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이 즐겨 부르는 '만남'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람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아, 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다소 내용이 애매하지만
어쨌든 너와 나의 만남이 일시적이 아니라 영원하기를 바라는 사랑을
노래하기에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배불리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를 채울 정도로 남았다는 이야기는
'나눔'의 상징으로 잘 알려진 대표적인 기적입니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 교 교우들이 자기가 가진 재물을
주님처럼 나눌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잘살 수 있다는 예화로 이 이야기가 가장 많이 인용됩니다.

물론 주님은 이 기적을 통해 '나눔'의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의 깊게 살펴보면 주님께서 '나눔'의 기적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만남'의 소중함을 더욱더 강조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많은 군중이 모이자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시는데
제자들은 불가능하다고 변명합니다
.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것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
제자들의 대답은 '나눌 수 없는 이유'의 보편적인 세 가지 변명입니다.
그것은 '외딴 곳'이라는 공간적 변명과
'시간이 늦었다'는 시간적 변명과 '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라는 소유적 변명입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변명은
오늘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이것이 불가능함을 변명하는
우리들의 입에서도 똑같이 흘러나옵니다.

   "난 시간이 없어"
"우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구"
"나누기에는 내가 가진 것이 너무 없어"

주님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런 시간적·공간적·소유적 변명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입니다.

주님은 '나눔'의 사랑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만남'의 절대성이 앞서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십니다.

주님은 오천 명의 군중을 하나의 군중으로만 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고통을 '측은한 마음'으로 보셨으며
따라서 그들과의 만남을 절대적인 만남으로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사랑은 나눔입니다.
그러나 그 나눔이 참사랑으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나눔'의 행위보다 먼저 '만남'의 행위에
더 운명적인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만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만나셨습니다.
주님에게 있어 너와 나는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입니다.
또한 나와 주님은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주님과의 만남이 노래의 가사처럼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감히 바랄 수는 없지만 주님과 나는
함께 영원을 태우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해 너를 사랑해'라는 노래말은
지금 이 순간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사랑의 고백인 것입니다.

최인호 베드로/작가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05-19 1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