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삼상5:1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빼앗은 곳이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뜻을 지닌 에벤에셀입니다.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여호와의 궤를 모시고도 참패를 당한 지명 이름인 에벤에셀이 풍기는 뉘앙스는 참으로 

미묘합니다.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말은 마치 여호와의 도움을 <여기까지>로 제한,단절시킴으로서 그야말로 

여호와의 영광이 떠났다는 여호와의 부재의식을 심어 주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 천명이 죽자 장로들은 에벤에셀에서 회의도 하고 대책도 세우지만, 

정작으로 여호와께 기도하여 여호와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데에는 절벽입니다.

예배는 있는데 진리와 여호와의 마음(영)안에서 드리는 예배는 없을 수 있겠다 싶습니다.

 

한 시대가 집단적인 여호와의 부재로 고통 당하고 있을 때 여호와께서는 불임녀 한나가  

아들을 주시면 여호와께 드리기로 약속하자 그녀에게 아들을 허락하사 그 아들이 열 두살 되기까지 

기다리시다 마침내 다시 여호와께서 그 아들을 통해 말씀으로 나타나십니다


여호와는 무소부재하신 분이시나 그렇다고 누구라도 그분의 임재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모든 성도들은 주님의 부재 가운데 살 때가 있습니다.

 

그런 팍팍한 순간들을 돌파 할 수 있는 힘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도 하나님 되심을 

보좌 앞에 내려 놓고 우리와 같은 육체로 오셔서 이 땅에서 살다 가셨음을 기억해 보는 것입니다.

 

특히 성령에 내몰려 광야 사십 일 동안 금식 후 시험 받으셨으나 기록된 말씀으로 승리했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담 더 십자가에서 세상의 모든 죄를 온 몸으로 담당하실 때 가장 절실히 원하셨던 아버지의 임재 대신 

아버지의 처절한 부재 한가운데로 던져 지셨던 아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날 위해 십자가에서 죄와 저주의 값을 다 치르심에는 이렇듯 물리적인 고통과 함께 도저히 우리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버지의 부재란 영적 단절로 인해 고통 당하신 나사렛 예수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죄인들인 우리들에게야 아버지의 부재 현상이 당연한 일상이니 아들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고통의 깊이를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서 다곤 곁에 두었더니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 그러므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는 자는 오늘까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하더라 "

삼상5 : 2~5

 

이스라엘은 전쟁에 진 것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여호와의 궤를 블레셋에 빼앗긴 것입니다

이 사건은 뭐든 다 하실 것 같은 예수께서 로마 군대에 결박 당한채 끌려가신 후 십자가에서 죽으사 무덤 속에 

매장되므로 두 번 다시 그분을 볼 수 없다는 그분의 부재에 충격에 사로잡힌 제자들과 다를바 없는 현상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믿으나 실상은 믿지 않는 영적 무기력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다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고 있는 중이십니다

 

또한 자기 백성의 땅을 벗어나 이방인 블레셋에 이르게 된 여호와의 궤는 더이상 무기력 무책임하시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린 여호와의 궤가 어떻해 자기 땅 에벤에셀에서는 아무 일도 안하실 수가 있는 것일까?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주께서 자신을 스스로 내주어 무력한 상태로 십자가에 못박혀 

모든 수치와 조롱과 고통속에서 죽어 가신 것과 동일한 맥락일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아무 일도 하시지 않음은 자기 백성의 죄로 인해 고통하시며 죽어가시는 

현상이시기 때문입니다. 삼만 명이나 죽어가는 그 집단적인 고통을 무력하게 다 당하신 셈이십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빼앗긴 여호와의 궤가 거기서 무슨 일을 하리라곤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나 

여호와께서는 소리 소문없이 밤의 정적가운데 은밀히 그러나 그 일하심이 이른 아침 선명하게 나타나도록 하십니다.

 

예수의 시체는 무덤에 계셨으나 그의 영은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 제자들은 전혀 상상조차 못했으나 

주의 영은 사망과 음부의 문을 여시고 박살 낸 사단의 머리와 두 손목을 사망과 음부의 문지방에 던져 놓고 아침 

일찌기 부활하십니다 

 

스스로 당신의 손목을 결박 당하사 못 박히심으로서, 머리엔 고통스러운 가시관을 쓰심으로서 

사단의 손목과 머리를 끊으신 셈이십니다.이것이 여호와의 전능하신 통치이십니다. 

십자가는 구약에도 곳곳에 숨겨져 있었으나 그 십자가의 통치 비밀을 

확연히 드러낸 곳은 주께서 못박히신 갈보리입니다

이 여호와의 통치를 알아 갈수록 저마다의 정과 육을 십자가의 주와 함께 못박힘으로서 

모든 혼적인 기대와 갈망과 야망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이 모순과 부조리의 상황에 던져진 성도들은 누구라도 자신의 연약함과 미래의 불확실성에 에워 쌓입니다

이로 인해 깃드이는 두렴과 우울과 염려와 침체의 모든 증후군들을 뚫고 나갈 수 있는 길은 

십자가의 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주만큼 모순과 부조리 속에 죽으신 분은 없으셨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셨듯이 주를 

믿는 자들이 겪는 모든 크고 작은 모순과 부조리로부터도 살려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은 할 수 없으나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께서는 능히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넉넉히 이기도록 능력으로 도우십니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들에게 명하신 것은 자신의 탐심과 정욕과 목숨에 지지 말고 이기는 자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성령과 진리로 이긴 자들이지 신천지 이단처럼 육신의 

지혜와 사악한 거짓 영의 도모로 이기려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서 아무 일을 하시지 않으신 건 이 통치 비밀을 알리기 위해서가 아닐까 합니다

다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여호와를 무지한 생각과 육과 정으로 섬겨서는 안된다는 걸 가르치기 위함이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는다는건 하나님의 십자가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전능자께서 자기 백성의 죄를 남몰라라 하시지 않고 자기 십자가로 여기사 전능하심을 보좌에 내려 놓고 

진짜 진짜 무력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다는 실화를 믿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엔 부활하신 주의 영이 있어 사나 죽으나 부하나 가난하나 종이나 주인이나 노동자나 사업주나 

성공하나 실패하나 자유 하도록 역사하십니다.

육과 정과 탐심의 집합소인 옛자아가 십자가의 주와 함께 못박혀 죽었다가 진리와 의로움과 

거룩함의 새 사람의 옷, 곧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 구원의 속옷도 입고 의의 겉옷도 입었기 때문입니다 

 

아침 일찌기 다곤 신전 문지방 사건을 보게 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그 신전에 들어가는 자는 오늘까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않는다 하니 그 무지한 생각은 지금도 활동합니다.

문지방이라 함은 밖의 세계에서 안의 세계와 교통할 수 있도록 발로 밟고 지나가는 곳입니다.

그런데 문지방를 밟지 않고 그 경계선을 그냥 너머갑니다

여기엔 이미 십자가의 주께서 사단의 머리와 두 손목을 절단 냈음에도 여전히 그것을 섬기려 하는 

죄인의 본성을 폭로 시키시려는 의도적인 뜻이 숨어 있습니다 

 

곧 죄의 종된 오래된 본성이 분명 사단의 머리와 손목이 절단 났음에도 그 노예 근성대로 여전히 사단이 두려워 

자기 발로 밟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허나 성경은 성도는 사단으로 상징되는 뱀과 전갈과 사자를 발로 누르거나 

밟을 수 있는 권세가 주어졌다고 증거합니다. 이전에는 없는 새 힘입니다

이 새 힘은 여호와의 궤가, 십자가의 주가 사단의 목과 두 손목을 절단 

내었음을 믿을 때 주어지는 자유와 기쁨과 해방의 담력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양의 문이라 하셨습니다. 이는 당신만이 이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하늘 보좌를 열어 

보여줌으로 하늘의 놀라운 선물들을 공급할 수 있는 유일한 문으로서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박살 난 사단의 머리와 두 손목이 내 인생에서 정복해야 할 땅의 문지방에 떨어져 

있다는 것을 날마다 인식하며 수시로 자기 발로 밟으며 문지방을 넘어갈 때 삶에 생기가 불어 옵니다

이렇게 내가 정복해야 할 내 인생의 문지방에 떨어져 있는 사단의 머리와 두 손목을 짓밟을 때 

비로서 죄악에 관영한 가나안 일곱 족속들을 처단할 수 있는 믿음의 담력과 말씀의 검이 주어집니다.

 

우리 중, 여호와의 궤를 빼앗긴 궁극적인 요인이 이스라엘이 죄에 관영한 가나안 일곱 족속들과 그들의 우상들과 

제단들을 박살내지 못한 결과 역으로 저들의 죄에 먹혀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자는 그렇습니다 

예수를 영접했다면 이제껏 예수께서 하신 모든 일들도 영접해야 하며 장래 일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 영접은 철저히 내 맘속에 영접하는 것으로 내 마음에 성령의 불과 말씀의 검이 던져지는 것입니다

기록된 성경 말씀을 성령의 인도하심속에 알아 가노라면 죄로 관영한 일곱 족속과 그것들이 섬긴 

우상터가 바로 만물보다 부패한 내 마음이였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동시에 여호수와를 대장 삼아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하여 숱한 전쟁을 치렀듯이 

내 마음에 죄악에 관영한 일곱족속과 우상들을 박살내는 영적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에 이르러 그 영광을 드러내셨듯이 일곱족속의 우상터였던 내 마음에 오신 주께서도  

전쟁에 강하고 능하신 만군의 여호와이신고로 그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전쟁 없는 거짓 평화와 자신 안에 죄악에 관영한 일곱 족속과의 실전을 

치르지 않아 무디고 녹슬고 이빠진 검을 따라가면 이기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당신의 전능하심의 부재를 느낄 때마다 

세상 모든 죄를 지시고 세상 죄덩어리가 되셔서 의로우신 아버지로부터 가장 싫어 버린바 되셨던 아들을 생각하게 

하옵소서.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끔찍한 두렴과 공포를 오직 아버지를 신뢰하는 믿음으로 이기신 당신의 유일한 

아들 예수를 생각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저로 인해 유일한 아들 예수를 대신 버리셔야만 했던 당신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감당할만큼만 느끼게 하옵소서. 저로서는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