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주일 하루 전입니다.

 

신학교에서는 한 해에 가장 많은 손님이 오는 날을 맞기 위해 신학생들이 분주한 하루를 보냅니다.

일기 예보에서는 오늘 오후부터 밤 늦게까지 비가 온답니다.

아침 바람이 심상치 않고, 구름도 잔뜩 끼인 날씨입니다.

신부님들도 식사 후에 산책을 하면서 차라리 오늘 비가 오고 내일은 안 왔으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행사일에 비는 달갑지 않은 손님인 듯 싶습니다.

물론 세상은 역설적이라 봄 모내기를 준비하는 농부들에게 봄 비는 참으로 반가운 손님이지만,

내일 만큼은 잠시 이 반가운 손님께서 조금 늦게 와주시길 비는 마음일 뿐입니다.

 

이 번주는 내내 복음에서 이른바 "빵타령"을 들었습니다.

좀 불경스럽게 느껴지겠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살아 있는 빵이다"로 시작해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주십니다.

신부님들은 부활 3주일에 계속되는 '빵타령'으로 강론 소재를 잡는 데 애를 먹으십니다.

다 같은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웬지 모를 깊은 이야기들이 복음서에서 울려 퍼지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 빵타령의 종지부를 찍는 결정타가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곱지 않은 시선을 날립니다.

그들에게 생명의 주관자이자 생명을 약속해 주시는 분은 오로지 야훼 하느님 한 분 뿐이십니다.

그 분의 이름조차 부르는 것을 경외하게 여긴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님은 당당히 자신을 생명의 주인으로 소개하십니다.

그 말을 듣는 유대인들이 얼마나 심기가 거북했을 지 예상이 됩니다.

영과 육의 비유를 통해서 생명과 죽음의 신비를 일깨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신앙을 지닌 우리들이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과 말씀의 권위에 탄복하고 그 분을 따르던 제자들마저도

이제는 고개를 돌립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 역설적인 말씀과 행동에 등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영광의 메시아, 자신들을 정치적 질곡에서 해방시켜줄 메시아를 기다리던 이들에게

예수님은 고통 받는 메시아상, 세상의 가치와 다른 하느님의 가치를 선포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측근인 12제자들에게도 그 갈등은 이내 이어집니다.

마음으로는 떠나는 다른 제자들처럼 떠나고 싶지만, 마음 한 구석에 "그래도..."라는 미련을 가진 열두 제자들은 머뭇거립니다.

 

이 때 역시 무식하고, 단순한(?), 하지만 누구보다도 열정적이고 우직한 베드로가 나서서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이 무엇을 뜻하는 지 그들은 부활 이후에야 더 깊이 깨달았겠지만, 이런 고백 속에는 당장은 아니지만

예수님께 거는 베드로의 희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그 어떤 제자들보다도 더 희망하는 사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우리들의 삶 속에도 듣고 싶은 말과 듣고 싶지 않은 말이 있습닏.

김추기경님의 선종과 더불어 시작된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로부터, 축하합니다. 기뻐하세요, 건강하세요, 행복하세요 등 듣기만 해도 우리 가슴이 뿌듯해 지는 말들이 있습니다. 요즘 말로 멋집니다. 짱입니다. 킹왕짱이란 말도 들어가겠군요.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듣고 싶지 않은 말들도 많습니다. "넌 그럴 줄 알았어" "네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난 안돼", "한심하다" 온갖 욕설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들리는 이런 말들은 우리들의 가슴을 무너뜨립니다. 불행해지는 것은 한 순간입니다. 내 능력이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할 때 인간은 쓰러지는 체험을 합니다. 단 한 마디의 말 때문에.

 

몇 해전에 일본 학자가 발간한 "물은 답을 알고 있다."란 책에서 보면 물 분자의 결정체가 좋은 말과 나쁜 말의 파동에 영향을 받아서 조화롭기도하고, 파괴되어 엉망이 될 수 있는 물 결정체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우리 말이 담고 있는 파동의 힘이 물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거죠. 어쩌면 온 몸의 70퍼센트가 물로 된 우리들의 신체가 말로 인해 받는 영향력이 적지 않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살다보면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어야 하고, 들어야 할 말을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살면서 말의 홍수에 지치다보면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들어야 할 말은 외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들음으로서 삶을 시작하고, 듣는 일로 삶을 끝냅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듣고, 우리들의 양심에서 울려 퍼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내 이웃들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전해주시는 말씀을 들어야할 때도 있습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그래서 듣는 훈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각자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신학교에서 생활하는 신학생들에게만 성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각자 하느님의 고유한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사느냐가 아니라, 내 성소에 대해서 얼마나 책임있게 사느냐일 것입니다.

 

신학생들에게 성소주일이 내면적 축제의 날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소에 대해 감사하고, 내일 하루 신학교를 찾아오시는 분들을 위해서 감사와 기쁨을 함께 나누는 날이 되기를.

 

먼 훗날 이런 우리들의 들음과 응답의 시간이 완성되면,

우리도 베드로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주님, 저희가 당신을 두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당신은 생명의 말씀이십니다. 당신 곁에 영원히 머물게 해주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