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아비가일이 나발에게로 돌아오니 그가 왕의 잔치와 같은 잔치를 그의 집에 배설하고 크게 취하여 마음에 

기뻐하므로 아비가일이 밝은 아침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다가 37: 아침에 나발이 포도주에서 깬 후에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말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38: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자기를 위해서는 왕의 잔치 같은 잔치를 배설할 줄 아는 자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종들에게는 국물도 없는 

나발입니다. 임박했던 진노를 아슬아슬하게 피해간 줄도 모르고 크게 취하여 거나하게 기뻐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아비가일의 마음은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주님의 신부된 교회의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아비가일이 오늘 일을 말하려니 혹이라도 농담으로 듣거나, 술김에 다윗을 더 더욱 소리질러 경멸하다못해 

자신에게 술병이라도 집어 던질 것 같습니다. 이튿날 술 깬 남편을 보니 한없이 불쌍한데 이제는 마냥 기다리며 

품어줄 때가 아닌지라 자초지종 고하자 낙담되어 몸이 돌 같이 굳어집니다.

 

상식적으로 우리가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나발은 어제 죽어야 할 목숨이였으나 부인 덕분에 잘자고 일어나 아침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인의 말을 듣는 즉시 나 때문에 당신이 수고해줘서 고맙다거나, 이런 당신을 

붙혀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당연한 반응일 것입니다.

 

허나 그런 감격의 순간에 낙담합니다. 나발에게는 사랑과 감사와 섬김의 감수성이 아예 없는 것 같습니다. 부인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만 했더라도 낙심의 숨통이 트여 그렇게까지 몸이 돌처럼 굳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쩜 내 

주 다윗을 찾아가 잘못을 고하고 이후로는 내 주의 종으로 살게 해달라고 빌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나발은, 비록 여자일지라도 복수의 칼을 막도록 너를 내게 보내신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의 지혜를 칭찬한다고 고백

한 다윗과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지혜로운 부인을 날마다 곁에 두고 사는데도 나발은 그 여호와의 지혜를 보지 

못합니다. 그 지혜는 얼마든지 진노 중일지라도 긍휼을 베푸시는 여호와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나발은 부인 아비가일이 여호와 나라의 백성으로서  자기 집의 구원을 위하여 화목제물(고운가루로 만든 떡 이백

송이,포도주 두 가죽 부대,양 다섯 마리 죽여서 요리한 고기,볶은 곡식 다섯 세아,건포도 백 송이,무화과 뭉치 

이백 개)를 나그네 다윗에게 급히 드리고 온 것이 율법에 순종한 믿음의 행위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제 아는 것이라곤 <자기가 생각한 다윗이 진짜 다윗이 아니라>, 부인이 지금 들려준대로 <진짜 다윗은 이미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다윗을 몰라 보고 망령된 말과 미련한 행동을  했으니 

자신의 죄만 보여 그 죄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합니다.

 

근데 왜 여호와께서는 열흘을 기다리셨다가 치셨을까요?  만일 아비가일의 말을 듣는 순간 심정지되어 급사했다면 

아비가일이 얼마나 놀랬을까 싶습니다. 모든 식구들의 병문안을 받으며 작별을 준비할 시간을 주신 것일까요? 

비록 육은 죽을지라도 나발의 영혼만큼은 회개할 수 있도록 열흘 말미를 주신 것일까요? 그는 그 꽉 찬 열흘이 

지나가는 동안에 아주 미미하게나마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회개했을까요?


다윗의 후손 예수를 예표하는 다윗이 골리앗을 만군의 여호와 이름으로 싸워 승리했을 때, 소문으로 무심코 흘려 

듣지 않고 기억만 했어도 나발은 다윗이 보낸 소년들을 다윗이 자기 양 떼를 선대했듯이 그도 다윗을 선대했을 

것입니다. 

다윗의 소년들과 함께 다윗을 찾아가 오늘 이 좋은 날에 내 주의 종이 내 주 다윗 왕의 잔치를 배설하려 하오니 

내 집에 오셔서 맘껏 즐겨주시면 종의 영광이 되겠나이다 라고 간청했을 것입니다. 어차피 양 털 깎는 좋은 날에 

잔치할 것인데 못할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나발이 할 일이라곤 왕의 잔치 같은 큰 잔치를 배설함 말고 무엇이 있겠습니까?  

 

오늘날도 나발과 같은 자들은 가족 중 남편이나 아내나 아들이나 딸이나 부모님의 입을 통해 예수 이름을 수없이 

들어도 무심합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많은 날 동안 교회를 나가도 무심합니다.

십자가가 걸린 교회들이 늘상 눈에 보이고 언론.방송.인터넷.셀폰을 끼고 살기에 언제라도 맑은 정신으로 예수와 

교회와 성경에 관해 진심으로 알기를 원한다면 성령께서 돕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그리스도의 종들이 돕지 않겠습니까? 

 

삼 천년전 나발이 자기 곁에 주님의 몸된 교회라 할 수 있는 아비가일을 아내로 끼고 살았어도 늘상 무심하여 

불량한 바보로 살다 갔듯이 지금도 수많은 나발들이 그럴 것입니다.

그럼에도 확실히 다른게 있다면 율법 시대는 가고 지금은 구원의 날들인 은혜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사울시대는 가고 다윗시대가 왔듯이 그렇습니다.

그 옛날 나발과 죽음 사이에는 한 걸음이 있었다면, 오늘날의 나발과 같은 사람들에겐 죽음이 아니라 한 걸음만

다가가도 생명의 입구로 들어 설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럼에도 삼천년전의 나발이 영생복락을 택하지 못했듯이 지금 이 구원의 날이요 은혜의 때에도 태반이 율법 시대의 나발처럼 구원을 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가슴칩니다.

 

이것이 견딜 수 없도록 분하고 원통해 몸부림치며 하늘 보좌에 계신 아버지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부르짖는 

교회야말로 그리스도의 마음과 심장을 빼앗은 것입니다. 이미 이 천년전에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속죄와 화목의 피흘림이 갈보리 산으로 쏟아져 오늘날까지 한번도 멈추지 않고 넘쳐 흐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나발들과 영생 사이엔 한 걸음만 있을 뿐인데도 지옥으로 가고 있는 이 현실에 억울하거나 분하지 

않다면 죽은 교회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정작으로 예수를 마음의 중심 보좌에 앉히지 않으니 예수 잔치를 배설(예배)함에 기뻐하기보담은

이생의 자랑거리인 돈이나 상품이나 TV나 인터넷이나 예술 등을 더 즐거워하며 삽니다. 그래도 지금은 그 죄악들을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은혜와 구원의 날이니 속히 속히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 오길 기도합니다.

 

"39:나발이 죽었다 함을 듣고 이르되 다윗이 듣고 이르되 나발에게 당한 나의 모욕을 갚아 주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의 머리에 돌리셨도다 하니라 다윗이 

아비가일을 자기 아내로 삼으려고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말하게 하매 40:다윗의 전령들이 갈멜에 가서 

아비가일에게 이르러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당신을 아내로 삼고자 하여 우리를 당신께 보내더이다 하니 

41:아비가일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이르되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전령들의 발 씻길 종이니이다 하고 

42:아비가일이 급히 일어나서 나귀를 타고 그를 뒤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전령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

 

나발의 죽은 소식을 듣게 된 다윗은 나발에게 당한 나의 모욕을 갚아주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해주신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언제는 의로운 분노로 그 집안을 치는 것이 공의로운 일이라 여겼는데 나발의 죽음 앞에서 

다윗은 자기가 굳이 거룩한 분노의 칼을 휘두르지 않아도 여호와께서 치시는 것을 경험하니 생각이 전환된 것입니다. 

 

여호와를 맛보아 경험하기 전에는 자기 칼에 사람을 쓰러뜨린 일이 의로운 분노의 행위라 생각합니다. 허나 

여호와를 진정 맛보게 되면 그것이 악한 일이였노라고 실토하게 되어 있습니다.우리 중 심판주가 될 자는 심판주 

한 분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 의로 교만한 것보다 더 무서운 죄는 없습니다.

 

다윗은 자기로하여금 악한 일을 막게한 아비가일을 아내로 삼고자 합니다. 자신의 분노를 영육간의 먹거리로 

신속히,눈 녹둣이 잠재워준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하다면 아비가일은 여종의 말을 여호와의 말씀으로 알아 듣는 다윗의 경건함에 감동 받지 않았을까 합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의 청혼을 전하는 전령들에게 일어나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하는 말을 들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전령들의 발 씻길 종이니이다"

 

이 말을 빈부귀천을 논하는 율법이 아닌 차별이 없는 복음으로 듣노라면  내가 다윗 왕의 왕비일지라도 왕의 

종들의 발을 씻어 주는 종이 될터인즉 왕의 종들도 다투지 말고 서로 발을 씻겨 주는 자들이 되어달라는 간청으로 

들립니다.

나발의 불통 속에서도 삼천 마리 양들과 천 마리 염소를 경영하기까지 많은 종들을 경험한 아비가일은  많은 

종들이 시기 질투로 싸우지 않고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자가 되도록 본을 보이며 살지 않았나 싶습니다 ~^^

 

예수께서 오셔서 아무도 먼지로 더럽혀진 발을 씻겨주지 앉자 손수 일어나 발을 닦이신 후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고 하셨습니다. 


주님!

내 속이 비좁아 발을 씻어 달라고 내밀어도 씻겨주기를 거부한 내 악을 보게 됩니다.

주의 피로 용서해주옵소서.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