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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8주년 기념 중편불교소설 당선가작-구슬아 13 노명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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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우리 식구가 모두 여든 네 명이네."
"사세(寺勢)가 말도 못하게 쇠잔해졌구나."
"그렇지. 문정왕후 때만 하여도 비구니가 오천 명이 넘었다고 하던데"
"전란으로 불타 없어지기 전이니까."
"지금은 자수원이라고 격하가 되었지만 인조 임금님 전까지는 자수궁이라 해서 궁궐대접을 받았다지 않아. 광해군 때 상궁 김개시 세력의 총집합소 역할을하다가 인조반정으로 철퇴를 맞은 후로 점점 쇠락해지고 있는데 앞으로는 옛날의번성함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아."
자수원(慈壽院)은 임금이 승하하시면 후궁 중에서 아들이 없는 사람이 들어와살던 곳이다. 아무리 자식 없는 후궁이 은퇴하여 마지막 거쳐가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그들도 한때 정치세력과 깊은 인연을 맺고 살았으므로 자수궁은 세상 돌아가는 움직임에서 비켜서지 못했다.
자수궁은 개국 초 세종이 승하한 뒤 문종이 선왕의 후궁들이 거처할 곳을 마련하기 위하여 태조의 아들인 무안군 방번의 옛집을 수리하여 자수궁이라고 이름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세종 소생이 18남4녀였다고 하니 그 비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세종의 사후에는 이들 가족과 가솔들의 문제가 심각했을것이다. 그 후 성종이 즉위한 후에도 세조와 예종의 비빈(妃嬪)이 자수궁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연산조에 이르러서는 이곳을 「회녹각(會綠閣)」이라는 이름을 붙여 흥청들의 거소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명종조에 들어와서는 문정왕후가 섭정하면서 일반 사가(私家)를 개조하여 사용하던 소규모의 자수궁을 궁궐의 형태로 신축하고 불교 사찰로 변모시킨다. 유림들의 대단한 반대 상소가 잇따랐지만 문정왕후는 독단으로 강행하여 이 안에 불교사찰 식의 종루, 나한전을 짓기까지 하였다. 문정왕후는 이곳을 공식적인 불사를 행하는 장소인 동시에 자신의 세력기반의 중심축으로 삼으로 하였다. 그러나문정왕후가 돌아가고 나서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다가, 광해조에 들어와 인왕산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인경궁, 경덕궁과 함께 자수궁을 새로 지으면서 장소를 달리해 새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 후 인조가 반정한 뒤로자수궁이 폐지되고 자수원이라 이름을 고치게 되며 이때부터 퇴락된 비구니사원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도성 안의 비구니 사찰은 자수원 이외에 인수원(仁壽院)이 하나 더 있었다. 인수원은 조선국초에 세워진 정업원의 후신으로 원래 왕실의 지친이나 내명부의 여인들이 출가하여 거처하던 곳이었다. 태종 8년의 기록을 보면 고려말의 거유(巨儒)였던 익제 이제현의 딸인 공민왕비 혜화공주가 정업원의 주지로서 열반했다하며, 태종 11년에는 정업원 주지 경주 김씨(정종 정안왕후의 언니)에게 별사전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보아도 인수원이 왕실과 직결되어 있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던 것이 세종 30년이 되면 철거되는 운명에 처하는데 이 때 정업원 소속 서울의 노비 수가 4백89명이며 3천2백15명이었다고 한다.
정업원은 세조의 왕위 찬탈 과정에서 희생된 단종비(端宗妃)의 슬픈 삶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단종이 유배된 뒤 단종비는 궁궐에서 나와 정업원의 비구니가 되어 살았는데 세조가 요절한 자신의 아들을 정업원에서 추복하기 위하여 쫓아내므로 다시 동대문 밖 청룡사로 나가 영월 땅을 바라보며 생을 마치게 된다.이 때의 청룡사도 정업원이라고 불렀다. 연산조에는 도성내의정업원이 훼철되었다가 명종 원년에 문정왕후의 요청으로 옛 정업원 자리에 인수궁을 짓고 정업원을 다시 도성 안으로 옮겨 와 지수궁과 함께 또 하나의 니원(尼院), 즉 비구니절이 되는데 동시에 질병이 있는 궁인의 요양소의 역할도 겸하게 된다.
"여기 봉은사에도 어명이 내려왔었나?"
"물론, 나는 그때 남한산성에 있었는데 마침 옛 동무가 임금님의 교지를 받들고 왔더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걱정스러워.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못할 것 같아."
"걱정하지 말아. 내가 가만히 안 있을 테니. 왜란 때 목숨걸고 싸우고 왜놈에게 다 잡혀 먹힌 나라를 구한 것은 바로 우리 승도(僧徒)였고 폐허가 된 땅을 일으켜 세운 것도 모두 승도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인조조에 우리 스승님과우리 문도들이 무엇 때문에 땀흘려 노역을 마다하지 않았는지 그들도 잘 안다 옛날 뿐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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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1 07:39:55 (*.114.144.111)
2016.04.24 07:13:38 (*.114.14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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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곡 스님의 말이 점점 격앙되어가고 있었다.
백곡은 이번 조정의 처사에 대하여 반박하기 위하여 오전의 모임에서 숙의한내용을 중심으로 기록을 해놓아야겠다고 작정하고 방으로 돌아와 몇 가지 사항을조목조목 적어 놓았었다. 연성이 잠들어 있을 때 적은 것이다.
+종이를 중국에 바친 것은 모두 치의(緇衣)에서 나온 것이다.
+온갖 역사(役事)의 독촉이 하도 많아 아문(衙門)에서 겨우 물러나오면 다시관청의 명령이 계속 내려온다. 바빠서 때를 어기면 옥에 갇히기도 하고 창졸해서어쩔 줄을 모르면 매질을 받는다.
+각 도의 교루(郊壘)와 남한의 산성을 다 쌓았다. 게다가 여기까지 천리길의양식을 나르고 해마다 성을 지키는 일이 힘들어 몸은 파수꾼과 같이 고달프고 모습은 전쟁하는 군인처럼 남루해진다. 이렇게 해서 감색 머리털과 푸른 눈동자는바람과 비에 시달려 빛이 바래고, 흰 버선과 흰 누더기 옷은 진흙과 티끌을 뒤집어쓰게 마련이다.
+이렇게 시달리다가도 급한 변란이 생기면 벌처럼 둔을 치고 개미처럼 모인다.
+전쟁터에 나가면 번개처럼 끌어 잡고 천둥처럼 달린다.
+천백(千白)으로 무리를 만들고 15로 떼를 지어 복숭아나무 활과 가시화살을왼쪽으로 당기고 오른쪽으로 뽑으며 큰 창과 긴 칼로 앞에서 몰고 뒤에서 밀며,칼을 쓸 때는 진초(晉楚)의 강함을 다투고, 진을 칠 때는 진월(秦越)의 법을 익힌다.
연성은 백곡의 말을 경청했다. 백번 옳은 말들이다.
백곡이 격앙된 말을 마치더니 느닷없이 연성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 보다가연성을 나지막히 불렀다.
"구슬아"
"으응?"
연성은 깜짝 놀랐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부르던 이름이다.
예전엔 오빠도 그렇게 불렀다. 은쟁반에 구슬 굴러가듯 목소리가 예쁘다고 했다.
"구슬아, 너무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불공드리며 기다려라. 우리도 여기서 최선을 다 할테니 우릴 믿고. "
"오빠."
연성은 어디서부턴가 힘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다 잘 될 것이다.
Ⅲ
삼십만근이나 되는 큰 종은 한 조각 쇠로 만들어질 수 없고, 천 칸이나 되는큰 집은 한 잎 풀로 지어질 수 없습니다. 신이 주상 전하의 존엄을 모독하고 당돌하게 말씀을 올리는 것은 신하된 도리를 다하기 위함이며 성군의 거룩한 다스림을 부축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은 전하께서 승니를 모두 사태(沙汰)시키려 하시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부처가 서방에서 나와 중국으로 들어왔으니 지역이 다르기 때문입니까. 上古의법이 아니니 시대가 다른 때문입니까. 또는 인과를 거짓으로 말하고 응보를 잘못드러내며 윤회로 속인다 하십니까. 밭도 갈지 않고 놀고먹으면서 재물만 소모한다 하여 그렇게 하십니까. 망령되게 머리를 깍고 늘 법의 그물에 걸리어 정교(政敎)를 손상시킨다 하는 것이 이유입니까. 아니면 부도(浮屠)라 빙자하여 역사(役事)를 기피하고 군대에 빠진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까.