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3주일(루가 14,25-33)
                                                     *양승국 (서울 대림동 살레시오수도원장)신부님*

 한 아이와 함께 '추모의 집'을 찾았습니다.
아버지 흔적 앞에 홀로 선 아이는 아무 말도 없이
굵은 눈물만 뚝뚝 떨어뜨렸습니다.
아이 처지가 너무나 딱했습니다.
이제 겨우 15살인데 엄마는 어느 하늘 아래 있는지도 모르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유일한 연고자인 형은 행방이 묘연하고….
아이가 한 평생 지고 갈 외로움과 허전함,
상처와 번민을 생각하니 얼마나 마음이 짠했는지 모릅니다.

 저녁기도를 하러 성당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사무실에 낯선 사람이 앉아 있어서 '누군가'하고 들어갔더니
연미사를 신청하러 오신 할머님이셨습니다.
그냥 인사만 하고 나오려다가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목이 멘 할머니 말씀을 듣던 저는
너무도 가슴이 아파서 할 말을 다 잃었습니다.
오늘이 바로 따님 장례식을 치른 날이었답니다.
이제 겨우 40대 초반인 딸,
남한테 죽어도 싫은 소리 못하는 착하기만 했던 딸,
평생 가족들 뒷바라지하느라 생긴 스트레스성 병으로
세상을 먼저 떠난 딸을 생각하니 너무도 억울해서 못살겠다고 하셨습니다.

 딸 장례식에 가서 작별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것조차 마음대로 못했노라고,
그래서 하루 종일 분을 삭이느라
여기저기 다니다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고
가슴이 찢어지는 할머니 고통 앞에서
'힘내세요. 기도하겠습니다'는 말조차 꺼내기가 조심스러웠습니다.

 할머니는 아마도 요 근래 밥 한술 제대로 뜨시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돌아가시다 쓰러지시겠다 싶어서,
아이들 식사시간인데 가셔서 밥 한술이라도 뜨고 가시라고 말씀드렸더니
마지못해 따라오셨습니다.

 다행이었습니다.
시끌시끌한 아이들 틈에서 할머니는
그나마 힘겹게 밥을 몇 숟갈 뜨셨습니다.
한 마음씨 예쁜 아이가
할머니께서 뭔지 모르지만 힘들어하신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반찬을 더 가져오고 국도 좀 더 떠드리는 등 곰살맞게 시중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기특했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는
깊은 슬픔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나 십자가에
속울음 우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은지요.

 때로 이웃들이 견뎌내고 있는 극심한 고통이나 십자가 앞에서
어떤 위로의 말도 찾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오직 어깨를 조용히 감싸안아 준다든지
가만히 등을 두드리며 달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음에 안타깝기만 합니다.

 왜 십자가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옵니까?
왜 하필 나에게만 유독 큰 십자가입니까?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어쩌면 저렇게도 큰 십자가를 보내십니까?

 안타까운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답답해하면서
지난 노트를 뒤적이다가 이런 글귀를 발견했습니다.

 "하느님은 십자가 안에서 가장 뚜렷하게 당신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고통받는 사람들 얼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얼굴입니다.
고통은 예수 그리스도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의 선물 가운데
가장 큰 선물은 다름 아닌 십자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땅과 생명의 땅,
그 사이에 당신 십자가를 걸쳐놓으심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의 땅으로 건너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로 올라갈 수 있게 하는 사다리로
당신 십자가를 걸쳐놓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신비이자 은총입니다.
십자가는 생명의 도구입니다.
십자가는 신앙인 삶의 일부를 넘어 전부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삶의 중심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구원 없고 십자가 없이는 영원한 생명도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하느님 나라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결국 우리가 평생 친구처럼 여기고 끌어안고 가야할
삶의 동반자입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지면 질수록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이번 한 주간,
너무도 힘겨운 십자가로 인해 힘겨워하는 이웃들 삶에
우리 온기가 전해지는 날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를 홀로 지고
휘청휘청 걸어가는 이웃들 안에
현존해 계시는 예수님을 발견하는 한 주간이 되길 바랍니다.

평화신문 기자   pbc@pbc.co.kr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05-19 1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