때는 아니였습니다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오고 그가 왕에게 무슨 일을 한 것이냐고 묻습니다. 사울은 그 순간을 회개의 기회로

삼지 못하고 이렇게 저렇게 요렇게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시킵니다.(삼상13:11~12)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라는 말을 할 줄 알다니 사무엘이 

엄청 놀랐을 것입니다. 결국 버려집니다.(삼상13:13~14) 이 버려짐이 첫 번째라면 두 번째는 아말렉 전투시 진멸하지

않은 아각 왕과 짐승들로 인해서이고 세 번째로는 접신한 자를 통해 사무엘 선지자를 불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역사의 현장에서 삼 세 번 버림 당하였다는 것은 여호와께서도 그에게 준 여러 번의 기회를 사서 전심으로 

돌아 오길 기다리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사울 왕에게 사십 년 통치기간을 주신 걸 보면 확실히 그렇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성도들에게도 실수와 허물이 있을지라도 여호와께서는 전심으로 돌아 오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시기

위해 지금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무엘은 길갈을 떠나 베냐민 기브아로 올라가고 사울 왕은 자기와 함께 한 자의 수를 세워보니 육 백명 가량 입니다.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백성은 베냐민 게바에 있고 블레셋 믹바스에 진 쳤더니 이젠 이스라엘 땅을 노략하기로 

작정한 노략꾼들이 블레셋 진영으로부터 세 대로 무리지어 나와 한 대는 수알 땅에 이르렀고 한 대는 벧호론 길로,

한 대는 광야쪽 스보임 골짜기가 내려다 보이는 지역 길로 향합니다.(삼상13:15~18)

 

강원도 만한 작은 땅이 마치 독 안에 든 쥐처럼 포위 당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 합니다. 이제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가 나와서 믹마스 어귀에 이르자 요나단이 아버지 몰래 블레셋 부대로 건너가자고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말합니다.(삼상14:1)

 

칼이나 창을 가진 자는 오직 사울 왕과 요나단뿐이니 요나단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더구나 자신이 먼저 싸움을 

걸었기에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가 느꼈을 부담감이 얼마나 컸을까 싶은데 그는 자신의 부담감보다 더 큰 여호와를

신뢰하여 나라를 새롭게 하는 일에 용기를 냅니다. 성도는 자신의 분수도 알아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향해 끊임없이 시선을 고정시키고 자라가야 합니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무기를 든 자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에 있는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이다"삼상14:6~7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는 그때도 그리하사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소년과 함께

해주십니다. 이 소년의 말이 너무 멋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에 있는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이다"  마치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면 내가 속히 이루어주리라"고 

말씀하신 주님을 생각나게 만듭니다.

 

요나단 안에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이 있으니 그 마음에 있는 대로 행하여

앞서 가면 본인도 마음(말씀)을 같이 하여 행하겠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저(우리)로 그리스도의 나라를 새롭게 해야겠다는 새 마음과 새 율례의 영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저(우리)는 당신의 것이니이다.

이 팬데믹 코로나 속에서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장 서서 가시옵소서. 제(우리)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겠나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