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웅렬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강론

 

 

찬미예수님

마태복음28장 20절에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고 하셨어요.

 

 

그럼 어떤 모습으로 나와 같이 계시겠다는 뜻인가?

‘네 가지의 거룩함’ 속에 함께 계시겠다~

첫 번째, 성체와 함께 계시겠다~

두 번째, 거룩함은 성령과 함께 계시겠다~

세 번쩨, 거룩한 말씀인 성경과 함께 계시겠다~

네 번쩨, 위 세 가지의 울타리가 되시는 성모와 함게 계시겠다~

이 네 가지, 성체와 성경과 성령과 성모와 함께 내가 숨이 끊어질 때까지

함께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가톨릭의 중심은 성체이고, 성모신심은 그 울타리입니다.

울타리가 없는 집은 늘 불안하고, 언제 도둑이 들어올지도 모르며 경계가 불확실합니다.

천주교신자에게 울타리인 성모신심이 없으면 그냥 광야에서 떠도는 거예요.

일년 내내 묵주기도 하지 않은 사람은 껍데기만 천주교신자다~ 그 뜻이 아니겠습니까?

 

 

암브로시오 성인은

‘빵이 어떻게 예수님이 될까?’

‘그것은 축성에 의해서이다!’

사제는 예수님의 인격체 안에서 말하기 때문에 밀가루 조각은

사제의 입술을 통하여 예수님의 몸으로 변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얼마 전에 한 개신교 신학자가 세 가지 질문을 던져 왔습니다.

<첫 번째, 신부님,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저는 신학적으로 답하지 않고 이렇게 썼습니다.

<목사님, 당신은 태어날 때 아주 작은 몸이었지만 당신이 먹은 음식이 당신의 몸과 피로

변화됨으로써 당신의 몸이 자랐습니다. 인간이 먹은 빵이 몸과 피가 될 수 있다면

하느님이 이렇게 되는 것은 극히 쉬운 일일 것입니다.>

 

 

<두 번째 질의는 예수님이 그 작은 제병 안에 계시다는 것이 가능합니까?>

저는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목사님 주변의 풍경을 보십시오. 그 풍경에 비해 당신의 눈이 얼마나 작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그 작은 눈으로 저 넓은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영상으로도 되는 일을

하느님께서 하실 수 없겠습니까?>

 

 

<세 번째, 한 몸이신 예수님이 모든 제대 위와 제병 안에 계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거울을 마룻바닥에 던져보십시오. 깨진 거울 조각조각 마다마다에 깨지기 전의 영상이 다 들어가

있지 않습니까?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이 제병 하나하나에 존재하는 그것은 일도 아닐 겁니다.>

이렇게 답을 해서 등기로 왔기 때문에 등기로 보냈습니다.

 

 

천주교에게는 칠성사가 있지요. 그 칠성사의 중심에 성체성사가 있습니다.

나머지 여섯은 성체성사를 위해 빙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제보다 강론 잘하는 회장님도 많고, 사제보다 봉사 많이 하는 신자들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병신 같은 신부라도 사제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딱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성체를 축성하는 일입니다.

 

 

사제의 손과 입술에 의해서 예수님의 몸과 피가 되고, 천사들의 양식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 사제가 위대한 거지요.

기적과 신비가 있습니다.

기적은 검증이 가능한 겁니다.

어느 기도모임에 다녀와서 짧았던 다리가 길어졌다면 이것을 기적이라고 해요.

 

 

그러나 신비는 검증이 안 됩니다.

지금 축성이 안 된 이 제병도 밀가루이고, 축성 후에 여러분이

영성체 할 때도 물컹물컹한 살이 아닌 모양과 맛은 그대로예요.

신비는 신앙을 통해서 영적으로 확신을 가져야 가능합니다.

신앙보다 위에 있는 것이 신비입니다.

‘신앙의 기적이여~’ 하지 않고 ‘신앙의 신비여!’ 라고 합니다.

 

 

소화데레사 성녀는

‘나는 천국에서 예수님을 직접 뵙고 있는 영혼들이 부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대 위와

제병 안에 계신 예수님을 항상 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중국선교를 다닐 때, 50년 동안 박해 받았던 어느 교우촌에 갔더니

모든 집의 문의 방향이 한 쪽을 향해 나 있었습니다.

동향집이든, 남향집이든, 어떤 집이든 희한하게 한 쪽으로 문이 나 있는 겁니다.

그곳이 어디냐? 바로 성당이었습니다.

박해 때문에 성당을 마음껏 다닐 수 없었던 그 암울했던 시절,

성당은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늘 문 앞에 앉아서

성당 안에 있는 성체를 향하여 주님을 바라보았던 겁니다.

 

 

요한 보스코 성인이 이런 말을 하셨어요.

주님께서 많은 은총을 주기를 바랍니까?

그러면 그분을 자주 방문하십시오.

예수님한테 은총을 조금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럼 가~끔만 가십시오.

당신은 마귀가 당신에게서 멀리 달아나기를 원하십니까?

그럼 예수님을 자주 방문하십시오.

성체조배는 마귀를 정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방법임을 꼭 명심하십시오.

 

 

구약에서는 하느님 보면 죽는다고 되어 있지요?

그러나 신약에서는 그 반대입니다.

나를 보는 정도가 아니라 ‘나를 먹기까지 해라~’

예수님은 당신을 보라고 그랬어요.

당신의 몸까지 먹으라고 그랬어요.

이게 바로 구약과 신약이 다른 것이지요.

 

 

교도소 지도신부를 하면서 성체의 힘이 얼마나 큰지, 참 많은 체험을 했어요.

교도소의 사형수들은 일반 죄수들과 같이 있지 않아요.

미사 끝나면 성체를 모시고 내가 사형수 감방까지 가야 돼요.

우리 사형수 신자들은 미사시간을 알고 있어요.

11시부터 무릎 꿇고 철창 앞에서 한 시간 내내 성체를 기다리고 있어요.

내가 들어가는 인기척이 나면 그때부터 울기 시작해요.

주의 기도 끝난 다음에 성체흫 보여주면서 입에 넣어주면 우느라고 못 먹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어쩌면 지금 영하는 이 성체가 내 생애의 마지막 성체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신부님 얼굴 보고 한 달 후에 신부님 얼굴 다시 볼 수 있을까!‘

다시 한 달을 기다려요.

 

 

교도소 지도신부가 제일 힘들 때는 형 집행할 때, 그 앞에 서 있는 거예요.

저는 지도신부하면서 네 번을 형장으로 갔어요.

한 밤중에 소장한테 전화가 오지요.

“신부님 밤늦게 죄송합니다.”가슴이 철컥~ 하면서 “누굽니까?”

“천주교신자 아무개, 법무부로부터 사형 집행하라는 전통이 왔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와서 종교행사하시고 입회해 주십시오.”

그때부터 저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요.

 

 

사회에서는 조직폭력배로 살았지만 형무소 들어와서

세례 받고 천사처럼, 아기처럼 살고 있는 23살 안드레아!

무기징역으로 하려고 청원서도 내고 애써 봤지만 결국 내일 그 아이가 가는구나!

내일 그 아이 만나서 무슨 말을 할꼬!

 

 

한잠도 못자고 새벽같이 가면 간수들이 갈아입을 옷을 들고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긴 복도를 따라 그 아이가 있는 감방까지 가요.

철창 앞에서 무릎 꿇고 벽을 보고 기도하는 그 아이의 얼굴에서는 피땀이 흘러요.

사람은 자기 죽을 때를 아는가 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게쎄마니에서 피땀을 흘렸다고 했지요?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히면 되면 모세혈관이 터져서 피가 땀과 함께 흘러나와요.

의학적으로는 이것을 ‘혈한증’ 이라고 불러요.

이 아이도 무언가 불안해서 밤새 잠 못 자고 기도하고 있었겠지요.

인기척이 있어 돌아봤더니 누가 있어요?

이 새벽에 신부님이 올 일은 딱 하나!

‘설마설마 했더니 내가 오늘 죽는 날이구나!’

나를 보자마자 기절을 해요.

물을 먹이려고 하지만 오징어처럼 흐물흐물하고 힘을 못 써요.

자기 힘으로 못 일어나면 개처럼 끌려 나가는 거예요.

저는 그 아이를 내 품에 안고 “눈 좀 떠봐라 안드레야, 성체 영해야 돼!”

숟가락에 성체 반을 쪼개 물에 녹여서 입을 벌려 넣어요.

사람이 죽기 전에 너무 고통스러우면 식도가 닫힙니다.

이 아이도 성체를 못 넘기고 입에서 맴돌지요.

그때 그 아이의 목에다 대고 기도해요.

‘예수님 제발 목 좀 열어주세요, 당신이 들어가셔야만 이 아이가 자기 발로 일어섭니다.

아니면 개처럼 끌려나가요.‘

주님이 들어주셔서 꿀떡 하고 넘어가는 소리가 나요.

성체를 영하고 나면 어디서 그런 힘이 생기는 자기가 벌떡 일어나서

자기 손을 옷 갈아입습니다.

“신부님이 원망스럽지..... 너 못 살려서 미안하다.”

“신부님 울지 마세요. 그러면 제가 더 힘들어요.”

 

 

둘이 팔짱을 끼고 긴 복도를 따라 가면 형장으로 가는 문이 열려요. 섬찟하지요.

하얀 벽 한 가운데 밧줄이 나와 있고 입회인들이 들여다보고 있어요.

교수형은 통상적으로 보자기로 얼굴을 가리고 그 보자기 위에 줄을 내리지요.

 

 

우리 교우들은 하나같이 보자기를 안 가리고 죽는다고 합니다.

왜?

난 차라리 가렸으면 좋겠어요.

“신부님 강복 주세요. 저 갈게요.”

“그래, 신부님도 너보다 조금 늦을 뿐이다. 너 23년 밖에 못 살았지만 그동안 세례 받고

보속하고 살았으니까 성모님 예수님 만나면 안부 좀 전해줘라!”

“예, 신부님 축복 주세요.”

그 아이 앞에서 마지막 강복을 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안드레아에게 죽음에 임할 때

공포로부터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어 영원한 안식에 들게 하소서.”

‘덜커덩~’

그 아이가 밑으로 떨어지면서 줄이 막 요동을 쳐요.

두 다리 묶이고 두 팔도 묶이고....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8분 이상을 못 견뎌요.

막 흔들리다가 딱 서면..... 숨이 끊어진 거지요.

바로 내리지 않고 10분을 더 매달아 놔요.

칠성판에 내려놓으면 의사가 제일 먼저 사망신고를 하고 그 후에 내가 가서 그 아이 끌어안으면서

‘애썼다!’

그런데 우리 신자들은 죽고 난 후의 그 모습이 하나같이 깨끗하고 예뻤어요.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고 죽고 난 후에도 모습이 아름다운 그 힘은

바로 한 달에 한 번씩 영했던 성체의 힘이었습니다.

 

 

저는 신자 아닌 아이들도 입회한 적이 있습니다.

“축복해 줄게요.”

“무슨 축복은~ XX새끼”

오만 욕을 다 하면서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면 억지로 밧줄을 집어넣어요.

그러다 죽고 난 후의 모습, 그건 사람의 얼굴이 아니에요.

사람은 잘 죽기 위해 잘 살아야 됩니다.

한 평생을 잘 산 사람은 죽고 난 후의 모습도 아름다워요.

한평생 못되게 살고, 죽는 순간까지 회개하지 않은 인간은

죽은 얼굴도 그렇게 험악할 수가 없어요.

비록 세상에서 험악하게 살았지만 우리 천주교신자 사형수들은

세례 받고, 기도하며, 매달 성체를 영하면서 예수님으로 변해갔던 거지요.

 

 

죽을 때도 아무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그 어린 나이에도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교우 여러분들 나나 여러분이나 형이 언제 집행될지 모를 뿐이지, 다 사형수예요.

아침에 눈뜨면 자기 몸에 축성하고

‘주님 오늘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생명연장에 대한 기도가 모든 기도의 첫 번째 기도입니다.

‘오늘 하루를 내 생애의 마지막으로 알고 살겠습니다~’

사형수들은 죄를 짓지 않아요.

그러나 내 삶이 무한히 남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분노, 욕심.......을 무슨 신주단지라고 끌어안고 살아갑니다.

 

 

성체성혈대축일이에요.

성모님께서는 이 환난의 시대, 우리가 싸워 이길 수 있는 영적인 울타리

다섯 개중 하나가

첫 번째, 가능한 매일 영성체 하여라.

매일이 어려우면 일주일에 두 서너 번이라도 성체를 영해라!

고혈압, 당뇨 환자들은 매일 약을 먹어야 하지요?

썩어 없어질 몸을 위해서는 벌벌 떨면서도 왜 영혼의 약인 성체는 안 먹습니까?

 

 

마음만 먹으면 매일미사 할 수 있지요?

본당에서 아침 시작할 때, 새벽미사 아니면 하루를 끝마칠 때 저녁미사!

미사로 시작하고, 미사로 정리할 수 있어요.

평일미사의 제일 좋은 점은 헌금이 없다는 사실이지요?

이렇게 훌륭한 장점이 있는 평일미사에 여러분이 자주 참례하시길 바랍니다.

♧느티나무신부님 (2013. 06. 01 배티 은총의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