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선사가 행자의 몸으로
스승을 찾아 금강산에 갔더니
스승이 밥 지을 부뚜막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그가 아무리 정성껏 부뚜막을 만들어도
정성이 없다고 걷어차길 한번, 두번,,,,, 여덟 번!

그래도 그는 오로지 스승을 믿는 마음과
도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으로 화 한번 내지 않고
다시 온갖 정성을 기울여 부뚜막을 만들었지요.

아홉 번째!
스승은 부뚜막은 쳐다도 안보고
“이제 너의 이름은 구정(九鼎)이다” 하시며
제자로 삼아 道를 일러주시니
言下에 대오(大悟)를 하였습니다.

****************************************

방거사가 마조에게 찾아가 물었습니다.
“만법(萬法)과 반려가 되지 않는 것은 누구입니까?”
“그대가 한입에 서강물을 다 마시고 오면 말해 주겠다.”
그러자 거사가 퍼뜩 깨달았습니다.

한강물을 한입에 다 마셔야 한다고 스승은 말합니다.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해야만
깨달음의 정답을 주겠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많은 준비를 합니다.

기초교리도 배우고, 반야심경,
천수경,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업장참회도 해야 하기에
지장경 000만독(讀), 관음경 000만독(讀)....

마음만 가지고는 정성이 부족하여
절도 3000배, 만배, 십만배...

그러고도 뭔가 미흡한 생각에
큰스님 찾아 이절 저절 방방곡곡 .....

참선이 체질인가?
기도가 적성인가?

명당 찾아 스승 찾아 남도 삼백리........


그렇게도 많은 준비 운동을 했지만
스승은 폭탄주도 아니고
한강물을 완샷으로 마셔야
도를 일러준다 하네요.

한강물을 완샷으로 마시는
도리가 무엇일까요?

“나”라는 생각을 모두 놓아버리고
스승의 가르침을 100% 수용하는 마음이 없이는
그 도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단 한번에 육체가 나라는 생각을
죽여 버릴 수 있는 용기!
그러한 용기가 없으면 계속
준비 운동만 하는 꼴이 됩니다.

“나무아미타불"을 열 번만 하면
극락에 간다고 합니다.

아미타불이란 무량수불(無量壽佛),
무량광불(無量光佛)을 뜻합니다.

우리의 진여 불성이 본래 무량한 수명과
무한한 광명으로 되어 있기에
우리의 본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바로 무량수불이고 무량광불이다”
라고 믿는 것 뿐 입니다.

유무식을 떠나서, 준비운동을 했던 말았던,
업장이 무겁건 가볍건, 이유를 막론하고
“내가 부처요, 영원한 생명이다”
라고 믿는 것이 안심 입명처입니다.

지금까지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한번에 부처가 되는 일은
지극히 간단하기에 많은 이들은
“나 같은 중생이 어찌 부처를 넘보고
부처와 견줄 수 있을까?”하며
믿으려 하지 않기에
고향에 있으면서도 집으로 가지 않고
밥이나 얻으러 걸식을 합니다.

진정한 수행은 내가 바로
참 부처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부처님의 팔만장경이
“네가 바로 부처다”라는
사실을 이해시켜주려고
부처님이 고구정녕히
이런 저런 방법으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법화경을 보더라도
“네가 바로 부처요,
나의 둘도 없는 친아들이다.”라고 하여도
자식(중생)이 아버지(부처님)을 믿지 않고
두려운 마음에 멀리 도망가 버릴까 싶어
하찮은 일거리를 주며 아버지의 말을 믿게끔
준비운동을 시킵니다.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
마음과 육체 사이에서 일어나는 번뇌를 가지고
전쟁을 하는 것이 절대 참선이 아닙니다.

수행을 한다고 하면서,
무언가를 성취하기위해서 고군분투하고,
일어나는 마음을 제어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
실질적으로는 허공의 뼈다귀를 부수는 일이요,
귀신 방귀의 털을 찾는 일입니다.

마음은 근본적이고 실제적인
어떤 존재성이 없습니다.

님들이 그렇게 금지옥엽으로 생각하는
마음, 마음, 마음이란 것이
나, 나, 나 하는 것이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우리 그대로가 이미 완전한 부처이지만
자기 스스로 믿지 못하고
내 몸이나 그림자에 불과한 마음을
나라고 생각하는 착각 속에 살 뿐입니다.

“내 몸이 내가 아니요,
내 마음이 내가 아니요.”라는
생각만으로도 우리는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생각만으로도
우리는 지고(至高)의 행복을 느끼며
부처로서 생각하고, 부처로서 행동하고,
부처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깨달은 이와 그대가 별개의 존재거나,
다르다고 생각하거나,
어떤 영적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특별한 수행법을 익혀야 한다는
그릇된 믿음에 결코 빠지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달라이 라마도
“어떻게 살아야 옳게 사는 길인가?”에 대한 답으로
“오직 보디샷트바(보살)로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만이
지금 여기서 그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라고 답했습니다.

자신에게 한계를 두거나 건망증으로 잊지 말고
오직 “내가 바로 부처다!!!”라고
믿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 뿐입니다.

익숙한 과거의 업력으로
생각생각 잊어버려도
생각생각 내가 부처임을
자각하며 속지않아야 합니다.

“이뭣꼬?”를 하는 것도,
호흡을 주시하며 그것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를 보는 것도,
우리의 흩어진 마음을 집중하여
자신이 참부처요 아미타불임을
한 순간도 놓치지않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집중력
(내가 부처임을 잊지 않는 깨달음)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애쓰지 않아도 되는 지점까지 무수한 노력과
강렬한 집중이 필요합니다.

그 순간까지(得力: 힘들이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경지)는
많은 노력을 하여야 합니다.

그 정도 수행은 되어야
“내가 육체다. 내 생각이 나다”라는
망령된 관념이 사라지며
자신을 괴롭히던 무수한 집착과
갈애(渴愛)에서 벗어납니다.

마치 해가 뜨면 자연스레
천년의 어둠일지라도
순간에 걷히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자기는
육체도 아니고 마음도 아닙니다.

육체나 마음과 연관된 어떤 것에
생각이 머무르고 있는 동안에는
진정으로 “내가 부처다”라는
믿음과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강열한 집중이 되지 않으면
바로 습관적으로 생각들이
몸과 마음에 머물러
“나는 육체요, 마음이다”라는
그릇된 생각과 업력으로 빠져 듭니다.

흩어지지 않는 일념의 결단력으로
“나는 누구인가?” 라고 묻는 것이
바로 “내가 부처다”라는
마음을 견지해 나가는 길입니다.

모든 마음의 환(幻)인 그릇된 집착과 분별을 여의고
본래가 부처인 그 자리에서
항상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수덕사에서 제현 합장()


출처 : 禪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