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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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멈출 수 없었던 사랑의 길
마더 데레사를 말할 때 흔히 몽당연필에 비유한다.
연필은 자신이 무엇을 쓰고 싶다고 해서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누군가의 손에 의해 쓰여 질 뿐이다.
닳고 닳도록 그저 자신을 내 놓을 때 멋진 그림이 그려지기도 하고
아름다운 글이 써지기도 한다.
절대적인 타자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그래서 ‘몽당연필’은 하느님 손안에 온전히 자신을 봉헌하며
사랑의 삶을 살았던 데레사 수녀에게 붙여진 애칭이다.
고정욱님이 쓴 어린이 위인전 「몽당연필이 된 마더 데레사」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한 그분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책을 읽은 시기와 맞물려 ‘마더 데레사’란 전기영화를 봤다.
‘로미오 와 줄리엣’에서 모든 이의 연인이었던
‘올리비아 핫세’가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 ‘마더 데레사’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던 영화였다.
책을 영상으로 옮긴 진솔하고 담백한 영화였다.
교회 역사상 ‘메리 워드’ 이후 300년 만에 비슷한 성소의 길을 걷게 된 마더 데레사,
그녀는 하느님의 뜻을 찾아 ‘로레토 성모수녀회’ 를 떠나
식별 끝에 ‘사랑의 선교회’를 설립했다.
이를 두고 교회는 ‘부르심 속의 부르심’이라 했다.
하느님 손 안의 몽당연필로 쓰여 지길 원했던 그녀의 삶은
‘끝내 멈출 수 없었던 사랑의 길’이었다.
인도의 빈민가에 뛰어들 어 가난한 사람들의 임종을 돕고,
굶주린 이들과 병들어 신음하는 이들을 평생 온몸으로 껴안았다.
그래서 일까. 책을 읽은 후에도, 영화가 끝난 뒤에도 잔잔한 감동과 울림을 준다.
그녀는 말한다. “사람들은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사랑하라.
당신이 선한 일을 하면 이기적인 동기에서 하는 것이라고 비난받을 것이다.
그래도 좋은 일을 하라…
사람들은 도움이 필요하면서도 도와주면 공격할지 모른다.
그래도 도와줘라.”
이것이 세상을 거슬러 사랑한 그분의 사랑법이다.
마더 데레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부탁한다.
“여러분의 눈과 가슴에 기쁨을 담아라.”
그분의 말씀은 먼저 사셨기에 힘이 있다.
삶의 표양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 어떤 훌륭한 말도 메아리에 불과하다.
누가 그를 추종하며, 누가 사랑을 살겠다고 전세계에서 인도로 모여들겠는가.
내가 속한 수도회에서 인도 현지 촬영으로 마더 데레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어 공영방송에 내 보낸 적이 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성당 마루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기도하는 수녀님의 모습이다.
기도는 하늘을 감동시킨다고 했던가 굽은 등,
뭉떵하게 닳은 손과 발이 클로즈업 되었을 때 가슴이 뭉클했다.
아니 뛰었다.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그분처럼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마더 데레사는 시상식 만찬회 경비까지 ‘애긍’을 청해 가난한 사람들의 몫으로 돌렸다.
「인도의 마더 데레사」를 비롯하여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 마더 데레사」,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작은 몸짓으로 이 사랑을」, 등
교회 안팎에 관련 서적은 그분의 삶을 반향(反響) 한다.
살아서는 ‘살아있는 성녀’로 영성의 향기 높은 꽃밭을 일구었고,
죽어서는 시복시성 절차를 밟으려면 사후 5년 후라는 역사상 관례를 깨고
가장 짧은 기간(6년 만에)에 복자품에 오르신 분이다.
전기는 영성서와 달리 한 인간의 진면목을 보게 한다.
부모님의 교육이 마더 데레사의 마음을 어렸을 때부터 가난한 이들에게 열려 있게 했고,
봉사하는 삶으로 뛰어들게 했다.
우연히 가난한 이들을 만나 특별한 빛을 받아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이웃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출발한 것이다.
그분의 조건 없는 사랑이 가난한 이웃들의 닫힌 마음의 문을 열었다.
천향길 수녀http://www.pauline.or.kr
2006.10.30 13:45:12 (*.75.110.219)
하,느,님,과,그,리,스,도,교,
많은 도시의 아주 가난한 사람들,
오두막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보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어보십시오.
그들이 가장 먼저 청하는 것은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비록 그들이 헐벗고,
굶주림으로 죽어 가면서도 말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굶주려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말씀 듣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진정 이해한다면, 성체를 삶의 중심으로 삼는다면,
그래서 성체로 삶을 영위해 간다면, 가난한 사람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성체 성사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체 성사는 우리가 예수님의 굶주림을 채워드리는 것임을 헤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에게로 오라'고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은 영혼들은 목말라 하십니다.
성서 어디에도 예수님께서 거부하는 표현을 하신 게 없습니다.
오히려 초대하시지요.
'내게로 오라' 고.
간디는 예수임을 알고서 그분에게 상당한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을 만나고 나서는 실망하였습니다.
우리는 캘커타에서만도 매일 만여 명의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루라도 일하지 않으면
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굶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날 그 일을 맡은 수녀님이 와서 어렵게 말을 꺼냈습니다.
"데레사 수녀님, 식량이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줄 음식이 전혀 없습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나는 너무 놀라 말을 잃었습니다.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침 9시경에 트럭 하나가 빵을 싣고 나타났습니다.
정주에서는 매일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빵 한 조각과 우유 한 잔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날 캘커타의 학교들이 갑자기 휴교를 했습니다.
모든 빵이 우리 집에 도착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학교 문을 닫은 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집에 오는사람들이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좋은 빵을 배부를 때까지 실컷 먹어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일용한 양식은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자비의 또 다른 증거입니다.
내가 칼리하트에 있는 '죽어 가는 이를 위한 집'에서
아픈 사람의 상처를 돌보느라 분주할 때
힌두교 신자 한 사람이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수녀님, 그렇게 일하시는 힘이 수녀님의 종교에서 나온다면
그것이 진정한 종교이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부름을 받은 곳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일할 의무가 있습니다.
나는 개인을 위하여 봉사하라는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사랑하도록 말이지요.
절 부르신 건 제도를 판단하라는 뜻이 아니셨습니다.
내게는 어느 누구도 비난할 자격이 없습니다.
나는 군중이 아니라 하나 하나의 개인들과 연관해서 생각합니다.
내가 군중을 생각했다면 절대 이 일을 시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는 한사람 한사람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신뢰합니다.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이 자신들의 소명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하느님과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거든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언젠가 간디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신앙에 따라 산다면
인도에는 힌두교도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충실하기를,
언행에 모순이 없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하나의 빵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전적으로 우리의 처분에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영함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우리 자신을 내주기 위한 힘이 강해지는 걸 느낍니다.
하느님은 용서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의 자비는 우리 죄에 비해 너무나 큽니다.
하느님께서야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겠지만,
우리는 또다시 그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이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실천하지 못하면서 복음을 전할 때가 많으니까요.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교회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사도들 역시 두려움과 불신, 우울과 실망 그리고 실패를 체험했습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사도들을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왜 두려워하느냐 왜 의심을 품느냐고
말씀하셨을 따름입니다.(루가 24: 38)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두려워하지 말고,
의심을 품지 말라고 친절하게 말씀하십니다
<마더 데레사님 말씀중에서>
많은 도시의 아주 가난한 사람들,
오두막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보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어보십시오.
그들이 가장 먼저 청하는 것은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비록 그들이 헐벗고,
굶주림으로 죽어 가면서도 말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굶주려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말씀 듣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진정 이해한다면, 성체를 삶의 중심으로 삼는다면,
그래서 성체로 삶을 영위해 간다면, 가난한 사람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성체 성사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체 성사는 우리가 예수님의 굶주림을 채워드리는 것임을 헤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에게로 오라'고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은 영혼들은 목말라 하십니다.
성서 어디에도 예수님께서 거부하는 표현을 하신 게 없습니다.
오히려 초대하시지요.
'내게로 오라' 고.
간디는 예수임을 알고서 그분에게 상당한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을 만나고 나서는 실망하였습니다.
우리는 캘커타에서만도 매일 만여 명의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루라도 일하지 않으면
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굶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날 그 일을 맡은 수녀님이 와서 어렵게 말을 꺼냈습니다.
"데레사 수녀님, 식량이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줄 음식이 전혀 없습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나는 너무 놀라 말을 잃었습니다.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침 9시경에 트럭 하나가 빵을 싣고 나타났습니다.
정주에서는 매일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빵 한 조각과 우유 한 잔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날 캘커타의 학교들이 갑자기 휴교를 했습니다.
모든 빵이 우리 집에 도착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학교 문을 닫은 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집에 오는사람들이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좋은 빵을 배부를 때까지 실컷 먹어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일용한 양식은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자비의 또 다른 증거입니다.
내가 칼리하트에 있는 '죽어 가는 이를 위한 집'에서
아픈 사람의 상처를 돌보느라 분주할 때
힌두교 신자 한 사람이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수녀님, 그렇게 일하시는 힘이 수녀님의 종교에서 나온다면
그것이 진정한 종교이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부름을 받은 곳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일할 의무가 있습니다.
나는 개인을 위하여 봉사하라는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사랑하도록 말이지요.
절 부르신 건 제도를 판단하라는 뜻이 아니셨습니다.
내게는 어느 누구도 비난할 자격이 없습니다.
나는 군중이 아니라 하나 하나의 개인들과 연관해서 생각합니다.
내가 군중을 생각했다면 절대 이 일을 시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는 한사람 한사람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신뢰합니다.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이 자신들의 소명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하느님과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거든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언젠가 간디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신앙에 따라 산다면
인도에는 힌두교도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충실하기를,
언행에 모순이 없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하나의 빵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전적으로 우리의 처분에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영함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우리 자신을 내주기 위한 힘이 강해지는 걸 느낍니다.
하느님은 용서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의 자비는 우리 죄에 비해 너무나 큽니다.
하느님께서야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겠지만,
우리는 또다시 그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이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실천하지 못하면서 복음을 전할 때가 많으니까요.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교회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사도들 역시 두려움과 불신, 우울과 실망 그리고 실패를 체험했습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사도들을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왜 두려워하느냐 왜 의심을 품느냐고
말씀하셨을 따름입니다.(루가 24: 38)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두려워하지 말고,
의심을 품지 말라고 친절하게 말씀하십니다
<마더 데레사님 말씀중에서>
2006.11.04 03:12:03 (*.75.110.219)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요한 19,27
1910: 유럽 남동부에서 태어난 아녜스 곤히아 브약스히야(마더 네레사)는
캘커자의 빈민굴에 버려진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수녀가 된다.
시간이 지나자 그녀의 사업은 전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가장 존경받는 여성의 한 사람이 된다.
노벨 평화상과 종교의 발전을 위한 템플턴상을 포함해 많은 상을 수상한 그녀는
교황님과 대통령, 귀족들과 개인 친분을 쌓는다.
그녀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비천한 일을 하는데 결코 주저한 적이 없으며
자주 반복하는 주제 가운데 하나가 겸손의 필요성이다.
오늘날 사랑의 선교회가 설립한 107군데 수도원은 국제적으로 4천 명의 수녀와 수사들이 있다.
하느님의 충실한 일꾼으로 묘사한 시편은 그녀에게 꼭 들어맞는 내용이다.
"야훼님 집안에 심어진 그들은, 하느님의 뜰에서 꽃피리이다.
늙어서도 그들은 열매를 맺으며 진기있고 싱싱하오리니
그들은 주께서 얼마나 바르심을 내 바위,
당신께는 하지 없으심을 널리 알리리이다.(시편 91편 14-16)
1910년 8월 16일: 마더 테레사는 1900년에 결혼한 니콜 브약스히야와 드라나 베르나이의 막내딸로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공화국의 수도인 스코페에서 태어나다.
언니 아가는 1905년에 태어나고, 오빠 나자르는 1907년에 태어나다.
1910년 8월 27일: 예수 성심 성당에서 아네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는다.
부모는 열성저인 가톨길 신자로, 특히 어머니가 헌신적이었다.
1919년: 니콜 브약스히야는 정치적인 회의에 참석한 뒤 독살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강력한 국수주의자의 신념을 갖고 있는 시의원이었다.
1915-24년: 아녜스는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오빠 언니와 함께 아녜스는공립학교에 다닌다.
건강이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잘했다.
그녀는 본당 교리공부반에 나가는 한편 본당 성가대원으로,
마리아의 딸이라고 불리는 가톨릭 청녀단체에 속하게 된다.
그는 선교사의 삶에 대한 이야기라든지 성인들에 대한 책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다.
마더 테레사는 어린 시절과 사춘기의 가족생활을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는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매우 화합된 가족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서로를 위해 살았으며,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우리는 매우 단결된 행복한 가정이었습니다.
" 외아들인 나자르는 어머니와 누이들의 종교생활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예수 성심 성당 바로 옆집에서 살았습니다.
때때로 어머니와 누이들은 집에서보다 교회에서 더 많이 사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언제든지 성가대나 봉사난 선교에 관한 토론 문네에 늘 관여하곤 했습니다.
" 또한 나자르는 어머니의 관대함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집으로 찾아오는 그 많은 가난한 사람을 빈손으로 못가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이 우리와 피를 나눈 친척도 아니고 또 비록 저렇게 가난하지만 우리 형제라는 것을 마음속에 간직해라.'"
아녜스는 열두 살 때 선교사의 삶에 대한 부르심을 느낀다.
그러나 그후 몇 년 동안 이 소명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잠을 잔다.
그 사이에 그녀는 마리아의 딸들회의 활동당원으로 일한다.
예수회 사제인 본당 신부님의 권유로 그녀는 선교사에 대한 관심을 키워간다.
아녜스의 오빠 나자르는 기병장교가 되기 위해 사관학교에서 공부하려고 오스트리아로 옮겨 간다.
1928년: 아녜스가 스코페의 수호성인 재단 앞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그녀의 선교사에 대한 관심이 수도생활로 이끄는 명백한 소명임을 깨닫는다.
그는 "우리의 성모님께서 나를 중재하시어 나의 소명을 찾도록 도와주셨습니다."라고 했다.
유고슬라비아 예수회의 지도와 도움으로 아녜스는
(아일랜드의 성모라고 볼리는) 메리워드가 16세기에 설립한 로레토 성모수녀회에 입회를 신청한다.
그녀는 인도에서 하는 그들의 선교사업에 큰 매력을 느낀다.
1928년 9월 26일:입회 허락을 받고 아녜스는 더블린으로 간다.
그녀는 기차를 타고 유고슬라비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프랑스, 영국 등을 거쳐
로게토 성모수녀회 본원에 도착한다.
1928년 12월 1일: 두 달 동안 집중적인 영어공부를 한 후
아네스는 배로 더블린을 떠나 37일 후인 1929년 1월 6일에 인도에 도착한다.
아녜스는 캘커다에 1주일만 머물고 곧 히말라야 산기슭에 있는 다질링으로 가 수련기를 시작한다.
1931년 5월 24일: 수련기 2년을 보내고 아녜스는 세례명을 테레사로 바꾸고
로레토 성모수녀회에 유기서원을 한다.
"저는 수도서원을 할 대 테레사라는 이름을 택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석은 아빌라의 대 테레사의 이름이 아닙니다.
나는 리지외의 소화 테레사를 택했습니다."
1931-37년: 유기서원을 한 후에 테레사 수녀는 캘커타에 살면서
로테토 성모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성 마리아 학교에서 지리와 역사 선생님으로 일한다.
1937년 5월 24일: 몇 번에 걸쳐 유기서원을 갱신하고
테레사 수녀는 로레토 성모수녀회 수녀로서 종신서원을 한다.
그리고 마침내 성 마리아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 된다.
마더 테레사는 수녀회에서의 삶을 이럿게 총망라한다.
"나는 로페토에서 제일 행복한 수녀였습니다.
가르치는 에 나 자신을 완전히 헌신했으니까요.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수행하는 진정한 사도직이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그 일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1946 9월 10일: 하느님께서는 그녀를 가난한 이에게 봉사하도록 부르시다.
마더 테레사는 그날을 '영감의 날'이라고 부른다.
"내가 대피정에 참석하려고 캘커다에서 다질링으로 가는 기차 속에서 조용히 기도를 하고 있을 때,
선명하게 나의 소명 안에 또 다른 소명을 느꼈습니다.
그 메시지는 명백했습니다.
나는 우리 수오회를 떠나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살면서 그들을 도와주는 데 헌신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명령이었습니다.
"나는 가야 할 목적지는 알았지만 가는 방법은 알지 못했습니다."
1948년:로레토 성모수녀회를 떠나는 석은 테레사 수녀에게는 어렵고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로마로부터 그녀의 수도회로 보래주는 특별한 허락이 필요했다.
마침내 그녀가 수도회 밖에서도 수녀로서 살도록 허락이 떨어진다.
8월 16일, 그녀는 로레토 성모수녀회 수녀복을 벗고
인다아에서 가장 가난한 여자들이 입는 흰 사리로 갈아입고 수도회를 떠난다.
사리에는 그녀가 동정 마리아를 닮고 캘커타를 떠나
기초 간호학 3개월 속성과장을 이수한 후 곧 돌아와 캘터타의 빈민가에서
가난한 사람 중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헌신한는 열망으로 일을 시작한다.
그해 그녀는 인도의 시민권을 신청하는데,
곧바로 평생 인도 시민권을 받는다.
1949년 3월 19일: 첫번째 지원자가 마더 테레사와 합류한다.
마더 테레사가 가르치던 제자 슈바시니 다스가 어느날 예기치 않게 그녀를 방문해 함께할 것을 원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아직 형성되지 않은 수도회의 첫번째 수녀가 된다.
1950년 7월 10일:사랑의 선교회가 로마로부터 승인을 받는다.
상당수의 젊은 여성들이 뒤를 이어 들어온다.
"1949년 이후 나는 젊은 여성들이 한 명씩 도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부분 옛날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녀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드리고 싶어했고,
매우 신속하게 그 일을 했습니다."
1950년 10월 7일: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에서는 사랑의 선교회를 승인한다.
10명의 수녀가 2년간의 수련기를 시작한다.
1952년: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임종자의 집을 연다.
수도회에 회원이 30여 명이 된다.
그 중에 12명은 종신서원자이고 12명은 수련자, 나머지는 청원자였다.
아직도 수녀들은 자기들의 수도원이 없었다.
그들은 마이클 곰스가 제공한 셋집에서 '손님'으로 지낸다.
구녀들은 빈민가에 버림받은 아이들과 죽어가는 사람들을 돕는 한편 수도자 양성과 공부에 열중한다.
마더 테레사는 캘커타 중심가에 있는 힌두교 사원인 칼리하트에 가난한 사람들의 집을 얻는다.
그 집은 8월 22일, 복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에 문을 여는데 열자마자 정원까지 꽉 들어찬다.
이러한 현상은 끊임없이 퇴소시키는데도 불구하고
몇 년 동안 계속된다. 항상 새로운 지원자가 뒤를 이어온다.
그 집의 이름은 힌두어로 니르말 리다이인데 '순수한 마음을 가진 집'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대부분 이 집에 오는 사람들이 힌두인이기 때문이었다.
1953년:사랑의 선교회 본원이 창립된다.
끊임없는 기도 덕택에 하늘의 선물로 사랑의 선교회는 그들의 수도원을 위해
캘커타 54번가에 있는 집을 살 수 있었다.
그 집은 필요한 수도원과 임시로 쓸 수 있는 집을 살 수 있었다.
그 집은 필요한 수도원과 임시로 쓸 수 있는 공간까지 제공할 수있는 편리한 곳에 위치해 있다.
본원은 사랑의 선교회 총사령부가 된다.
수녀들은 버림받은 비민굴의 고아들을 위해
같은 거리에 있는 집에 세를 들었다가 후에 그 집을 사게 된다.
고아들은 대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임종의 집에서 죽은 부모들의 어린이들이다.
수녀들은 자신들이 돌볼 나환우들의 집을 열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기 때문에 우선 나환우들을 위한 '이동 병실'부터 시작한다.
후에 수녀들은 캘커타 외곽지대에 티타가르와 산티나가르라 불리는
나환우들이 자랍할 수있는 재활 센터를 연다.
1962년: 마더 테레사는 인도 정보가 수여하는 파드나 스리상을 받게 되며,
동남 아시아의 시토(SEATO) 국가들이 수여하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한다.
그녀는 아시아에서는 알려져 있지만 아직 서구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1965년 2월 1일: 사라의 선교회가 더한층 인정을 받는다.
이제 15년이 된 이 수도회는 놀랄 만큼 성장을 거듭하게 된다.
3백 명의 수녀와 여러 개의 틀이 생긴다.
유럽 여러 나라 수녀들이 포함된다.
그때까지 사랑의 선교회 수녀회는 지역 주교의 관할하에 인도에만 위치하게 된다.
몇몇 주교의 후원으로, 교황 바오로 6세는 사랑의 선교회가
전 가톨릭 교회 안에서 일할 수 있도록 인가하는 칭찬교령을 내리낟.
이 교령은 베네수엘라의 바르키시메토 대주교 초청과 아울러
사랑의 선교회 선교 사업의 확장을 가능하게 한다.
1965-71년:존세계에 새로운 분원이 문을 열게 된다.
베네수엘라에 있는 분원이 마더 테레사의 첫버째 해외 분원이 된다.
그 다음해 지역 바톨릭 주교들의 초청으로 더 많은 분원이 아프리카에도,
오스트레일리아의 멜버른과 애들레이드, 유럽의 영국과 이탈리아에서 문을 연다.
사랑의 선교회 로마 분원이 교황 바오로 6세가 로마의 주교 자격으로 일을 찬미하고
그녀의 후원자가 되며, 선교회 활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그녀에게 바타칸 시민권을 수여한다.
사랑의 선교회는 1971년에 50여 개의 분원를 갖게 된다.
1969년 3월 3일:교황 바오로 6세가 협조자의 회칙을 인정하여
그들도 사랑의 선교회에 공식적으로 병합된다.
1969년 3월 26일:사랑의 선교회 협조자회가 공식적으로 설립된다.
마더 테레사의 협조자들은 국제적으로 일반 평신도인 남자와 여자로 구성된 단체인데,
이들이 영성의 실체이며 사랑의 선교회 일을 더 넓혀 나가는 데 중요한 역학을 한다.
그 수는 매년 끊임없이 증가하기 때문에 확실한 숫자 파악조차 힘들 정도이다.
사랑의 선교회가 최초로 설립된 이래 협조자들은 끊임없이 생겨난다.
1970년:마더 테레사는 국제적인 중요한 상을 받는다.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맬컴 머거리지가 펜과 전파를 통해
마더 테레사를 서방 세계에 알림으로써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다.
그 결과 그녀는 미국에서 착한 사마리아상을 받았고,
영국에서는 종교의 진보상인 템플턴상을 받았으며,
바티칸에서는 요한 바오로 23세 평화상을 받았다.
1972년 7월 12일: 마더 테레사의 어머니 드라나 베르나이가 알바니아에서 영면하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시칠리아에 있는 아들과 마더 테레사를 보고 싶어했지만,
알바니아 정부에서 그녀의 출국 허가를 거절한다.
1974년:마더 테레사의 언니 아가 브약스히야가 오빠의 여동생을 보지 못한 채 알바니아에서 죽다.
1979년 10월 17일:마더 테레사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
그렇지만 그녀의 일상생활의 단순성이나 겸손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1979년 12월 10일:마더 테레사는 자신의 삶을 모두 헌신한 가난한 사람의 이름으로
노르웨이 왕 올리프 5세로부터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
1980-85년: 사랑의 선교회는 여러 곳에 새로운 분원을 열고,
많은 새로운 성소자의 축복을 받는다.
1980년에는 레바논, 서독, 유고슬라비아, 멕시코, 브라질 ,페루,케냐,아이티,
스페인,에티오피아, 벨기에, 뉴기니아,아르헨티나 등 14군데에 분원을 연다.
노벨 평화상을 수여한 뒤로 사랑의 선교회는 놀라운 속도롤 뻗어 나간다.
1981년 한 새만도 8군데난 새로운 분원을 열고,
82년에는 12군데, 83년에는 14군데로 늘어난다.
사강의 선교회는 축복 속에 지원자가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는 시기에
참으로 예회적이라고 할 수 있다.
1986-89년:사라의 선교회는 다른 선교사에게는 닫혀 있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사랑의 선교회는 에테오피아와 남예맨에 분원을 열 수 있는 허가를 받는다.
또 그들은 나카라과와 쿠바와 러시아에서도 분원 허가를 받았느데,
이들 국가는 정책에 의해 무신론주의가 활발한 나라다.
소련의 경우,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의 결실의 하나로
마더 테레사가 모스크바에 분원 허가를 받는다.
1986년 2월:요한 바오로 2세가 캘커타를 방문한다.
마더 테레사를 방문한 교황은 사랑의 선교회가 이룬 여러 가지 일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다.
1988년 5월 21일:사랑의 선교회는 로마의 바타칸에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한 보호소를 연다.
마리아의 해를 기념하기 위해 '마리아의 선물'이라고 이름지어진 보호소에는
어른을 위한 72개의 침상과 2개의 식당이 있는데 한 식당은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다른 한 식당은 잠깐 들르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 요양소에는 휴게실과 진료실이 각각 하나씩 있고,
교황 바오로 6세의 알현실 쪽으로 난 정원이 있다.
1988-89년:마더 테레사는 두 번째 심장마비로 입원한다.
육체가 완전히 지칠 때까지 과로해 입원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교황님조차도 건강에 좀더 유의할 것을 요청할 정도였다.
주치의들은 그녀에게 전기 자극으로 심장 박동을 지속시키는
페이스메이커를 장치한 후 6개월 동안 안정을 취하도록 권한다.
1990년 4월 16일:건강을 이유로 마더 테레사는 총장직에서 물러난다.
책임에서 자유로원지자 그녀는 여러 수녀원을 방분하며 여행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1990년 9월:마더 테레사는 80고령인데다가 건강이 나쁜데도 불구하고
정년퇴직에 기각되어 다시 사랑의 선교회 총장직에 재선출된다.
1991년 1월:마더 테레사는 걸프 전쟁을 중지시키기 위해 두 정상에게 호소한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조지 대통령과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죄없는 자들의
이름으로 정열적으로 호소하는 마더 테레사의 요처을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두 팀의 수녀들이 전쟁으로 약탈당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바그다드로 간다.
1991-93년:마더 테레사의 건강이 또다시 약화되어
처음엔 멕시코의 티후주아나에서, 다음엔 인도 델리에서 쓰러진다.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무릅쓰고 1993년 10월에 베이징의 초청에 응한다.
1993년 8월 30일:건강이 약화되자 마더 테레사는 사랑의 선교회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만을 협조자로 부를 수 있게 하라고 지시한다.
그 외에 사랑의 선교회에 이름만 걸어놓은 사람들은 해체된다.
1994년 2월 3일:미국 워싱턴 DC의 조찬 기도회에서
클린턴 대통령 부처와 고어 부통령 부처 옆에서 마더 테레사는
수천 명의 관중이 넋을 잃고 듣고 있는 메시지에서 생명의 중시와 평화를 촉구한다.
후에 대통령은 마더 테레사에게 '그가 진정으로 살고 있는 의탁의 삶'에 대해 감사를 표한다.
1996년 4월:마더 테레사는 사랑의 선교회 본부 침대에서 떨어져 골절상으로 병원에 잠깐 입원한다.
1996년 8월:마더 테레사는 캘커타에 있는 병원에 말라리아로 입원한다.
장기간의 열병이 심장 상태를 약화시킨데다
오랫동안 인공호흡용 마스크르 사용해 폐에까지 감염된다.
몇 번의 입퇴원을 반복하다가 일터로 되돌아온다.
1996년 10월:빌 클린턴 대통령이 마더 테레사를 미국의 명예시민으로 추대하는 헌장에 서명한다.
헌장에 서명하면서 클린턴 대통령은 마더 테레사가 전세계 수백만 명의 고아와
버림받은 아이들에게 생명과 사랑과 희망을 주었다고 말한다.<퍼온 글>
1910: 유럽 남동부에서 태어난 아녜스 곤히아 브약스히야(마더 네레사)는
캘커자의 빈민굴에 버려진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수녀가 된다.
시간이 지나자 그녀의 사업은 전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가장 존경받는 여성의 한 사람이 된다.
노벨 평화상과 종교의 발전을 위한 템플턴상을 포함해 많은 상을 수상한 그녀는
교황님과 대통령, 귀족들과 개인 친분을 쌓는다.
그녀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비천한 일을 하는데 결코 주저한 적이 없으며
자주 반복하는 주제 가운데 하나가 겸손의 필요성이다.
오늘날 사랑의 선교회가 설립한 107군데 수도원은 국제적으로 4천 명의 수녀와 수사들이 있다.
하느님의 충실한 일꾼으로 묘사한 시편은 그녀에게 꼭 들어맞는 내용이다.
"야훼님 집안에 심어진 그들은, 하느님의 뜰에서 꽃피리이다.
늙어서도 그들은 열매를 맺으며 진기있고 싱싱하오리니
그들은 주께서 얼마나 바르심을 내 바위,
당신께는 하지 없으심을 널리 알리리이다.(시편 91편 14-16)
1910년 8월 16일: 마더 테레사는 1900년에 결혼한 니콜 브약스히야와 드라나 베르나이의 막내딸로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공화국의 수도인 스코페에서 태어나다.
언니 아가는 1905년에 태어나고, 오빠 나자르는 1907년에 태어나다.
1910년 8월 27일: 예수 성심 성당에서 아네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는다.
부모는 열성저인 가톨길 신자로, 특히 어머니가 헌신적이었다.
1919년: 니콜 브약스히야는 정치적인 회의에 참석한 뒤 독살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강력한 국수주의자의 신념을 갖고 있는 시의원이었다.
1915-24년: 아녜스는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오빠 언니와 함께 아녜스는공립학교에 다닌다.
건강이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잘했다.
그녀는 본당 교리공부반에 나가는 한편 본당 성가대원으로,
마리아의 딸이라고 불리는 가톨릭 청녀단체에 속하게 된다.
그는 선교사의 삶에 대한 이야기라든지 성인들에 대한 책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다.
마더 테레사는 어린 시절과 사춘기의 가족생활을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는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매우 화합된 가족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서로를 위해 살았으며,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우리는 매우 단결된 행복한 가정이었습니다.
" 외아들인 나자르는 어머니와 누이들의 종교생활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예수 성심 성당 바로 옆집에서 살았습니다.
때때로 어머니와 누이들은 집에서보다 교회에서 더 많이 사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언제든지 성가대나 봉사난 선교에 관한 토론 문네에 늘 관여하곤 했습니다.
" 또한 나자르는 어머니의 관대함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집으로 찾아오는 그 많은 가난한 사람을 빈손으로 못가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이 우리와 피를 나눈 친척도 아니고 또 비록 저렇게 가난하지만 우리 형제라는 것을 마음속에 간직해라.'"
아녜스는 열두 살 때 선교사의 삶에 대한 부르심을 느낀다.
그러나 그후 몇 년 동안 이 소명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잠을 잔다.
그 사이에 그녀는 마리아의 딸들회의 활동당원으로 일한다.
예수회 사제인 본당 신부님의 권유로 그녀는 선교사에 대한 관심을 키워간다.
아녜스의 오빠 나자르는 기병장교가 되기 위해 사관학교에서 공부하려고 오스트리아로 옮겨 간다.
1928년: 아녜스가 스코페의 수호성인 재단 앞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그녀의 선교사에 대한 관심이 수도생활로 이끄는 명백한 소명임을 깨닫는다.
그는 "우리의 성모님께서 나를 중재하시어 나의 소명을 찾도록 도와주셨습니다."라고 했다.
유고슬라비아 예수회의 지도와 도움으로 아녜스는
(아일랜드의 성모라고 볼리는) 메리워드가 16세기에 설립한 로레토 성모수녀회에 입회를 신청한다.
그녀는 인도에서 하는 그들의 선교사업에 큰 매력을 느낀다.
1928년 9월 26일:입회 허락을 받고 아녜스는 더블린으로 간다.
그녀는 기차를 타고 유고슬라비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프랑스, 영국 등을 거쳐
로게토 성모수녀회 본원에 도착한다.
1928년 12월 1일: 두 달 동안 집중적인 영어공부를 한 후
아네스는 배로 더블린을 떠나 37일 후인 1929년 1월 6일에 인도에 도착한다.
아녜스는 캘커다에 1주일만 머물고 곧 히말라야 산기슭에 있는 다질링으로 가 수련기를 시작한다.
1931년 5월 24일: 수련기 2년을 보내고 아녜스는 세례명을 테레사로 바꾸고
로레토 성모수녀회에 유기서원을 한다.
"저는 수도서원을 할 대 테레사라는 이름을 택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석은 아빌라의 대 테레사의 이름이 아닙니다.
나는 리지외의 소화 테레사를 택했습니다."
1931-37년: 유기서원을 한 후에 테레사 수녀는 캘커타에 살면서
로테토 성모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성 마리아 학교에서 지리와 역사 선생님으로 일한다.
1937년 5월 24일: 몇 번에 걸쳐 유기서원을 갱신하고
테레사 수녀는 로레토 성모수녀회 수녀로서 종신서원을 한다.
그리고 마침내 성 마리아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 된다.
마더 테레사는 수녀회에서의 삶을 이럿게 총망라한다.
"나는 로페토에서 제일 행복한 수녀였습니다.
가르치는 에 나 자신을 완전히 헌신했으니까요.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수행하는 진정한 사도직이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그 일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1946 9월 10일: 하느님께서는 그녀를 가난한 이에게 봉사하도록 부르시다.
마더 테레사는 그날을 '영감의 날'이라고 부른다.
"내가 대피정에 참석하려고 캘커다에서 다질링으로 가는 기차 속에서 조용히 기도를 하고 있을 때,
선명하게 나의 소명 안에 또 다른 소명을 느꼈습니다.
그 메시지는 명백했습니다.
나는 우리 수오회를 떠나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살면서 그들을 도와주는 데 헌신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명령이었습니다.
"나는 가야 할 목적지는 알았지만 가는 방법은 알지 못했습니다."
1948년:로레토 성모수녀회를 떠나는 석은 테레사 수녀에게는 어렵고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로마로부터 그녀의 수도회로 보래주는 특별한 허락이 필요했다.
마침내 그녀가 수도회 밖에서도 수녀로서 살도록 허락이 떨어진다.
8월 16일, 그녀는 로레토 성모수녀회 수녀복을 벗고
인다아에서 가장 가난한 여자들이 입는 흰 사리로 갈아입고 수도회를 떠난다.
사리에는 그녀가 동정 마리아를 닮고 캘커타를 떠나
기초 간호학 3개월 속성과장을 이수한 후 곧 돌아와 캘터타의 빈민가에서
가난한 사람 중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헌신한는 열망으로 일을 시작한다.
그해 그녀는 인도의 시민권을 신청하는데,
곧바로 평생 인도 시민권을 받는다.
1949년 3월 19일: 첫번째 지원자가 마더 테레사와 합류한다.
마더 테레사가 가르치던 제자 슈바시니 다스가 어느날 예기치 않게 그녀를 방문해 함께할 것을 원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아직 형성되지 않은 수도회의 첫번째 수녀가 된다.
1950년 7월 10일:사랑의 선교회가 로마로부터 승인을 받는다.
상당수의 젊은 여성들이 뒤를 이어 들어온다.
"1949년 이후 나는 젊은 여성들이 한 명씩 도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부분 옛날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녀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드리고 싶어했고,
매우 신속하게 그 일을 했습니다."
1950년 10월 7일: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에서는 사랑의 선교회를 승인한다.
10명의 수녀가 2년간의 수련기를 시작한다.
1952년: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임종자의 집을 연다.
수도회에 회원이 30여 명이 된다.
그 중에 12명은 종신서원자이고 12명은 수련자, 나머지는 청원자였다.
아직도 수녀들은 자기들의 수도원이 없었다.
그들은 마이클 곰스가 제공한 셋집에서 '손님'으로 지낸다.
구녀들은 빈민가에 버림받은 아이들과 죽어가는 사람들을 돕는 한편 수도자 양성과 공부에 열중한다.
마더 테레사는 캘커타 중심가에 있는 힌두교 사원인 칼리하트에 가난한 사람들의 집을 얻는다.
그 집은 8월 22일, 복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에 문을 여는데 열자마자 정원까지 꽉 들어찬다.
이러한 현상은 끊임없이 퇴소시키는데도 불구하고
몇 년 동안 계속된다. 항상 새로운 지원자가 뒤를 이어온다.
그 집의 이름은 힌두어로 니르말 리다이인데 '순수한 마음을 가진 집'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대부분 이 집에 오는 사람들이 힌두인이기 때문이었다.
1953년:사랑의 선교회 본원이 창립된다.
끊임없는 기도 덕택에 하늘의 선물로 사랑의 선교회는 그들의 수도원을 위해
캘커타 54번가에 있는 집을 살 수 있었다.
그 집은 필요한 수도원과 임시로 쓸 수 있는 집을 살 수 있었다.
그 집은 필요한 수도원과 임시로 쓸 수 있는 공간까지 제공할 수있는 편리한 곳에 위치해 있다.
본원은 사랑의 선교회 총사령부가 된다.
수녀들은 버림받은 비민굴의 고아들을 위해
같은 거리에 있는 집에 세를 들었다가 후에 그 집을 사게 된다.
고아들은 대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임종의 집에서 죽은 부모들의 어린이들이다.
수녀들은 자신들이 돌볼 나환우들의 집을 열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기 때문에 우선 나환우들을 위한 '이동 병실'부터 시작한다.
후에 수녀들은 캘커타 외곽지대에 티타가르와 산티나가르라 불리는
나환우들이 자랍할 수있는 재활 센터를 연다.
1962년: 마더 테레사는 인도 정보가 수여하는 파드나 스리상을 받게 되며,
동남 아시아의 시토(SEATO) 국가들이 수여하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한다.
그녀는 아시아에서는 알려져 있지만 아직 서구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1965년 2월 1일: 사라의 선교회가 더한층 인정을 받는다.
이제 15년이 된 이 수도회는 놀랄 만큼 성장을 거듭하게 된다.
3백 명의 수녀와 여러 개의 틀이 생긴다.
유럽 여러 나라 수녀들이 포함된다.
그때까지 사랑의 선교회 수녀회는 지역 주교의 관할하에 인도에만 위치하게 된다.
몇몇 주교의 후원으로, 교황 바오로 6세는 사랑의 선교회가
전 가톨릭 교회 안에서 일할 수 있도록 인가하는 칭찬교령을 내리낟.
이 교령은 베네수엘라의 바르키시메토 대주교 초청과 아울러
사랑의 선교회 선교 사업의 확장을 가능하게 한다.
1965-71년:존세계에 새로운 분원이 문을 열게 된다.
베네수엘라에 있는 분원이 마더 테레사의 첫버째 해외 분원이 된다.
그 다음해 지역 바톨릭 주교들의 초청으로 더 많은 분원이 아프리카에도,
오스트레일리아의 멜버른과 애들레이드, 유럽의 영국과 이탈리아에서 문을 연다.
사랑의 선교회 로마 분원이 교황 바오로 6세가 로마의 주교 자격으로 일을 찬미하고
그녀의 후원자가 되며, 선교회 활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그녀에게 바타칸 시민권을 수여한다.
사랑의 선교회는 1971년에 50여 개의 분원를 갖게 된다.
1969년 3월 3일:교황 바오로 6세가 협조자의 회칙을 인정하여
그들도 사랑의 선교회에 공식적으로 병합된다.
1969년 3월 26일:사랑의 선교회 협조자회가 공식적으로 설립된다.
마더 테레사의 협조자들은 국제적으로 일반 평신도인 남자와 여자로 구성된 단체인데,
이들이 영성의 실체이며 사랑의 선교회 일을 더 넓혀 나가는 데 중요한 역학을 한다.
그 수는 매년 끊임없이 증가하기 때문에 확실한 숫자 파악조차 힘들 정도이다.
사랑의 선교회가 최초로 설립된 이래 협조자들은 끊임없이 생겨난다.
1970년:마더 테레사는 국제적인 중요한 상을 받는다.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맬컴 머거리지가 펜과 전파를 통해
마더 테레사를 서방 세계에 알림으로써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다.
그 결과 그녀는 미국에서 착한 사마리아상을 받았고,
영국에서는 종교의 진보상인 템플턴상을 받았으며,
바티칸에서는 요한 바오로 23세 평화상을 받았다.
1972년 7월 12일: 마더 테레사의 어머니 드라나 베르나이가 알바니아에서 영면하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시칠리아에 있는 아들과 마더 테레사를 보고 싶어했지만,
알바니아 정부에서 그녀의 출국 허가를 거절한다.
1974년:마더 테레사의 언니 아가 브약스히야가 오빠의 여동생을 보지 못한 채 알바니아에서 죽다.
1979년 10월 17일:마더 테레사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
그렇지만 그녀의 일상생활의 단순성이나 겸손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1979년 12월 10일:마더 테레사는 자신의 삶을 모두 헌신한 가난한 사람의 이름으로
노르웨이 왕 올리프 5세로부터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
1980-85년: 사랑의 선교회는 여러 곳에 새로운 분원을 열고,
많은 새로운 성소자의 축복을 받는다.
1980년에는 레바논, 서독, 유고슬라비아, 멕시코, 브라질 ,페루,케냐,아이티,
스페인,에티오피아, 벨기에, 뉴기니아,아르헨티나 등 14군데에 분원을 연다.
노벨 평화상을 수여한 뒤로 사랑의 선교회는 놀라운 속도롤 뻗어 나간다.
1981년 한 새만도 8군데난 새로운 분원을 열고,
82년에는 12군데, 83년에는 14군데로 늘어난다.
사강의 선교회는 축복 속에 지원자가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는 시기에
참으로 예회적이라고 할 수 있다.
1986-89년:사라의 선교회는 다른 선교사에게는 닫혀 있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사랑의 선교회는 에테오피아와 남예맨에 분원을 열 수 있는 허가를 받는다.
또 그들은 나카라과와 쿠바와 러시아에서도 분원 허가를 받았느데,
이들 국가는 정책에 의해 무신론주의가 활발한 나라다.
소련의 경우,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의 결실의 하나로
마더 테레사가 모스크바에 분원 허가를 받는다.
1986년 2월:요한 바오로 2세가 캘커타를 방문한다.
마더 테레사를 방문한 교황은 사랑의 선교회가 이룬 여러 가지 일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다.
1988년 5월 21일:사랑의 선교회는 로마의 바타칸에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한 보호소를 연다.
마리아의 해를 기념하기 위해 '마리아의 선물'이라고 이름지어진 보호소에는
어른을 위한 72개의 침상과 2개의 식당이 있는데 한 식당은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다른 한 식당은 잠깐 들르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 요양소에는 휴게실과 진료실이 각각 하나씩 있고,
교황 바오로 6세의 알현실 쪽으로 난 정원이 있다.
1988-89년:마더 테레사는 두 번째 심장마비로 입원한다.
육체가 완전히 지칠 때까지 과로해 입원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교황님조차도 건강에 좀더 유의할 것을 요청할 정도였다.
주치의들은 그녀에게 전기 자극으로 심장 박동을 지속시키는
페이스메이커를 장치한 후 6개월 동안 안정을 취하도록 권한다.
1990년 4월 16일:건강을 이유로 마더 테레사는 총장직에서 물러난다.
책임에서 자유로원지자 그녀는 여러 수녀원을 방분하며 여행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1990년 9월:마더 테레사는 80고령인데다가 건강이 나쁜데도 불구하고
정년퇴직에 기각되어 다시 사랑의 선교회 총장직에 재선출된다.
1991년 1월:마더 테레사는 걸프 전쟁을 중지시키기 위해 두 정상에게 호소한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조지 대통령과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죄없는 자들의
이름으로 정열적으로 호소하는 마더 테레사의 요처을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두 팀의 수녀들이 전쟁으로 약탈당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바그다드로 간다.
1991-93년:마더 테레사의 건강이 또다시 약화되어
처음엔 멕시코의 티후주아나에서, 다음엔 인도 델리에서 쓰러진다.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무릅쓰고 1993년 10월에 베이징의 초청에 응한다.
1993년 8월 30일:건강이 약화되자 마더 테레사는 사랑의 선교회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만을 협조자로 부를 수 있게 하라고 지시한다.
그 외에 사랑의 선교회에 이름만 걸어놓은 사람들은 해체된다.
1994년 2월 3일:미국 워싱턴 DC의 조찬 기도회에서
클린턴 대통령 부처와 고어 부통령 부처 옆에서 마더 테레사는
수천 명의 관중이 넋을 잃고 듣고 있는 메시지에서 생명의 중시와 평화를 촉구한다.
후에 대통령은 마더 테레사에게 '그가 진정으로 살고 있는 의탁의 삶'에 대해 감사를 표한다.
1996년 4월:마더 테레사는 사랑의 선교회 본부 침대에서 떨어져 골절상으로 병원에 잠깐 입원한다.
1996년 8월:마더 테레사는 캘커타에 있는 병원에 말라리아로 입원한다.
장기간의 열병이 심장 상태를 약화시킨데다
오랫동안 인공호흡용 마스크르 사용해 폐에까지 감염된다.
몇 번의 입퇴원을 반복하다가 일터로 되돌아온다.
1996년 10월:빌 클린턴 대통령이 마더 테레사를 미국의 명예시민으로 추대하는 헌장에 서명한다.
헌장에 서명하면서 클린턴 대통령은 마더 테레사가 전세계 수백만 명의 고아와
버림받은 아이들에게 생명과 사랑과 희망을 주었다고 말한다.<퍼온 글>
성,모,마,리,아,
다음과 같은 기도를 마리아께 드리십시오.
예수의 어머니요,
모든 사람의 어머니인 마리아여,
우리는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지고
당신께 갑니다.
우리는 이제 어린아이는 아니지만,
마음을 다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상황은 나약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당신의 모성애에 호소하여
그 나약함을 극복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소서.
모든 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보호해 주소서.
단신의 사랑으로 자비롭고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당신이 사랑하는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을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십시오. 아멘.
<마더 데레사님 말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