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라면,
18년 동안 신앙을 떠나 있었던 시기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진다.
처음 회심했을 때 어떤 목사님께서
“당신이 하느님을 떠나 있던 18년 마저도
주님께서는 축복으로 바꾸어 주실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 때 솔직히 “사람을 위로하는 방법도 참 가지가지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나는 점점 더 뻔뻔해지고 대담해진다.
지난 18년 동안 착실한 신자들이 하지 않은 나쁜 짓을 다 해 본 탓에
조금이라도 이상한 부분에 대해서는 가차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언기도를 하는 분 앞에서
그것이 조금이라도
내가 예전에 만나 보았던 무당들의 언어와 같은 것을 발견하면
조금씩 의심을 시작한다.
하느님의 언어가 그들의 언어와 얼마나 다른지 체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적(異蹟)이 일어난 것을 두고 남들이 감동할 때,
나는 신기한 이적 자체는 무당들도 일으킬 수 있음을
자신 있게 증언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십자가 없는 믿음에 대해 회의적이다.
만일 이런 체험이 없었다면,
사람 말이면 뭐든지 믿기부터 하는 나는
이상한 길로 가도 한참을 갔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하느님은 악한 일조차도 선으로 바꾸실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신앙이 없었던 지난 시절을 생각하면
그게 바로 지옥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때 나는 세속적으로 잘 나가는 작가가 되어
유명해지고 돈도 많이 벌고 글도 잘 썼지만,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할 때,
주님처럼 십자가를 지게 해 달라든지,
세속과 육신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든지,
내 몸과 마음을 희생제물로 바치게 해 달라든지 하는 대목에서는
솔직히 “못하겠어요, 못하겠어요” 하다가,
12처에 이르러 영원히 주님을 떠날 양이면
차라리 지금 주님과 함께 죽는 행복을 누리게 해 달라는 대목에 이르면
“주님, 맞습니다. 맞아요”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주님을 위해 죽을 용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을 떠나 사는 것 그것 자체가
이미 죽음보다 더 못한 지옥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나를 다시는 떠나지 못하게 해 주시는 것,
사랑으로 나를 꽁꽁 묶어 주시는 것,
그 자비를 바랄 뿐이다.

                                             *공지영 마리아·소설가*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05-19 1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