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그것이 바로 진리였습니다!"

                                                                               곽동기님의 체험수기


무슨 거창한 이야기도 아니고 특별할 것도 없지만, 힘겨웠던 제 삶을 통하여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육체적 고통으로 약을 찾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졸업 후 허리요통이 오면서부터였습니다. 그 후 군대 제대 후에는 그것이 척추디스크로 발전했고, 그뿐만 아니라 목디스크 증세, 축농증, 어지럼증, 방광염 등으로 2년을 휴학하고서야 겨우 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런데 졸업과 동시에 특채로 대기업에 서류와 함께 면접도 합격했지만, 난데없는 폐결핵이라는 진단으로 저는 또다시 불합격처리 되었습니다. 그 당시 어려운 집안 살림을 생각하면 어머니께 무척 죄스럽고, 또 정신적으로도 힘겨운 좌절감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절에서 염불을 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저는 불교와 인연이 되었습니다.

염불을 시작한지 6개월쯤 지났을 때 저는 문득 언제나 아픈 제 삶이 참 허망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한 번 뿐인 이 인생을 나처럼 힘겨운 사람들, 육신의 고통으로 좌절하는 사람들을 돕는데에 바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그동안 제가 늘 찾던 삶의 가치 실현이자 또한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삶의 가치 실현을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건강을 회복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건강을 회복하고 나면 곧바로 한의대에 들어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물리치료나 침, 뜸, 한약 등등의 치료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차도가 없었고, 급기야 유명한 의사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결국 경제적으로도 바닥이 나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이번엔 돈이 들지 않는 식이요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한 끼를 현미와 함께 완전 채식만 하고 간식을 전혀 먹지 않는 생활을 1년여를 했는데, 많이 힘든 때도 있었지만 조금씩 몸이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즈음엔 또 친구의 소개로 학원 강사도 하게 되어, 덕분에 규칙적인 활동과 함께 경제적으로도 약간 숨통이 트이면서 저는 점차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흐르자 육체적 정신적으로도 상당한 자신감을 회복하게 되어, 저는 마침내 모든 것을 정리하고 제 꿈을 이루기 위한 한 걸음을 성큼 내디뎠습니다. 한의대에 들어가기 위해 왼종일을 앉아 책과 씨름하며 공부를 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곧 너무 성급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몇 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재발한 허리요통, 목디스크, 심한 위염으로 인한 구토, 두통 등으로 그만 쓰러져버린 것입니다.

사실 이때가 저로선 마지막으로 공부할 수 있는 시기라 여겼고, 그래서 최선을 다했지만, 몸이 아파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포기하게 되면서, 저의 정신적 좌절감은 상당히 컸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건강한 몸으로 살아가기를 바랐고, 그를 위하여 제가 의사가 되는 것이 진정한 삶의 가치 실현이라 여겼는데, 그것이 물거품이 되고 나니, 감당할 길 없는 좌절감으로 저는 거의 6개월을 몸살로 끙끙 앓았습니다.

이후로 저는 삶에 별로 의욕이 없었습니다. 집에 늘 혼자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집이 점점 감옥처럼 느껴졌고, 밥을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밖에 나가 보아도 인생의 패배자라는 자괴감 때문에 사람을 만나는 것이 즐겁지 않았습니다. 나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졌고, 지금 생각해 보면 우울증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13층 베란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잦았습니다. 쓰레기 같은 삶을 종결짓고 싶었던 것입니다. IMF때 많은 사람들이 자살했다고 하는데, 그들의 절망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해가 질 무렵 석양의 노을과 함께 말없이 흐르는 낙동강을 우두커니 바라보노라면, 우울하고 절망적인 느낌이 더욱 엄습해 와서 금방이라도 뛰어내릴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늘 그랬던 것처럼 단지 충동적인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누군가가 내 등을 미는 것 같은, 그러니까 머지않아 죽음이 곧 현실화 될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이 섬뜩하게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고,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기에 부여잡듯 집에서 수년 전에 했던 염불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몇 개월 동안을 세 끼 밥 먹고 자는 것 외에는 하루 종일 염불을 하고 나니 계속되던 자살 충동은 점차 사라졌고,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어갔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몸에서 피부병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병원에 가보니 원인을 알 수 없는 피부염이라 하더군요. 그것을 병원에서 지어주는 약으로 조금 다스리기가 바쁘게 또 다른 고통이 저를 엄습했습니다. 갑자기 오른쪽 복부 그러니까 간이 있는 부위에 심한 통증이 왔는데, 기력이 없어 겨우 차를 타고 병원에 가서 초음파 검사, 위내시경 검사, 혈액검사 등을 했지만, 의사는 ‘정상’이라는 검사결과만을 내밀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집에 돌아와 계속 염불을 하는데, 점점 통증은 심해지고 어지럼증까지 겹쳐 외출은커녕 걷기조차 힘든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기억하건대, 대문 밖을 나서서 10분을 채 걷기도 전에 땅바닥에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라,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이유도 없이 몸무게도 5∼6㎏이나 빠졌고, 그러다 보니 그나마 진정되었던 마음도 다시 혼란스러워져, 꿈은 악몽으로 가득했습니다. 눈을 떠도 괴롭고, 눈을 감고 있어도 괴로움이 지속되는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이리 저리 아는 인연들에게 전화를 해보던 끝에 우연히 전라도 광주에 있는 광륵사를 알게 되었고, 전화로 상담을 하니 친절하게 응해 주셔서 여러 번 자주 전화 상담을 하게 되었는데, 제 상태가 상당히 심각해 보였는지 스님은 한 번 광주로 와서 직접 만나 보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저는 30분 이상 걸을 수가 없었고, 차를 탈 수도 없을 정도로 어지러웠습니다. 그래서 몇 개월이 지나 따뜻한 봄이 되어, 힘겹지만 몇 시간 차를 탈 수 있는 상태가 되어서야 겨우 광주로 갈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제가 처음 광륵사에 들어섰을 때 저를 본 사람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암투병 환자’ 혹은 ‘시한부 인생’쯤으로 저를 생각했답니다. 정말이지 그땐 누가 봐도 깡마르고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이었습니다.

절은 작고 허름한 절이었지만, 인간미가 있는 분들로 말미암아 저는 그만 눌러앉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젊은 청춘에 생면부지의 곳에 와서 ‘내일’도 없이 지내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서글픈 마음이 북받쳐 새벽에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러나 곧 과거와 미래를 잊고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하루 세 번의 예불과 함께 간단한 일들을 돕고, 남는 시간에는 염불만 하면서 오직 몸이 건강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렇게 2년이 지났을 때 절 생활과 염불을 통한 몇몇 체험 덕분인지 몸과 마음이 제법 편안해졌고, 그래서 2003년 8월15일 부산으로 돌아가기로 계획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제 생(生)의 계획과 물꼬가 돌려지는 우연한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하여 제 안에서는 저 자신에 대한 전혀 다른 이해가 조금씩 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제 안에서는 마음의 평온함이 늘 지속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마음의 평화가 깨어지는 순간이 온 것입니다. 저는 이런 경우를 정말 싫어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화’ 또는 ‘분노’ 입니다. 그럴 때면 저는 어김없이 염불을 했고, 그러면 또 다시 희열과 함께 분노는 사라지고 마음의 평온함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이 분노만 잘 조절하면 지속적 평온함 속에 있게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곤 했지요. 그러나 이 문제는 끝까지 해결되지 않았고, 염불이라는 처방에만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분노→염불→고요→분노→염불→고요’라는 수레바퀴를 다람쥐처럼 맴돌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하게 불교신문을 통하여 김태완 교수님의 <무심선원> 홈페이지를 알게 되었고, 여기 저기를 훑어보다 링크사이트에 있는 <도덕경 모임>에도 들어가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비원단상>에 있는 ‘신심명(信心銘) 강의’를 읽게 되었는데, 쉽고 재미있어서 프린트를 해서 제 방에서 혼자 읽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읽어나가다가 문득, 제가 하고 있는 방식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염불을 통해 제 마음을 ‘분노’에서 ‘고요’로 바꾼다는 이런 설정 자체가, 그리고 ‘분노’와 ‘고요’라는 대립적 구조 자체가 이미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 ― 중도(中道) ― 와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그리고 있음을 알았고, 그 순간 저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거의 두 해 반이나 계속해 오던 염불을 그 날부터 그만둔 것입니다. 그 날 이후부터 저는 남는 시간에 염불 대신 15분 거리에 위치한 납골당에 가서 그냥 앉아있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신심명 강의’를 읽은 지 얼마 후 ‘도덕경 강의’도 읽게 되었는데, 두 번째 읽던 중 강의 첫 장의 ‘nothing’이라는 활자에 제 시선이 멈추었습니다. 도덕경 강의의 그 많은 이야기가 결국 이 하나의 단어 ‘nothing’을 설명하고 있음을 알았고, 그 순간 알 수 없는 전율과 충격으로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리고는 눈물을 훔치고 절 밖으로 나와 김기태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선생님, 저는 광주에 사는 곽동기라는 사람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말씀하세요.”
“도덕경 강의의 핵심이 ‘nothing’인 것 같은데, 선생님 맞습니까?”
그런데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저는 공중전화 수화기를 붙들고 길바닥에서 엉엉 울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 nothing이라니, 너무 허탈합니다…….”
선생님은 당황스러웠는지 아무 말씀도 않으셨고, 저 역시 갑자기 터진 눈물이 멈추지 않아 당황해 하며 다음에 전화 드리겠다고 말씀드리고는 수화기를 내려놓았습니다.
그 날 이후로 특별한 존재가 되려는 마음을 내려놓기 시작했습니다. 염불을 하지 않아도 제법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2년 동안 보아왔던 마당의 잔디가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게 다가왔고, 거기에 핀 조그만 해바라기와 함께 모든 것이 새롭고 신선한 생동감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8월이 되자 부산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막막했고,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이 곳에 올 때처럼 ‘창백한 암환자’로 보여질 정도는 아니지만, 여전히 병약한 상태라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몸에 대한 집착, 건강에 대한 집착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부산으로 갔고, 얼마 후 뵙고 싶었던 김기태 선생님과 부산역 광장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무엇보다 병약한 저의 몸에 대해 하소연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날 있었던 도덕경 모임 강의 중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곽동기씨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진정으로 아파본 적이 없고, 고통이 무언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저는 솔직히 섭섭했습니다. 적어도 15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제가 먹은 약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그것도 모자라 천년 된 무덤에 가서 흙을 파와선 밤 12시에 촛불을 켜놓고 빨간 경면주사에 참기름을 개서 직접 부적(符籍)까지 써본 놈인데, 세상에 이렇게 말할 수가 있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제가 무얼 놓치고 있었는지를 알았고,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제 육신의 고통에 대해 ‘Let it be’로 대응했고, 그러다가 가을이 왔습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10월16일, 지하철역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가는 도중에 문득 ‘법(法)’이니 ‘진리’니 하는 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제 육신의 고통임을 알게 되었는데, 그러니까 따로 ‘법’이니 ‘진리’니 하는 것이 없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이 제가 처음으로 저의 삶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이었습니다. 약간의 흥분과 충격 속에 제가 제 자신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왜 김기태 선생님이 책 제목으로 ‘아, 여기!’라고 정하셨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지나온 39년 동안 저는 단 한 번도 저 자신을 받아들여 본 적이 없었음을 알게 되었고, 단 한 번도 진정으로 사랑해 본 적이 없었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한 번도 저는 저 자신과 함께 살아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제 삶은 ‘자학의 삶’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제 기준에 못 미치는 이 육신을 닦달하고, 정신적으로 고문하면서 한없이 학대했던 것입니다. 제가 만든 허구의 기준 때문에 병 든 이 몸은, 진정 사랑받았어야 할 이 몸은 도리어 멸시당하고 오랜 자학 속에 시달려왔던 것입니다. 아,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살았던 지난날의 삶들을 생각하며 저는 오랜 동안 울고 또 울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부러웠습니다. 몇 년 전 수십억 원으로 공장을 지어 제조업을 한다고 뛰어다니던 친구가 어느 날 부도가 나서 다른 사람에게 공장을 인수해주곤 좌절감에 빠져 죽고 싶다며 눈물을 흘릴 때도 제 속마음은 그가 부러웠습니다. 그리고 삶의 궁극적 의미를 찾아 힘겨운 수행(修行)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그 결과와는 상관없이 그저 부럽기만 했습니다. 제 인생의 경우 육신의 고통으로 시도조차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거나 중도 하차했기 때문입니다. TV를 통해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파 누워있는 제 몸뚱어리는 한 점의 가치도 없는 그런 존재로 여겨졌고, 한없이 초라했습니다. 그래서 늘 생각했습니다.
‘아, 내 삶의 조건이 조금만 변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는 세상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삶의 가치와 의미와 목적을 실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제 자신조차 돕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제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가치와 관념의 장난들 때문에요…….

이제 비로소 저는 쉬기 시작했습니다. 찾고 추구하는 짓을 그만두기 시작했습니다. 삶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은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습니다.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바로 지금 이 순간 글을 쓰고 있는 여기에 있을 뿐입니다. 아니, 우리 자신이 이미 그것입니다.
아, 저는 이제 더 이상 제 자신에게 강요하지 않고 닦달하지 않으며, 이웃과 세상을 보는 눈도 따뜻해짐을 느낍니다. 옛날과 똑같은 장소에 홀로 앉아 있지만, 외로움과 우울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만약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자신의 무가치함과 좌절을 느끼신다면, 그 상황을 버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삶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입니다. 참된 평화를 만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마음 속에서 비교하는 마음만 사라지면 있는 그대로의 지금이 최상급입니다.
모두 행복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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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세상을 여행하다가 읽은 글입니다.
글쓴이와 삶의 체험이 다르기에 우리가 모두 이해하면서 읽기는 어려울 수도 있지만
생면부지 다른 분의 체험을 거울로 삼아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그냥 한번 옮겨 봤습니다. (고형옥)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3-27 1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