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 후 성당 마당에서였다.

  수녀님이 지나가시면서,

  “자매님 덕분에 아버님이 행복해요.”

하셨다. 내게서 불쑥,

  "저도 행복해요.“

라는 대답이 나왔다. 저절로 나온 답이었지만 말하고 나니 더 행복해졌다.

 

  아버지와 성당에 다니면 얼굴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서도 인사를 듣는 일이 많다. 대개는 위로의 말이거나 과한 칭찬이다. 그러면 전에는, 내가 아버지를 집에서 모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는 요양원에 계시며 단지 매일 미사에 모시고 나올 뿐이라는 것, 그리고 아버지가 평안하신 것은 나로 인해서가 아니라 주님 덕분이라는 것을 설명하려고 노력하였다. 일일이 답하기도 번거로워서 아버지 외출복 사이로 환자복이 잘 보이도록 일부러 단추를 몇 개 열어놓기도 하였다. 어떤 분은 나를 만날 때마다 효녀심청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효녀가 아니다.

 

  네 자매 중 장녀인 나와 아버지와의 관계는 먹이사슬 관계로 아버지가 나의 밥이 되는 입장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도 세 동생들 중 누구도 아버지와 맞서는 사람이 없었다. 유독 나에게만 아버지는 져주고 들어주는 약자가 되셨다. 그보다 전 성장기에 나는 스스로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연인이라고 자부하였다. 어떤 어릴 적 친구들 중에는 내가 늘 아버지 이야기만 해서 나는 아빠만 있는 아이인 줄 알았다는 친구도 있었다. 그러던 것이 내가 결혼해서 엄마가 되고 나이 들어가면서 차츰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아버지와 극단으로 대립한 것은 어머님의 죽음에 임박해서였다. 당뇨 후유증으로 온갖 장기의 기능이 떨어져가는 어머니를 두고 아버지는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정성을 다하셨다. 나는 좀 더 편안히 떠나시도록 놓아 주지 않고 고통만 연장하는 아버지가 미웠다. 그래도 마지막 순간이 오자 나는 의식도 없어 보이는 어머님께, 이제 아버지와 잘 지낼 테니 평안히 가시라고 말씀드렸다. 그게 내가 어머님께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인 것 같았다.

 

  어머님이 떠나시자 아버지와 딸들은 같은 슬픔 속에서 서로 위로하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자식과 남편이 있는 우리와 늘 혼자 계시는 아버지는 입장이 달랐다. 퇴근길에 들렀다 가는 딸을 버스정거장까지 배웅 나오시는 게 염려되어서 집안에 계시라고 하면, 안 그런다 하시면서도 몰래 따라 나오거나 멀어져가는 딸을 숨어서 바라보곤 하셨다. 요양원에 치매로 입원하신 후에는, 한동안은 내가 돌아가려 하면 함께 가고 싶어 하셨다. 만류하다 어려우면 모질게도, 나는 출가외인이어서 아버지와 함께 집에 돌아갈 수 없으며 아버지 집에는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말씀드렸었다.

 

  내가 퇴직을 하게 된 동기는 아버님을 편히 모시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결과로 보아 덕을 보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 나다. 연금을 받으시니 내 돈 들일 일 없으며 오히려 아버지 덕분에 차도 생겼고, 아버지 덕분에 보람도 없이 격무에 시달리는 대신 매일 미사에 참례하면서 여유롭게 지내게 되었다. 아버지 덕분에 자주 행복하고 아버지 덕분에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잘 알게 되었다.

 

  성당 가는 길을 걷지 못하고 차로 다니신 지 한 해가 되어간다. 어떤 날은 산만하셔서 차타는 방법을 잊으셨다가도 내가 먼저 뒷좌석에 오르면 아버지는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언제나 따라 타신다. 딸에 대한 그 신뢰가 고마운 아버지, 하느님께 가시는 날은 나 두고도 잘 떠나시리라 믿는다.

[출처] 아버지와 나|작성자 모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