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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살기 힘든 세상이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각박한 세상살이,
정직하게 살기에는 너무 많은 희생이 요구되는 세상이다.
힘든 세상살이는 신자들의 신앙생활도 각박하게 만든다.

주일 미사에 의무감으로 겨우 참석하고, 지루한 강론에 하품을 참다가,
주보를 뒤적이고 미사가 끝나면 신부님보다 먼저 퇴장한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기까지 솔직히 하느님 생각 한 번 없이 사는 적도 많다.
오히려
세상에 욕할 일들, 행여 손해나 볼까 남을 속이고 속는 그런 세상 속에 산다.
 나 살기도 바쁜데 신앙이 밥 먹여 주나. 집도 엉망이다.
대화 없는 부부생활,
자식들의 얼굴 보기도 힘들다.
중독된 TV 앞에서, 혹은 인터넷 앞에서 시간 죽이기가 일수이다.

왜 살까?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참 헷갈리는 세상이다.
뭐가 옳고 그른지 정말 모르겠다.
이제까지 옳다고 믿어온 것들이 거짓으로 판명 나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뒤통수를 맞는다.
어려서부터 성당은 열심히 다닌 것 같은데,
누가 혹여 성경이나 교리에 대해 물으면 대답하기가 궁색하다.
내가 믿는 것에 대한 확신도 없다.
교회가 하지 말라는 것,
지키라는 것,
때로는 세상의 논리와는 너무 다른 교회의 가르침도 부담스럽다.
주변에 믿음이 좋은 사람들을 보면 위선 같아 보이고,
새해부터 맘 잡고 기도라도 제대로 해볼 양이면 도대체 감동이 없다.
 
주변에서는 성당에서 채워주지 못한 영적 갈증을 채워주는 신비스런 기적이나
맞춤형 신심을 권유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게다가 바쁘신 신부님들과 만나 고민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불안한 미래에 확실한 처방을 내려주는 점술가들이 친근하고,
성당에서 밋밋한 미사보다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명상이나 뇌 호흡과 기체조가 더 매력적이다. 

우리가 찾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을 우리는 갈망하는가?

성공인가, 행복인가, 건강인가?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채워져도 채워지지 않는 하나가 남아 있다.
내 영혼의 빈자리이다.
우리 영혼의 한구석은 어떤 생의 확신과 신념으로 채워지기 전까지 늘 공허하게 남는다.
문제는 그 확신과 신념을 어디서 찾느냐이다.
그리고 상처투성이인 내 영혼을 누가 치유해줄 것인가이다.

마더 데레사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내 안에 너무나 끔찍한 어둠이 있다.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는다.”

신앙은 여가생활이 아니다.
신앙은 오히려 험난한 세상살이와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영혼의 빈자리를 하느님으로 채우기 위해 몸부림치는 결단이다.
그래서 신앙은 절실하게 찾지 않는 이들에게는 거추장스러운 의무처럼 느껴진다.
하느님을 찾기에는 너무 많은 것으로 우리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을 보자.
인생의 바닥을 친 사람들이 왜 더 간절히 하느님을 찾는지.
눈먼 내 영혼이 깨어져 빈자리가 생길 때 하느님이 다가오실 자리가 생기기 때문은 아닌지.

참된 신앙은 내 영혼이 그리워하는 하느님을 향한 열정을 되찾는 데서부터 시작해야한다.
 
신앙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가리는 일은 그 다음이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위원회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