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환자이신 아버지를 모시고 매일 미사에 참례할 때 염려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성가 중에 허리를 조금씩 흔드시는 때가 있다는 점이다. 경건한 미사 중에 경건하지 못하고 야한 춤이라니, 그럴 때면 나는 행여 누가 눈치챌세라 마음이 조마조마해져서 아버지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곤 한다.

  아버지께 그런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성가를 부르실 수 있던 때만 해도 그런 일은 없었다. 의사소통은 전혀 되지 않으시는 분이 미사 중에 성가는 얼마나 잘 부르셨던가. 아버지의 성가에 감동되어 함께 간 딸들이 눈물 나던 날도 많았다. 차츰 눈이 더 어두워지시고 내가 손가락으로 짚어드리는 악보도 잘 따라잡지 못하시고 주요 기도문들도 잊어가시게 되면서 미사 중에 하실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어진 지 상당히 되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성령기도회 같은 곳의 경쾌한 성가에서만 보이시던 춤사위를 본 미사 중에 보이시는 일이 생기신 것이다.

  아버지의 노래와 춤은 1-2년 전까지만 해도 계시는 요양원에서는 인정받는 실력이었다. 어버이날이나 무슨 특별한 날 파티를 하면 아버지로 인해 공연자들도 보람 있고 보는 이들도 행복해 했다. 그러면서 젊으셨을 때 멋쟁이셨겠다고 그렇지 않느냐고 묻는 이들도 있었다.

아버지가 노래를 잘 부르시는 건 오랜 동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가정보다는 직장이 더 중요한 아버지이셨지만 어머니와 아버지의 노래는 늘 들으며 살아온 것 같았다. 아버지보다 삼사십 살이나 젊은 딸들이 부모 세대의 흘러간 유행가를 다 아는 것이 그 증거가 아닐까? 하지만 아버지의 춤은 그 역사가 오래지 않았다. 아버지보다 근 열 살이나 젊은 어머니가 고전 무용에 이어 사교춤을 배우기 시작한 것도 아버지의 정년퇴직 무렵이셨을 것이다. 그 후 어머니의 권유와 지도로 아버지도 춤을 배우셨고 두 분은 함께 노인들이 주로 다니던 동네 클럽으로 진출하시곤 하셨다. 어머니께 새 한복이 자주 생기시던 때도 그 무렵이었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에 다시 춤 출 기회가 생긴 건 성당 노인대학을 통해서였다. 노인 대학 프로그램 중에 스포츠댄스가 있었다. 노인대학 축제나 구청에서 주최하는 스포츠댄스 경연대회가 있는 날이면 나는 카메라를 들고 학부모가 되어 응원을 갔었다. 검정 조끼에 빨간 나비타이를 맨 아버지와 플레어스커트를 입고 곱게 화장한 파트너를 카메라 렌즈로 바라보는 일은 기억만 해도 행복한 일이다.

  늦게 배우셨지만 춤은 아버지를 즐겁게 하였고 춤에 대한 소양 또한 아버지는 있으셨던 것 같다. 딸들 중에도 춤 실력이 있는 딸이 있지만 나는 영 아니었다. 게다가 다리 하나가 조금 짧은 나로서는 절며 춤추는 모습은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춤추고 싶은 감정이 이는 일도 전혀 없었다.

  그런데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친구가 우울할 때 틀어 놓고 살랑거리며 리듬에 몸을 맡겨 보라고 보내준 아바 음반이 그 원인이었다. 설마 내가 춤이야 출 거라고 생각은 못했지만 우울하니 기분전환이나 하자며 듣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친구 말대로몇 곡을 듣지 않아서 차츰 마음과 몸이 가벼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조금씩 흔들거나 리듬에 맞춰 집안을 돌아다니게 된다.

  미사 중에 춤추시는 아버지가 떠오른 건 아바 음반을 세 번째 들으면서였다. 아버지께서도 구름이 걷히듯 마음의 어둠이 가시고 행복해질 때 미사 중에도 몸을 흔들게 되시는 거라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건 주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문득 나도 이럴 바에야 라인 댄스라도 배워볼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즈음 삶의 기준은 내가 치매가 되었을 때이다. 내가 치매 환자가 되었을 때 아버지처럼 미사 중에 조금씩 흔들어도 좋을 것인가?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건한 이들의 눈살은 더러 찌푸리게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용서하시고 기뻐하실 것이라 믿어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