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종교란은 천주교,개신교,불교 빛사랑으로 분류가 되어있습니다.
각 카테고리에 맞게 선별하여 글을 올리시면 됩니다
용서
오늘 복음의 내용은 주의 기도입니다
기도의 내용 중에서 용서에 대한 이야기가 강조가 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를 하지 않으면
하느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 때문에 많은 분들이
나를 화나게 한 사람들을
억지로 용서하는
자기분노를 억압을 하는
그리고 용서하는 척 합니다
주님께서 용서에 대하여 강조를 하신 것은
당시 사람들이 용서하지 않는
즉 보복을 정당화하는 분위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팔레스티나에서는
보복이 정의로운 행동으로 인정받고 있고
용서를 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용납이 되지 않는 분위기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과 아랍민족은
구약의 성전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우리의 경우는 용서의 영성이 내용을 달리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용서는 영성적인 관점에서 생각을 해야합니다
즉 내적으로 진정으로 용서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가 용서를 하는데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은
하느님 때문에 용서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용서가 과연 진정한 용서인가?
겉으로는 용서하였다고 하지만 속으로도 용서하는 것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아이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형이 동생과 싸웠는데 네가 형이니까 참아야지 한다면
형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동생이니까 내가 참아야지 합니까
앞에서는 네하고 대답을 하지만 뒷전에서는 몰래 팹니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신자니까 하느님이 참으라고 하셨으니까 참아야지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아지면 눌렀던 감정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용서가 되는가?
두 가지, 감정의 해소와 생각과 관점을 바꾸는 이해입니다
마음이 풀어져야 용서를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할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감정의 해소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이 상대방을 패는 것인데
* 상상 속에서 신나게 패고 욕해 주는 것입니다
* 또 하나는 오감으로 푸는 것입니다
* 눈으로 푸는 것, 즉 영화를 보거나 하는 볼거리를 통하여 푸는 것
* 입으로 푸는 것, 먹거나 잡담을 하는 것, 노래도 여기에 들어갑니다
* 귀로 푸는 것, 음악을 듣는 것
* 코로 푸는 것, 향수 냄새나 좋은 냄새를 맡는 것
*온 몸으로 푸는 것, 춤을 추거나 격렬한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 두 번째는 이해의 단계입니다
즉 이렇게 마음의 분을 풀어낸 다음에는
반드시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내가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감정해소를 먼저 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아이들이 화가 났는데 이해하고 사랑하라고 하면 그게 됩니까
화풀이를 먼저 하고 그 다음이 이해죠
사람은 누구나 화가 풀리고 난 다음에야
자신이 화를 낸 것이 사실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깨달음이 온 다음에야
용서를 하거나 미안한 마음을 가지거나
화를 내는 나 자신의 문제를 보거나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정의 해소를 하고
그리고 이해와 깨달음이라는 마음의 수행을 계속하면서
점차 분노가 줄어들고 연민의 정이 많아져 가는 것입니다
-도반신부님 강론 중에서-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05-19 15:26)
오늘 복음의 내용은 주의 기도입니다
기도의 내용 중에서 용서에 대한 이야기가 강조가 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를 하지 않으면
하느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 때문에 많은 분들이
나를 화나게 한 사람들을
억지로 용서하는
자기분노를 억압을 하는
그리고 용서하는 척 합니다
주님께서 용서에 대하여 강조를 하신 것은
당시 사람들이 용서하지 않는
즉 보복을 정당화하는 분위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팔레스티나에서는
보복이 정의로운 행동으로 인정받고 있고
용서를 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용납이 되지 않는 분위기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과 아랍민족은
구약의 성전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우리의 경우는 용서의 영성이 내용을 달리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용서는 영성적인 관점에서 생각을 해야합니다
즉 내적으로 진정으로 용서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가 용서를 하는데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은
하느님 때문에 용서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용서가 과연 진정한 용서인가?
겉으로는 용서하였다고 하지만 속으로도 용서하는 것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아이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형이 동생과 싸웠는데 네가 형이니까 참아야지 한다면
형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동생이니까 내가 참아야지 합니까
앞에서는 네하고 대답을 하지만 뒷전에서는 몰래 팹니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신자니까 하느님이 참으라고 하셨으니까 참아야지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아지면 눌렀던 감정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용서가 되는가?
두 가지, 감정의 해소와 생각과 관점을 바꾸는 이해입니다
마음이 풀어져야 용서를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할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감정의 해소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이 상대방을 패는 것인데
* 상상 속에서 신나게 패고 욕해 주는 것입니다
* 또 하나는 오감으로 푸는 것입니다
* 눈으로 푸는 것, 즉 영화를 보거나 하는 볼거리를 통하여 푸는 것
* 입으로 푸는 것, 먹거나 잡담을 하는 것, 노래도 여기에 들어갑니다
* 귀로 푸는 것, 음악을 듣는 것
* 코로 푸는 것, 향수 냄새나 좋은 냄새를 맡는 것
*온 몸으로 푸는 것, 춤을 추거나 격렬한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 두 번째는 이해의 단계입니다
즉 이렇게 마음의 분을 풀어낸 다음에는
반드시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내가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감정해소를 먼저 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아이들이 화가 났는데 이해하고 사랑하라고 하면 그게 됩니까
화풀이를 먼저 하고 그 다음이 이해죠
사람은 누구나 화가 풀리고 난 다음에야
자신이 화를 낸 것이 사실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깨달음이 온 다음에야
용서를 하거나 미안한 마음을 가지거나
화를 내는 나 자신의 문제를 보거나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정의 해소를 하고
그리고 이해와 깨달음이라는 마음의 수행을 계속하면서
점차 분노가 줄어들고 연민의 정이 많아져 가는 것입니다
-도반신부님 강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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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25 22:22:16 (*.158.101.200)
송미선님은 믿음이 깊은것 같습니다. 저는 나이롱 신자인데 한때 교리교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 하나. 제가 가르쳤던 학생들 중에서 신부님이 한명 나왔거든요.저 때문에 된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게 배운 사람 중에서 사제가 나왔다는 것을 은총으로 생각합니다.용서, 좋은 얘기인데 저는 아직도 용서 못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성당에서 만났고 한때 친한 친구였는데. 사연은 복잡하지만 용서할 기회, 아니 서로 이해할 기회가 올 수 있을지.제가 마음을 바꿀수 있는 날이 올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004.08.26 06:33:38 (*.189.206.152)
경옥 후배
자주 보니 너무 좋네요.
여기에 글올리려면
외쪽 상단에 아이디라고 쓴 네모 칸에 아이디쓰고
그밑 비번이라고 쓴 네모 칸에 비밀번호 쓰고 로그인 클릭하면
화면에 쓰기라는 글자가 나옵니다.
그러면 글쓰고 다쓴 후 보내기 클릭하면 되지요.
좋은글 많이 올려주세요.
자주 보니 너무 좋네요.
여기에 글올리려면
외쪽 상단에 아이디라고 쓴 네모 칸에 아이디쓰고
그밑 비번이라고 쓴 네모 칸에 비밀번호 쓰고 로그인 클릭하면
화면에 쓰기라는 글자가 나옵니다.
그러면 글쓰고 다쓴 후 보내기 클릭하면 되지요.
좋은글 많이 올려주세요.
2004.08.26 07:01:18 (*.189.206.152)
신창섭님
전 정말 믿음이 없어요.
열심히 성당나가지도 않고요
정말 부끄럽답니다.
저도 주일학교 교사를 한지 벌써 20년이 지났습니다.
그땐 애들이 어리니까
애들 몰고 주일학교 가는김에 선생노릇을 5년 했지요.
그땐 저에겐 참 힘든 시절이라 성당에서 살다싶이 하면서
시름을 잊었지요.
그땐 한참 젊은 30대 초반이라 성당(절대 신앙은아니구요)아니면
그 돌파구가 무엇이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답니다.
봉사한답시구 많은 시간 성당에서 보내며
좋은 친구 만나서 위로와 도움 많이 받았지요.
20년이 지난 지금도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살지만
깊은 우정을나누며 가끔씩 만난답니다.
창섭님
용서하는 일 은 정말 쉽지가 않지요.
천성이 너그럽거나 무디거나
아니면 하느님 은총으로만 용서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항상 제마음에 부담스러운 일은 견딜수가 없어서
상대를 이해하도록 노력하거나 아니면 무시해버리며
감정정리를 한답니다.
그래서 아무리 나에게 상처를 많이준 사람도 미워지지않아요.
이는 제가 생각해도
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신 은사 같아요.
너무 감사하죠.
그런데 억울한일은 나를 분노케 하는데
요즘은 별로 억욱할 일도 없네요.
이것 또한 감사한 일이죠.
저의 생활신조는
* 늘 감사하라
*늘 기쁘게 살라
이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들의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의 행복한 삶이
그분을 제일 기쁘게 해드리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내가 어버이된 입장으로 생각해본건데
아마 맞지 싶습니다.
창섭님의 마음의 평화위해서 화살기도 드릴께요.(:aa)(:ab)(:ac)(:l)(:f)(8)
전 정말 믿음이 없어요.
열심히 성당나가지도 않고요
정말 부끄럽답니다.
저도 주일학교 교사를 한지 벌써 20년이 지났습니다.
그땐 애들이 어리니까
애들 몰고 주일학교 가는김에 선생노릇을 5년 했지요.
그땐 저에겐 참 힘든 시절이라 성당에서 살다싶이 하면서
시름을 잊었지요.
그땐 한참 젊은 30대 초반이라 성당(절대 신앙은아니구요)아니면
그 돌파구가 무엇이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답니다.
봉사한답시구 많은 시간 성당에서 보내며
좋은 친구 만나서 위로와 도움 많이 받았지요.
20년이 지난 지금도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살지만
깊은 우정을나누며 가끔씩 만난답니다.
창섭님
용서하는 일 은 정말 쉽지가 않지요.
천성이 너그럽거나 무디거나
아니면 하느님 은총으로만 용서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항상 제마음에 부담스러운 일은 견딜수가 없어서
상대를 이해하도록 노력하거나 아니면 무시해버리며
감정정리를 한답니다.
그래서 아무리 나에게 상처를 많이준 사람도 미워지지않아요.
이는 제가 생각해도
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신 은사 같아요.
너무 감사하죠.
그런데 억울한일은 나를 분노케 하는데
요즘은 별로 억욱할 일도 없네요.
이것 또한 감사한 일이죠.
저의 생활신조는
* 늘 감사하라
*늘 기쁘게 살라
이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들의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의 행복한 삶이
그분을 제일 기쁘게 해드리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내가 어버이된 입장으로 생각해본건데
아마 맞지 싶습니다.
창섭님의 마음의 평화위해서 화살기도 드릴께요.(:aa)(:ab)(:ac)(:l)(:f)(8)
2004.08.26 17:53:13 (*.133.115.225)
미선아, 또 생각으로 이끌어 주는 글이다.
미움, 용서, 화해... 등등 내 머리안에서 종종 방황하는 단어들이지.
나의 체험을 말하자면
누가 정말 밉고 뻔때 없을때, 난 참지 않고 실컨 있는 힘 총동원하여
더 이상 할수 없을 때까지 미워 해버려.
그러다보면 미워하는 내 자신이 비겁하고 싫어지는 단계까지 도달 !
그때 진정시키고 서서히 화해와 용서가 참됨을 떠올리며
가능한 이 화해와 용서란걸 오래 끌지 않고 실천에 옮기는데 노력한다.
빠를수록 더 큰 용기가 필요한데 그땐 하느님이 꼭 거들어 주시거든.
그 후의 느낌은 말 안해도 알만하지? 네말대로 그저 감사.
미움, 용서, 화해... 등등 내 머리안에서 종종 방황하는 단어들이지.
나의 체험을 말하자면
누가 정말 밉고 뻔때 없을때, 난 참지 않고 실컨 있는 힘 총동원하여
더 이상 할수 없을 때까지 미워 해버려.
그러다보면 미워하는 내 자신이 비겁하고 싫어지는 단계까지 도달 !
그때 진정시키고 서서히 화해와 용서가 참됨을 떠올리며
가능한 이 화해와 용서란걸 오래 끌지 않고 실천에 옮기는데 노력한다.
빠를수록 더 큰 용기가 필요한데 그땐 하느님이 꼭 거들어 주시거든.
그 후의 느낌은 말 안해도 알만하지? 네말대로 그저 감사.
2004.08.26 18:10:47 (*.133.115.225)
임 경옥님,
올려 주신 이 중섭 신부님의 글 매우 감명 깊습니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내 스스로 해야 할 일에
관심 기울이고 전심전력 함이 이상적이고 바람직 하지요.
그러나 살면서 유감스럽게 그에 걸림돌이 생기는 때가 있더군요.
남을 의식하지 않을 때 제일 자유로워짐을 알면서도.
올려 주신 이 중섭 신부님의 글 매우 감명 깊습니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내 스스로 해야 할 일에
관심 기울이고 전심전력 함이 이상적이고 바람직 하지요.
그러나 살면서 유감스럽게 그에 걸림돌이 생기는 때가 있더군요.
남을 의식하지 않을 때 제일 자유로워짐을 알면서도.
2004.08.26 18:56:33 (*.73.216.236)
이종심 선배님 저 위글 앞에 글들 입니다. 제가 댓글에 다느라 그랬는데 연결해 읽으세요
전 로그인해도 쓰기란이 안보여서 다시 노력하겠습니다.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마라
2데살 3,6-10.16-18
오늘 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데살로니카의 일부신자들을 엄하게 꾸짖는 내용이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잘못된 생각으로 일도 하지 않으며 공리공론만 일삼는 사람들에게 따끔한 경고의 말을 던졌다.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마라'는 그 유명한 말이 그래서 나온 것이다.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마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단순히 열심히 일하라는 뜻 이상이다. 내게 맡겨진 일을 성실히 그리고 소신을 가지고 하는 뜻이다.
꿀벌의 세계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위계질서가 엄격하다. 예전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양반과 상놈의 신분이 정해져 있었듯이, 꿀벌의 세계도 역시 그러하다. 여왕벌, 수벌, 일벌의 구분이 확실하다. 여왕벌 한 마리를 중심으로 모든 벌들이 일치 단결하여 공동체를 형성한다. 여왕벌 한 마리에 여러 마리의 수벌, 그리고 무수히 많은 일벌들이 한 가족을 이룬다.
수정시기가 되면 여왕벌이 벌집을 나와 하늘로 높이 올라간다. 그 뒤를 수벌들이 쫓아 올라간다. 수벌은 여왕벌보다 등치도 작고 날개도 훨씬 약하다. 그래서 수벌이 여왕벌을 따라 올라간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마지막까지 따라 올라간 제일 강한 놈이 여왕벌과 교미를 한다. 이렇게 일단 여왕벌이 교미를 마치면 일벌들이 달려들어 수벌들을 모두 죽여버린다. 쓸데없이 식량만 축내기 때문이다.
일벌들은 비 오는 날을 빼면 거의 매일 꽃을 찾아 나선다. 만일 일하러 나가서 놀기만 하고 아무 것도 입에 안 물고 들어오면 문간을 지키는 문지기벌이 바로 그 자리에서 그 벌을 물어 죽인다. 이처럼 잔머리를 굴리는 일벌은 그 자리에서 죽음이다.
한 번 나가서 따오는 꿀의 양은 약 50mg 쯤 된다. 이것이 얼마나 되는 양인지 계산이 잘 안 될 것이다. 꿀 한 되를 기준으로 보자. 꿀 한 되를 만들려면 일벌 한 마리가 자그만치 4만 번을 외출해야 한다. 그렇게 나가서 입에 물고 온 꿀이 곧바로 꿀이 되는 것이 아니다. 밖에서 바로 따온 꿀에는 물기가 많으므로 그대로 두면 썩어서 식량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벌통 안에서 일하는 일벌들은 밖에서 따온 꿀을 하루에 30번 정도 삼켰다가 뱉어내는 작업을 되풀이하고, 또 날개로 부채질을 하여 꿀을 말리는 작업을 한다. 우리가 꿀 한 숟갈을 먹을 때, 적어도 꿀벌들이 수만 번 외출하여 피땀 흘려 모은 양식이라는 것쯤은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일하는 일벌의 수명은 한 달이다. 아무리 명이 길어도 일벌은 한 달 이상을 살지 못한다.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쇠진하여 죽는 것이다. 그 한달 동안 일벌들은 수명이 다할 때까지 쉬지 않고 일한다. 자신에게 맡겨진 몫을 남에게 떠넘기지 않고 부지런히 일한다. 헛 군데에 한눈 팔지 않고 그야말로 열심히 산다. 남을 속이거나, 내가 할 일을 남에게 떠넘기지 않는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리 인간은 어떤가? 아무래도 꿀벌보다 못한 것 같다.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것을 자신의 이익에다가 맞추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서로가 서로를 헐뜯는 세상이 되어 버렸고, '믿을 놈이 한 놈도 없다'는 한탄이 나오게 된 것이다. 적어도 꿀벌은 이렇게 하지 않는다. 부지런히 일하고 성실히 살겠다는 노력이 없기 때문에 사람이 꿀벌보다 못하게 된 것이다.
특별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꿀벌에게서 배워야 한다. '누가 뭐래도 내 자리에서 내가 맡은 일을 묵묵히 그리고 성실히 하겠다'는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 민주주의라는 것, 선진국이라는 것은 소리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 각자가 맡은 일을 충실히 이루려는 의지와 노력이 있을 때 민주주의도 가능하고 선진국도 가능한 것이다. 나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히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꿀벌의 삶에서 배울 점이다. 나에게 맡겨진 일상적인 일을 묵묵히, 성실히 그리고 끝까지 해내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자세이다. 이런 소신과 근성이야말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태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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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1주간 수요일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마라
2데살 3,6-10.16-18
오늘 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데살로니카의 일부신자들을 엄하게 꾸짖는 내용이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잘못된 생각으로 일도 하지 않으며 공리공론만 일삼는 사람들에게 따끔한 경고의 말을 던졌다.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마라'는 그 유명한 말이 그래서 나온 것이다.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마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단순히 열심히 일하라는 뜻 이상이다. 내게 맡겨진 일을 성실히 그리고 소신을 가지고 하는 뜻이다.
꿀벌의 세계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위계질서가 엄격하다. 예전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양반과 상놈의 신분이 정해져 있었듯이, 꿀벌의 세계도 역시 그러하다. 여왕벌, 수벌, 일벌의 구분이 확실하다. 여왕벌 한 마리를 중심으로 모든 벌들이 일치 단결하여 공동체를 형성한다. 여왕벌 한 마리에 여러 마리의 수벌, 그리고 무수히 많은 일벌들이 한 가족을 이룬다.
수정시기가 되면 여왕벌이 벌집을 나와 하늘로 높이 올라간다. 그 뒤를 수벌들이 쫓아 올라간다. 수벌은 여왕벌보다 등치도 작고 날개도 훨씬 약하다. 그래서 수벌이 여왕벌을 따라 올라간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마지막까지 따라 올라간 제일 강한 놈이 여왕벌과 교미를 한다. 이렇게 일단 여왕벌이 교미를 마치면 일벌들이 달려들어 수벌들을 모두 죽여버린다. 쓸데없이 식량만 축내기 때문이다.
일벌들은 비 오는 날을 빼면 거의 매일 꽃을 찾아 나선다. 만일 일하러 나가서 놀기만 하고 아무 것도 입에 안 물고 들어오면 문간을 지키는 문지기벌이 바로 그 자리에서 그 벌을 물어 죽인다. 이처럼 잔머리를 굴리는 일벌은 그 자리에서 죽음이다.
한 번 나가서 따오는 꿀의 양은 약 50mg 쯤 된다. 이것이 얼마나 되는 양인지 계산이 잘 안 될 것이다. 꿀 한 되를 기준으로 보자. 꿀 한 되를 만들려면 일벌 한 마리가 자그만치 4만 번을 외출해야 한다. 그렇게 나가서 입에 물고 온 꿀이 곧바로 꿀이 되는 것이 아니다. 밖에서 바로 따온 꿀에는 물기가 많으므로 그대로 두면 썩어서 식량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벌통 안에서 일하는 일벌들은 밖에서 따온 꿀을 하루에 30번 정도 삼켰다가 뱉어내는 작업을 되풀이하고, 또 날개로 부채질을 하여 꿀을 말리는 작업을 한다. 우리가 꿀 한 숟갈을 먹을 때, 적어도 꿀벌들이 수만 번 외출하여 피땀 흘려 모은 양식이라는 것쯤은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일하는 일벌의 수명은 한 달이다. 아무리 명이 길어도 일벌은 한 달 이상을 살지 못한다.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쇠진하여 죽는 것이다. 그 한달 동안 일벌들은 수명이 다할 때까지 쉬지 않고 일한다. 자신에게 맡겨진 몫을 남에게 떠넘기지 않고 부지런히 일한다. 헛 군데에 한눈 팔지 않고 그야말로 열심히 산다. 남을 속이거나, 내가 할 일을 남에게 떠넘기지 않는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리 인간은 어떤가? 아무래도 꿀벌보다 못한 것 같다.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것을 자신의 이익에다가 맞추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서로가 서로를 헐뜯는 세상이 되어 버렸고, '믿을 놈이 한 놈도 없다'는 한탄이 나오게 된 것이다. 적어도 꿀벌은 이렇게 하지 않는다. 부지런히 일하고 성실히 살겠다는 노력이 없기 때문에 사람이 꿀벌보다 못하게 된 것이다.
특별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꿀벌에게서 배워야 한다. '누가 뭐래도 내 자리에서 내가 맡은 일을 묵묵히 그리고 성실히 하겠다'는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 민주주의라는 것, 선진국이라는 것은 소리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 각자가 맡은 일을 충실히 이루려는 의지와 노력이 있을 때 민주주의도 가능하고 선진국도 가능한 것이다. 나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히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꿀벌의 삶에서 배울 점이다. 나에게 맡겨진 일상적인 일을 묵묵히, 성실히 그리고 끝까지 해내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자세이다. 이런 소신과 근성이야말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태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딴글이지만 좋기에 댓글에 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진 일상의 일을 묵묵히 그리고 성실히 한다면, 거기가 바로 주님을 만나는 자리가 된다.
우리는 쓸데없는 호기심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경우가 많다. '남들이 어떻게 사는가? 남들이 자기 일을 어떻게 하는가?' 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면서도 정작 '내가 내 일을 어떻게 하는가?' 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 중요한 것은 '내가 내 일을 어떻게 하느냐?' 이다.
앞으로는 '남이 어떻게 사는가? 남이 어떻게 일하는가?' 에 대해 신경을 좀 덜 쓰도록 하자. 그리고 '지금 내가 하는 일을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에 대해서도 너무 걱정하지 말도록 하자. 다만 '나에게 맡겨진 일을 어떻게 하면 끝까지 성실히 이루어낼 수 있을까?'에 관심을 쓰도록 하자. '지금 내가 하는 이 일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는 일이다' 라는 소신이 있어야 한다.
'내게 맡겨진 이 일을 끝까지 해내고야 말겠다'는 근성이 있어야 한다. 이런 소신과 근성으로 나에게 맡겨진 일을, 누가 보든 안 보든, 묵묵히 그리고 성실히 하겠다는 자세를 가지도록 하자. 내가 내 일을 스스로 비웃지 않고 성실히 하는 한, 아무도 내가 하는 일을 비웃지 않는다.
비웃지 못한다.
청주 본당 소속 이중섭신부님 글입니다.
제가 글을 옮기려도 쓰기란이 없어서이렇게 댓글에 옮겨 봤습니다
현숙이한테 물어보니 로그인하라했는데 로그인도 안되고
선배님 어떻게 하면 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