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최인호 베드로┃작가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62년 전이었던 1950년 7월.

리 가족은 출애굽(出埃及)을 단행하였습니다.

모세였던 엄마의 지휘 하에 큰 누이를 비롯한 여섯 가족은

숨어 지내고 있던 아버지를 찾아서 청계산을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다섯 살의 어린이.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향해 떠난 출애굽처럼

불과 며칠 동안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40년의 고난과 맞먹을 수 있는 그 숨 막히는 탈출과정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넌 것은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은 아니었지만,

다리가 끊어진 상황에서 마흔 살초반의 엄마가

스무 살의 다 큰 처녀에서부터 이제 겨우두 살의 젖먹이까지 거느리고

나룻배를 구해 도강에 성공한 것은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팔을 펼쳐 물을 가른’모세의 기적과 다르지 않습니다.
 

 한강을 건너자 짐을 실은 수레바퀴는 모래사장에 빠져서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다섯 살의 저까지 수레에 달라붙어 온 가족이 비 오는 모래밭을 간신히 벗어나자 곧 어둠이 내렸습니다.

 

 피난 가고 없는 빈집에서 엄마는 우리를 위해 밥을 짓고 모기장을 쳤습니다.

하룻밤 잔 곳은 누에를 기르던 양잠실이었는데, 사방에 누에가 죽어있어

싸락눈이 내린듯하였고, 비릿한 냄새가 났습니다.

밤새도록 쌕쌕이 소리가 나고 멀고 가까운 곳에서 쿠앙쿠앙 폭음소리가 나도

저는 내일이면 아빠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에 켄터키 옛집의 검둥이처럼 마루를 구르며 세상모르고 잤습니다.


 

  다음날 일찍 아버지를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아아, 그무덥던 긴 여름날. 햇살은 눈부셨고 길은 가도 가도 끝없이 옥양목의 빨래처럼 펼쳐져 있었습니다.

더위를 먹어 배는 남산만큼 튀어나왔고 머리에는 헌데가 나서 견딜 수없이 아팠지만

저는 뒤뚱뒤뚱 오뚝이처럼 걸었습니다. 한고개를 넘으면 엄마가 말했습니다.

 

“저 고개만 넘으면 아버지가 있다.”

 이 말 한마디면 다섯 살의 어린이였지만 저는 벌떡벌떡 일어섰습니다.

아빠를 만날 수 있는데 더위쯤 대수랴.

물렀거라, 대갈장군(어릴 적의 제 별명입니다.) 나가신다.
훠이훠이 물렀거라. 골목대장 나가신다.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법조인의 신분을 숨기고 전란을 피해 미리 피난 와 수염을 기르고 밀짚모자를 쓴 농군 모습의 아빠가

성황당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미친 듯이 뛰어나와 맞아주던 모습을.

저를 헹가래 쳐서하늘에 번쩍 들어 올렸다가 부둥켜안던 그 우주와 같던품속을.


 

  그렇게 우리 가족의 출애굽은 끝이 났고 그해 여름 한철을 청계산 계곡에서 텐트를 치고 살았습니다.
  요즈음 저의 화두는 바로 이 다섯 살 때의 기억입니다.
저는 그때 아빠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 하나로 무더위와 부스럼의 고통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전쟁의 공포도 없었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고개 하나 넘으면 아빠가 있다는 말 한마디만이 생명이요, 힘이요, 구원이었습니다.


 

 저는 물론 알고 있습니다.

제 인생의 고갯길 저 너머에는 육신의 아버지가 아니라

저보다 더 저를 사랑하시는 영혼의 하느님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순일곱의 어른인 저는 다섯 살의 어릴 때보다

큰 두려움과 고통과 불안과 미혹으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 18,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순일곱의 저는 훨씬 지혜롭고 똑똑해졌을지는 모르지만

다섯 살의 철부지였던 그때의 저보다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온전하지 못한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워즈워스의 시 “무지개”처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오니

주님, 저를 다시 한 번 물과 성령으로 단순하고 순진한 ‘어린이와 같은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성경 인용은 공동번역 성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