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성모님의 대축일을 맞이하여 성모님의 전구로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 개개인이

하느님 앞에 큰 은총의 하루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미사 시작하기 전에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본당신자 없이

성모님의 대축일을 맞이하는 건 제 사제 생활에서 처음인 것 같아요.

제가 이곳 배티성지에 온지가 8월 31일이 되면 꼭 1년입니다.

제가 오기 바로 전 성당은 성모님성지라 8월 15일에는 앉을 자리도 없지요.

공소신자들도 열 일 제껴 놓고 와서 돼지도 잡고, 큰 행사를 치렀습니다.

연휴기간이라 성모님의 성지도 아닌 이곳에 누가 찾아올까!

했는데 생각보다 많이 오셨어요.

우리 가톨릭은 믿을 교리가 있습니다.

또 지킬 교리가 있고. 행할 교리가 있습니다.

믿을 교리는 이성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믿는 겁니다.

예를 들면 하느님은 한 분이신데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세 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은 따질 교리가 아닙니다.

그 믿을 교리 중에 하나가 성모승천대축일입니다.

성모님이 무덤에 묻히지 않고 하늘나라로 올라갔다고 하는 것은 성서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진리는 성전에 내려오지요.

사제의 독신제도 또한 성서에 근거한 것은 아니고 성전에 근거한 것일 겁니다.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드립니다,

성서가 먼저 생겼습니까? 교회가 먼저 생겼습니까?

마르코 복음이 처음 씌어진 것이 예수님 돌아가시고 35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교회는 예수님 돌아가신 다음 성령강림 때, 만들어졌지요?

그래서 교회가 먼저 만들어졌습니다.

요한복음에 뭐라고 나와요?

이 책에 쓰여지지 않은 이야기(하느님의 진리)가 하늘과 땅을 메울 것이다!

그래도 성모님 승천에 관해 믿을만한 거리를 주셔야지요~

베드로, 바오로 사도의 무덤은 어디에 있어요?

로마에 있습니다.

인도를 사목했던 사도 토마의 무덤은 인도에 있어요.

이렇게 열 두 사도의 무덤은 다 있어요.

예수님의 빈 무덤도 예루살렘에 가면 있습니다.

열 두 사도의 무덤을 그토록 잘 지켜왔다면

성모님의 무덤이 있다면 교회가 얼마나 아끼고 가꾸었을까요?

그러나 전 세계 어디에도 성모님의 무덤이 있다는 말, 들어보지 못했어요.

초대교회부터 성모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이기 때문에

무덤의 부패를 겪지 않고, 하느님께서 들어올리셨다는 것을

믿을 교리로 내려오다가 비오 교황에 의해서 믿을 교리로 선포되었어요.

그 날이 마침 우리나라는 일제 36년으로부터 해방된 날이지요.

신자들 중에 기억이 나는 사람이 있는데 대개는 두 종류예요.

지지리 속을 썩힌 신자, 아니면 정말 열심히 살던 신자~

지지리 속을 썩혔던 사람 중에 알퐁소가 있는데 한마디로 그는 노숙자였어요.

가진 것도 없고, 장가를 가본 적도 없고, 술로 살다가 길거리 아무 곳에서나 잤어요.

누더기 옷이 그가 가진 재산의 전부였고, 그나마 누더기 옷이 떨어지면

신자들이 집에 있는 옷 가져다 입히고~~

알퐁소는 신분증도 없고, 보험카드도 없고,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큰 것을 하나 가지고 있었어요.

그게 뭐냐~

내 전화번호!

술을 퍼마시고 하수구에 처박혀 있을 때 경찰이 끌어내면서

“아저씨, 어디 살아요...... 정신 좀 차려요!”

그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몸짓은 왼손바닥을 내미는 것이었어요.

그 곳에는 나, 김웅열 신부의 휴대폰 번호가 적혀 있었어요.

그래서 전화가 오면 차를 끌고 가서 내가 보호자가 되어 데리고 옵니다.

그 놈을 목욕시키고, 내 침대에서 재운다음, 아침에는 북어국까지 끓여 먹이고

소주 한 병 주어서 내보내요.

그래도 알퐁소를 보내고 감실 앞에 꿇어앉으면

“주님 감사합니다!”

알퐁소는 방랑자였지만 그에게는 사람에 대한 신뢰!

우리 신부님만큼은 나를 거두어 주고 살펴준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았어요.

그가 나에게 신세를 진적은 2~30번도 더 되지만 한 번도 쫓겨난 적은 없었어요.

‘이 번호를 잃어버리지만 않는다면 나는 살 수 있다!’

방랑자 알퐁소에게는 ‘적어도 나를 사랑해주는 한 사람은 있다!’ 는

그 신뢰심 하나로 사는 것이었지요.

우리 삶을 되돌아보면 자신이 얼마나 방랑자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까?

영적으로, 물적으로~

신앙심도 저울에 달아보면 가볍디가볍고

항상 물질의 부족으로 고통 받고 살아야 되고~

우리의 삶은 알퐁소,그가 입고 있던 옷처럼

죄와 교만으로 또는 후회로써 군데군데 기워져 있고 더러워져 있지는 않는가!

가끔 술 취한 사람처럼 자기가 어떤 일을 한지조차도 모르고

자기가 한 말 때문에 후회하고, 성사보고, 어떤 때는 하수구에 처박혀 있는 듯한

그런 비참한 느낌이 들 때가 과연 없었던가!

알퐁소처럼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조차도 기억 못하고

내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조차 의식 못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우리가 이렇게 헤매고 살아도

알퐁소처럼 전화번호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살아요.

바로 그 전화번호의 주인은 바로 성모마리아!

성모님을 이론으로 믿는 것과 가슴으로 믿는 것과는 달라요.

어렵고 힘들 때 성모님께 매달리면 거절하실 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성모신심은 배워서 아는 게 아니지요.

엄마사랑은 이론으로 배우지 않아요.

성모신심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이름도 못 쓰는 단순한 할머니의 신심보다 떨어질 수 있어요.

저는 사제생활 하면서 내가 이 세상에 나온 책 70%는 읽었다고 자부하고

성모님께 대한 논문도 썼어요.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성모신심은

내가 어린 시절 부모님에게 배웠던 신심하나 뿐이예요.

엄마께 매달리면 절대 거절하지 않으신다!

엄마 사랑하는 데 이론과 논리가 필요 없습니다.

단순합니다.

알퐁소는 그 전화번호 하나만 붙들고 있으면 나 살려줄 사람 하나 있다.

이 전화번호는 우리 본당신부님, 김웅열 신부님이다.

그것을 1%도 의심하지 않았기에 살아났어요.

내가 항상 내 방에 재우고 옷 입혀서 재우고, 북어국 끓여서 내보냅니다.

지금은 그 알퐁소가 중소기업체 사장이 되었답니다.

내가 알퐁소를 위해서 참 희생과 기도 많이 바쳤어요.

어느 날 알퐁소가 오더니 “신부님, 내가 장사를 하나 할게요.”

그래서 고물상 하나를 차려주었더니 폐지 줍고...... 너무 잘 되었어요.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그에게 최근에도 다녀 왔어요.

성모신심 이야기 할 때마다 지 얘기 꼭 하니까

“신부님, 이제는 그만 좀 하세요!”

어머님께 드리는 전화번호가 뭐예요?

그게 바로 로사리오 기도예요.

예수님의 일생을 묵상하는 기도지요.

환희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

저는 신학교 다닐 때 그것이 이해가 안 갔어요.

로사리오 기도에서 왜 예수님의 공생활 부분이 빠졌을까!

저는 신학교 2학년 때부터 아무에게도 이야기 못하고

수 십년 동안 제가 빛의 신비, 그 부분을 만들어서 기도했어요.

그러다가 요한 바오로 2세가 빛의 신비를 발표하던 날, 저는 펑펑 울었어요.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 했던 다섯 개 중에 네 개가 맞았어요.

뭐만 하나 틀렸느냐~

산에 올라서 거룩하게 변모하신 그 부분만 틀렸어요.

이제야 말로 묵주기도는 완전한 관상기도가 되었지요.

예수님의 잉태서부터 성모님께 천상모후의 관을 씌우심까지~

예수님의 일생이 요약되어있는 관상기도!

가장 아름다운 기도!

장미 한 송이씩 올라가는 기도!

예수님의 일생을 묵상하는 기도!

우리가 로사기도를 통해서

성모님께 전화 드리면 옆에서 예수님이 듣고 계세요.

“아들아, 저 안양에 있는 루가가 암에 걸렸단다, 마흔 두 살밖에 안 되었는데

아이들도 어리고...그 아내가 울면서 전화한다!”

신앙생활 하면서 성모님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분들이 참 많지요.

개신교에서도 성모님께 대한 그릇된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요.

갓난아이는 태어날 때 엄마가 누구인지 모르지요.

옛날에는 조산원에서 아이가 바뀔 때도 자주 있었대요.

그때 만일 태어나자마자 아이가 자기 엄마를 안다면

간호사가 다른 바구니에 자기를 넣으려고 한다면

“잠깐만, 이 바구니는 내 바구니가 아니예요, 저 쪽 바구니에 넣어주세요”

갓 태어난 아이는 엄마를 모르지만 그 아이가 한 살, 두 살~ 되면서 엄마를 알지요.

코 밑에 점이 있는 저 여자가 배 아파 나를 낳아주고

나를 위해 대신 죽을 수도 있는 엄마라는 것을 알아요,

그때부터 그 아이는 시장에 갈 때도 엄마 치마 잡고,

무서운 개가 나타나도 엄마 치마 뒤에 숨고

무서운 아저씨가 나타나도 엄마 뒤에 숨고......

놀다가 집에 돌아와도 엄마부터 부르잖아요.

“엄마, 밥 줘!”

성모님은 어머니가 아니라 엄마예요.

'MOTHER’ 가 아니고 'MOM!'

메주고리예 성모님은 나를 MOTHER’ 라고 부르지 말고 'MOM!' 이라고 불러라!

어머니라고 불리우는 사람 앞에서는 말도 조심하고, 옷매무새도 조심해야 돼요.

아무리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친딸처럼 여겨도

며느리 입장에서 시어머니는 끝까지 어머니예요.

그러나 육십이 되어도 엄마 앞에서는 두 다리 쭈욱 뻗고~

반말 하고, 언니 같이.... 엄마한테는 세상에 못할 말이 없어요!

엄마는 자식이 잘못 되면 단호하게 방향을 잡아주고

자식이 아프다고 하면 달러 빚을 내어서라도 이 세상 좋은 것 다 구해주고

내 심장을 꺼내주고라도 살리고 싶은 게 엄마예요.

그러나 어머니는 그렇지 않아요.

성모님이 엄마라는 애절한 마음이 안 든다면

여전히 성모님과의 관계는 이론적인 관계예요.

참다운 성모신심은 성모님을 엄마라고 느끼고

엄마 치마에 매달려서 펑펑 울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참다운 성모신심이예요.

성모님이 엄마라고 느껴지지 않는다면 세례 받은 햇수와 관계없이

갓 태어난 아기가 엄마를 모르듯이 아직 갓난아기 신앙이에요.

묵주기도를 정성껏 다해서 바치세요.

시간을 정해 놓고 바치세요.

묵주기도의 좋은 점이 뭐예요?

아침에 환희의 신비로 시작해서 중간에 일이 있어서 끊어지더라도

다시 이어서 할 수 있잖아요!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 20단 못 바치겠어요?

아마 묵주기도 바칠 때마다 100만원씩 준다면 잠 안자고 바치면서

증명서 끊어가지고 올 거예요. 돈 달라고~

묵주를 차 안에만 달랑달랑 부적처럼 매달고 다니지 말고

매일같이 주님의 생애를 묵상하십시오!

아무리 술에 취해도 시궁창에 처박혀도

전화번호 하나로 그때그때마다 구원받았던 알퐁소처럼~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이 세상 고통에 짓눌리고, 십자가에 찌들려도~

묵주기도 하면서 미운 놈, 욕이 나오는 한이 있어도 기를 쓰고 묵주기도하세요.

묵주기도 하다보면 어느새 분노도 가라앉고, 엄마가 상처치유 시켜주세요.

올 한 해 동안 방황하고, 십자가의 무게에 눌려 힘들 때마다

묵주기도 붙들고 엄마한테 매달리도록 합시다. 아멘!

느티나무신부님(2011. 08. 15 성모승천대축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