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이었다. 단짝 친구가 내게 이상하다고 했다. 길을 가다 넘어졌는데 혼자 일어나지 않고 아버지에게 손을 내밀더라는 것이다. 그걸 지금도 기억하는 걸 보면 내심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요즈음도 나는 아버지 손을 잡고 다닌다. 미사 중에도 늘 손을 잡고 있다. 예측 못할 사고에 대비해서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아버지와 나는 손을 잡는 것 이상으로 연결되어 있다. 진작부터 깨달은 것은 아버지를 만날 때 아버지의 정서에는 내 감정이 반사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아버지께 조금 화를 내면 그 화는 몇 배로 증폭되어 돌아오곤 하였다. 그러나 내가 행복한 날은 아버지 역시 행복하셨다. 아기가 엄마의 영향을 많이 받듯이 아기처럼 순수해지신 아버지도 가까이 만나는 사람들의 영향을 여과 과정 별로 없이 받으시는 것 같았다.

  내가 아버지와의 연계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때는 미사 시간이다. 미사 중 아버지가 산만한 행동을 하실 때 돌아보면 나의 마음이 미사를 떠나 있을 때가 많다. 잡념에 빠져 있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아버지 덕분에 얼른 마음을 추스르게 된다. 때로는 산만한 정도가 아니라 성체를 모시지 못할 때도 있다. 입에 넣어드리는 성체를 끝내 밀어내시거나 성체를 모시러 나가시지도 않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이 모두 아버지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전날 하루 이틀 미사를 거르셨거나 밤에 잘 못 주무셔서 졸리시거나 무언가 영적으로 안 좋으실 때 그런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러 해를 지나면서, 대부분의 상황에 나 또한 연결되어 있음을 차츰 깨닫게 되었다. 시간적 여유 없이 급하게 아버지를 모시고 나오게 될 때, 아버지를 위한 아침 기도를 드리지 못했을 때, 여러 이유로 내가 기도도 잘 드리지 못하고 마음이 불안정할 때 아버지는 성체를 모시지 못하셨다. 요양원에서는 좋으시고 미사 중에도 안정적이셨는데 갑자기 성체를 모시지 못하는 날도 몇 번 있었다. 미사 중 갑자기 슬픈- 미사에서 오는 감동으로가 아니라 인간적인 감정으로- 느낌이 들어서 울다가 성체를 모시러 나가던 때였다. 성체를 모시러 나가면서 슬퍼하면 안 되는 거라는 걸, 그래서 분명히 배웠다.

  교회식구들에게 기쁜 날들이, 아버지께는 그렇지 못한 때가 일 년에 두 번 있다. 부활절과 성탄절이다. 성삼일과 성탄절 전 이틀간은 오전 미사가 없어서 아버지는 미사에 참례하시지 못하게 된다. 그 기간을 잘 넘기시는 것이 그래서 늘 큰 숙제다. 나에게 이번 부활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지만- 사순기간 중 나를 돌아볼 기회가 있었고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느끼게 되어서-, 그래도 얼마간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미사에 갔다. 부활 성야미사의 기쁨은 잠시 잊고 있었다. 그래서 미사 초반에 다소 산만하시던 아버지가 어느 음악에 살짝 허리를 흔드셨을 때, 그리하여 뒤에 앉았던 친한 자매가 아버지 졸리신 모양이니 자리에 앉으시게 하라고 말해왔을 때, 나는 아버지께서 주무시게 해 달라고 기도드렸던 것 같다.

  그러나 그건 나의 기우였다. 이어지는 성가마다 아버지는 조금씩 반응을 하셨는데 이번에는 허리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나와 잡은 손을 아주 조금씩 흔드시는 것이었다. 기쁨이었다. 아버지의 춤이 그냥 즐거운 음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은 며칠 전 지나간 아버지 생신 때도 확인된 것이었다. 사위가 아버지 좋아하시던 트롯을 틀어드려도 아버지는 춤추지 않으셨다. 온 가족이 아버지를 위해 다 모이고 당신이 돌보신 손녀딸이 극진히 모신 자리였어도 그랬다. 그런데 부활절 미사 중에는 며칠이나 미사를 거르신 끝임에도 불구하고 음악에 맞추어 손을 흔들고 계신 게 아닌가. 내가 주님 안에서 행복하면 아버지 역시 그러시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호산나, 알렐루야, 그런 단어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음악이었지만 아버지와 나는 잡은 손을 남모르게 흔들며 기뻐하였다.

  이 세상 소풍 끝내고 주님 앞에 가면 기쁨으로 환호하실 아버지가 상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